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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서평,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2020.07.14 | 조회 4763 | 공감 0

 서평,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조선사연구》는 국학자이자 민족사학자인 위당 정인보(1893-?) 선생이 1935년 1월 1일부터 다음해 8월까지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기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원래는 조선시대까지 포함하여 그야말로 5천년 역사를 다룰 예정이었지만 282회를 끝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중단된 이유는 소위 ‘일장기 말쇄사건’을 빌미로 동아일보가 강제정간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해방 직후에 ‘오천년 조선의 얼’은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서울신문사에 의해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상권은 1946년 9월, 하권은 1947년 7월에 나왔으니 저자 생전에 간행된 것이다. 저자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북한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에는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 모두 6권으로 된 《담원정인보전집》이 간행되었다. 그 가운데 제3권과 4권이 《조선사연구》에 할당되었다. 연세대본에는 서울신문사본에는 없던 ‘고구려 패업과 영락대왕’ 부분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소개하는 2012년의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펴낸 책은 세 번째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장을 쉽게 풀어쓰고 내용과 관련된 주석을 많이 붙여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특징이 있다.


《조선사연구》는 우선 책의 분량이 대단하다. 상권이 847쪽, 하권이 959쪽에 달한다. 얼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서론을 포함하여 종교와 학문, 제도 등을 다룬 ‘전고갑典故甲’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까지 포함하여 모두 2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고갑’은 정치사 위주의 서술로 인해 저자가 그 동안 소홀히 해 온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다루었다. 저자가 ‘전고갑’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 뒤로도 전고에 관한 서술을 계속 이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재가 동아일보 사정으로 중단되면서 전고갑으로 그쳐야만 하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계획한 것의 십분의 일 정도만 《조선사연구》로 간행되었으니 만일 연재가 계속되었다면 고려와 조선까지 포함하여 한국사대관에 해당하는 대작이 나왔을 것이다. 


부록으로는 저자가 국사를 연구하게 된 개인적 계기와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의 요강을 담은 ‘조선사연구 부언附言’과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이라는 제목의 글이 붙어 있다. 후자는 소위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시도한 논문이다. 이 두 개의 글은 《동아일보》 연재에서는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서울신문의 요청으로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우리역사연구재단본의 역주자인 문성재 박사가 번역한 광개토대왕비문이 첨부되어 있다. 문성재 박사는 한문에 정통한 사람이라 그의 번역문은 학계에서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문박사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주학연의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2009)를 비롯하여 중국어로 된 서적을 여럿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와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2018)이라는 한국고대사에 대한 책도 저술하였다.




필자는 그가 지은 두 권의 저서를 읽고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다. 공부가 취미이면서 특기이며 직업인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문학과 어학으로 중국의 남경대학과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앞의 두 저서로 고대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중국 고대문헌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는 왜곡된 한국사를 바로 잡는 일에 과감히 뛰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역주자가 원래 국사학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위당 정인보 선생 역시 국사학자는 아니었다. 《조선사연구》같은 대작을 쓴 사람이 원래 국사학자가 아니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부록에 있는 ‘조선사연구 부언’ 첫머리에서 위당 스스로가 인정한 사실이다.위당은 원래는 한학자였다. 1924년 연희전문학교에 교수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조선문학과 한문학을 가르쳤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원래 국사연구자가 아니었지만 일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와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논란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우리 역사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한국사 왜곡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위당이 1920년대에 한국사에 차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식민사학의 한국사왜곡에 대한 분개에서 비롯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손을 댄 일은 소위 실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소개였다. 1931년 《동아일보》에 17회에 걸쳐 ‘조선고서해제’라는 제목으로 《하곡전서》, 《대동여지도》, 《담헌서》, 《택리지》, 《훈민정음운해》, 《무예도보통지》 등을 소개하였다.


하곡전서는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의 문집을 말한다. 정제두는 조선 양명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인물인데 위당 역시 양명학자였기 때문에 하곡을 소개한 것 같다.  《담헌서》는 18세기 조선의 선진적 사상가였던 홍대용의 전집이다. 이는 위당이 성리학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의 길을 모색하는 인물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또 훈민정음에도 관심이 많아 18세기 학자 신경준이 쓴 《훈민정음운해》를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영인본에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제1권 간행을 기념하여 《동아일보》에 다산을 소개하는 글을 싣고 또 다음 해에는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회 창건에 참여하여 논설을 발표하였다. 


옛 문헌들에 대한 연구는 역사연구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 작업이다. 문헌을 연구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역사연구를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위당은 조선후기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역사연구를 위한 기초를 차근차근 닦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사에 대한 이러한 기초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에 《동아일보》에서는 그에게 한국의 정신사에 대한 원고를 요청하였다. 위당이 그의 연재 제목을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 이름 붙이 것도 나름대로 한국의 정신사를 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사를 쓴다는 것은 18세기처럼 사상가들의 저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면 쉽지 않다. 위당이 한국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을 다루면서 직면한 것이 이러한 문제였을 것이다. 단군조선 같은 주제에서는 먼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신화처럼 치부된 단군조선이 실제 역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문헌들을 섭렵하였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 민족주의 재야사학의 주장과 흐름을 같이 한다. 그의 고조선사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후삼한론이다. 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제기한 것으로 고조선이 진한, 마한, 번한이라는 세 명의 한이 다스리는 통치체계를 갖추었으며 고조선이 망한 후 그 일부가 내려와 남한 지역에 마한을 중심으로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는 설이다.


이러한 전후삼한론은 조선 중종 때 이맥이 남긴 《태백일사》라는 책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위당은 신채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스스로 단재의 《조선사연구초》를 보고 그 안목에 탄복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단재의 이 책은 묘청의 난을 다룬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과 ‘전후삼한고’ 등의 뛰어난 논문이 실려 있는 책이다. 원래는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이다. 위당의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신채호의 고조선사 인식 특히 전후삼한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위당은 해모수가 세운 부여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부여는 고조선의 장자나 마찬가지 국가였다. 한나라 초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일부만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없으며 고조선의 적통은 부여에 있었다. 사서에 별로 기록이 없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와 고토 회복을 위해 계속 싸웠다. 중국사서에서 예맥으로 기록된 이들이 바로 부여라고 하였다.


위당은 또 부여왕의 계보도 제시하고 있다. 해모수, 부루(해부루), 금와, 대소, 위구태, 간위거, 마여, 의려, 의라 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위구태로부터 의라에 이르는 계보는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이름이다.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에는 의려와 의라가 동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의려국의 왕으로 나온다. 


한나라가 무제 때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에 사군을 설치하였다. 물론 위만이 차지하였던 고조선의 서부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당은 한사군이 결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서와 요동 지역에 위치하였다는 것을 중국문헌들을 통하여 입증하려 하였다. 한사군 위치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소위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사이에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위당 역시 이 문제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한사군의 위치와 연관되어 중요한 강으로 알려져 있는 패수浿水가 한반도에 있는 대동강이 아니라 산해관 근처에 있는 ‘고려하高麗河’라고 하였다.(상권 277쪽) 


중국사서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마치 한반도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것은 그 두 군을 이름이 같은 낙랑국 및 대방국과 혼돈했기 때문이라 한다. 최리가 세웠다는 낙랑국은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나온다. 대방국은 백제와 인접한 나라 즉 한반도에 있던 나라로서 요서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서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상권 469쪽) 대방국의 존재는 위당의 독특한 주장인데 앞으로도 더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식민사학이 한사군의 중심이었던 낙랑군의 치소를 대동강 평양으로 내세우는 근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옛 유물들이다. 그 가운데 평안도 용강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제현 신사비와 평양 토성에서 발견되었다는 봉니封泥 등이 있다.


위당은 점제비 비문 분석을 통해 비문이 위조되었다고 단언한다. 봉니는 공용문서를 보내는 관리가 내용을 봉인하기 위해 진흙으로 만들어 날인한 진흙덩어리를 말한다.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등 낙랑관리의 도장이 찍혀 있는 이러한 봉니들이 평양에서 다수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이 낙랑군의 치소가 평양이라고 확신하지만 위당은 이러한 봉니들이 위조품이라는 것을 당시에 사용되던 글씨체와 비교하면서 상세히 고증하였다. 


《조선사연구》에서는 또 백제의 해외영토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제22장 ‘백제의 해상진출’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중국 기록 즉 《남서》, 《송서》, 《통전》 등 여러 곳에 나와 있기 때문에 입증은 별로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명백한 기록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3, 4세기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매우 어지러운 시대였다. 요서와 요동 지역에서는 모용씨, 우문씨 등 여러 선비족 집단이 독립된 정권을 세우는 등 혼란이 극심했는데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백제가 요서 해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요서, 진평 두 군인 것처럼 기록하였다. 그러나 위당에 의하면 요서 지역에 있는 진평군으로 읽어야 한다. 진평군은 중국 사서에 의하면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위당은 위만에 의해 쫓겨난 고조선의 준왕準王에 대해서도 재미난 해석을 하였다. 중국 사서인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는 준왕이 바다로 들어가 한韓 땅에 살면서 한왕韓王으로 자처하였다고 한다. 


또 《삼국지》에 뒤이어 편찬된 《후한서》에서는 준왕이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준왕은 스스로 한왕이라는 칭호를 내세웠으며 마한인들은 준왕의 대가 끊기자 스스로 진왕을 자처하였다.


위당은 준왕이 바다로 들어갔다는 기록(入海)를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왕의 측근들을 데리고 마한 땅으로 도주한 것은 준왕이 아니라 마한왕이었다고 주장한다. 마한왕은 이제는 진한의 왕이 없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총왕總王에 해당하는 한왕을 자칭하였다. 


삼한의 우두머리 노릇을 자처하던 이 마한왕이 남쪽으로 피신해온 고조선 왕기王畿 지역의 주민들에게 마한 동쪽 변방의 땅을 떼어주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지역을 자신들이 온 나라인 진한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채호 선생의 여러 저서들과 더불어 위당의 《조선사연구》는 민족사학의 뛰어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는 방대한 분량의 이 《조선사연구》를 읽으면서 위당과 그의 지적 스승인 단재가 제기한 여러 주장들을 좀 더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 주장의 진위를 확립하는 것이 후학들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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