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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바로알기]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1)

2021.03.22 | 조회 5162 | 공감 0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1)

사마천의 『사기』 편찬과 동방 역사 왜곡




동북아는 현재 역사 전쟁 중이다. 한중일 역사 대전쟁 중이다.

『도전 』 5편 118장 주석을 보면 “한국의 역사는 원점으로 돌아가 전부 새로 써야 한다. 일본·중국과 한국의 관계도 개벽 후에 역사 심판이 이루어져, 배사율의 차원에서 다시 정립될 것이다.”라고 했다. 잘못된 역사 청산의 장이 상제님께서 설치하신다는 만국재판소萬國裁判所다. 만국 역사의 잘잘못을 심판해서 다시는 다툼이 없게 하고, 근원적인 치유를 통해 새롭게 거듭날 것이다.


그렇다면 동북아 역사는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배사율 즉 ‘스승을 배반한 죄를 다스리는 법’의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되는 것일까? 그 왜곡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들어가면서

대한민국과 중국·일본은 가깝지만 서로 먼 나라이다. 특히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여러 차례 두 나라와 큰 전쟁을 겪어 왔고, 문화적인 군림과 경제적 수탈로 인해 쉽게 하나가 될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고 있다.


세계 경제 대국이자, 군사 대국이기도 한 한·중·일! 세 나라는 어떻게 유럽이나 아세안처럼 묶여질 수 있을까? 유럽처럼 쉽게 국경을 통과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세 나라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도道로 크게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잘못된 역사가 청산될 때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는 찾아올 것이다. 그럼 중국中國은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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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 년 전 교과서의 역사 인식

지금부터 백 년 전 구한말 교과서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1910년 일제의 총칼에 국권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 우리 교과서는 중국을 무엇이라 칭했을까?


‘지나支那’라 했다. 지나는 가지 지支에 나라 나那 자로 ‘가지의 나라’라는 뜻이다. 원동방의 장자국, 천자국이 아니라 곁가지로 뻗어 나간 나라라는 뜻이다. 당시 교과서는 오늘날의 교과서보다 단군조선의 기술 내용이 소상하다. 단군왕검의 장자인 부루 태자의 도산회의 참석 내용도 빠짐없이 싣고 있다.


비록 100년 전 제국주의의 등쌀에 우리 조선이 힘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조선의 마지막 선비들은 확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주적인 사관을 갖고 후손들을 가르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을 지나라고 표기한 대한 교과서

① 《중등교과 동국사략東國史略 (상上)》 1906년 발행

태자太子 부루扶婁□ 지나支那의 하우씨夏禹氏 도산회塗山會에 견遣□야 각국各國과 옥백玉帛으로 상견相見□고

② 《초등대한역사 》 1908년 옥호서림 간행 초등용 교과서

태자太子 부루扶婁 도산塗山에 견遣□야 하夏、【지나支那】 우씨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參□고 왕자王子 삼인三人을 강화江華 전등산傳燈山에 견遣□야 삼랑성三郞城을 축築

③ 《대동청사大東靑史 1책 》 1909~1910년 중학생을 위한 한국사

일백구년一百九年에 태자太子 부루扶屢를 지나支那의 하우씨夏禹氏 도산만국회塗山萬國會에 견遣□야 외교外交에 착수着手□고


부루태자 도산회의

① 『응제시주應製詩註』 (권람權擥, 조선 세조世祖 7년, 1462년)

至禹會諸侯塗山(지우회제후도산) 檀君遣子夫婁朝焉(단군견자부루조언)

하나라 우임금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이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② 《 조선역사朝鮮歷史 1책 》 (1895년 교과서)

갑술甲戌에 【하우夏禹의 십팔년十八年이라】

자부루子扶婁 □견遣□야 하夏、【지나支那】우씨禹氏 □도산塗山에 조朝□다

③ 《 (조선)역대사략歷代史畧 권1 》 1900년 대

【하우夏禹 십팔년十八年】

견자부루조하遣子扶婁朝夏 【시우회제후어도산時禹會諸侯於塗山 단군견자부루조언檀君遣子扶婁朝焉】

④ 《초등대한역사 》 1908년 옥호서림 간행 초등용 교과서

태자太子 부루扶婁□ 도산塗山에 견遣□야 하夏、【지나支那】 우시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參□고 왕자王子、삼인三人을 강화江華、전등산傳燈山에 견遣□야 삼랑성三郞城을 축築□다


『도전』 5편 118장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대국의 호칭을 조선이 쓴다’고 하셨다. 이 공사 그대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된 지금 우리의 역사의식도 대국으로 거듭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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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마천의 역사 왜곡부터 시작된 삐뚤어진 조선관

중국인이 바라보는 역사 안목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중국은 한국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 25사의 첫머리로 칭송받고 있는 사마천에 관해 살펴보려 한다. 사마천은 누구인가? 2천 년이 넘도록 칭송받고 있는 『사기』에 우리 대한의 뿌리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司馬遷(서기전 145?~서기전 86?)은 한漢나라 전성기인 무제武帝 때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문학자이다. 한나라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이란 벼슬에 있던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생년월일은 여러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통설에 따르면 한나라 경제景帝 치세의 중원中元 5년(서기전 145년)에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 소제의 용문 서남쪽 하양夏楊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황제 측근으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마천은 학문에 정진했다. 사마담은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다. 사마천은 스무 살에 아버지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역사 유적지를 찾아 자유롭게 천하를 방랑했는데, 이러한 현장 경험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이때 당대 최고의 학자인 공안국孔安國과 동중서董仲舒를 만난 것은 사마천의 학문적 여정에서 큰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동중서를 만남으로써 단순한 사실 나열의 역사를 넘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벼슬살이를 시작한 후에도 무제를 수행하여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후 황제의 경호원 격인 낭중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나이 36세 때 사마담이 낙양에서 화병으로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대역사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3년 후 태사령에 오른 사마천은 왕도 정치의 이상을 담은 공자의 『춘추』를 계승하여 『사기』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곧 참혹한 화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릉李陵의 화禍’가 그것이다. 사마천이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 47세 되던 서기전 99년에 뜻밖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이른바 '이릉 변호 사건'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흉노 토벌에 빛나는 공을 세우던 이릉李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자 무제의 노기는 하늘을 찔렀고 조정 대신들도 앞다투어 이릉을 비난했다. 이때 사마천은 홀로 “이릉이 투항한 것은 진심이 아니며, 목숨을 보전하여 훗날 한나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호했다. 결국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당하는 치욕을 감내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당시 사마천의 심정은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와 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그러나 하루아침에 불구의 몸이 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된 사마천은 “이것은 나의 죄로다. 이것은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라며 자책했다. 사마천은 그 울분을 『사기』를 저술하는 데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전 91년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모두 130권, 52만 6천5백 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자신이 지은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 불렀지만 후한 시대에 들어와 『사기』라 불리게 되었다.


『사기』를 완성한 이후 사마천의 행적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그의 죽음 또한 미스터리다. 사마천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사기』가 완성된 후 2년 만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사를 비롯하여 처형, 자살, 행방불명 등 여러 설이 나왔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사마천의 약력


· 생몰 BCE 145년 ~ BCE 86년)

· 출생지 섬서성 한성시 하양

· 36세 부친의 죽음

· 39세 태사령太史令에 오름

· 47세 ‘이릉 변호사건’으로 宮刑에 처함

· 55세(BCE 91) 사기史記 완성

· 57세(BCE 89)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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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대한 국내 학자의 평가


- 김원중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떨어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가능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 『사기본기』 20쪽)




- 김영수 (현)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 (전)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

『사기』 는 130권으로 이루어진 3천 년 통사通史이자 중국 역사서 중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는 또 2천 년 동안 역대 정권들이 편찬한 이른바 '정사正史(관찬사서)' 24사(또는 25사)의 효시嚆矢로서 정사의 모범이다.


『사기』 는 단순히 자료와 책 더미에서 나온 역사책이 아니다. 사마천의 뛰어난 학식에 역사 현장에 대한 치밀한 탐방이 더해진 입체적 역사서이다. 말하자면 사마천의 현장정신이 역사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역사를 보다 생동감 넘치게 접할 수 있게 한다.

(전남 장성뉴스 ‘사마천 사기의 저자 김영수 박사와의 만남’ 2014년 4월 7일 기사 중에서)



『사기』가 기록한 동방 조선의 역사


첫째, 동방 배달의 치우천황을 황제가 베었다고 역사를 뒤집어 기록했다.

蚩尤作亂(치우작란) 不用帝命(불용제명)

치우가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키자


於是黃帝乃徵師諸侯(어시황제내징사제후) 與蚩尤戰於涿鹿之野(여치우전어탁록지야)

遂禽殺蚩尤 (수금살치우)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이제후함존헌원위천자) 代神農氏(대신농씨) 是爲黃帝(시위황제)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분이 황제이다. (『사기』)




둘째,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고 기록했다.

武王旣克殷(무왕기극은) 訪問箕子(방문기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기자를 방문하였다.


武王曰(무왕왈) 於乎!(어호) 維天陰定下民(유천음정하민) 相和其居(상화기거)

我不知其常倫所序(아부지기상륜소서)

무왕이 기자에게 “오호! 하늘은 조용히 천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게 하는데 나는 상륜의 질서를 모른다.”라고 하니


箕子對曰(기자대왈) 在昔鯀陻鴻水(재석곤인홍수) 汨陳其五行(골진기오행)

기자가 답하기를 “옛날에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帝乃震怒(제내진노) 不從鴻範九等(부종홍범구등) 常倫所斁.(상륜소두)

鯀則殛死(곤칙극사) 禹乃嗣興 (우내사흥)

천제(단군왕검)께서 진노하셔서 홍범구등의 상륜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곤이 죽고 우가 뒤를 이었습니다.


天乃錫禹鴻範九等(천내석우홍범구등) 常倫所序.(상륜소서) 初一曰五行(초일왈오행)

二曰五事(이왈오사) 三曰八政(삼왈팔정)

하늘(단군왕검)이 우에게 홍범 아홉 가지를 주니, 일상의 법도가 그 순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첫째는 오행, 둘째는 오사, 셋째는 팔정,


四曰五紀(사왈오기) 五曰皇極(오왈황극) 六曰三德(육왈삼덕) 七曰稽疑(칠왈계의) 八曰庶徵(팔왈서징)

넷째는 오기, 다섯째는 황극, 여섯째는 삼덕, 일곱째는 계의, 여덟째는 서징,


九曰嚮用五福(구왈향요오복) 畏用六極(외용육극)

아홉째는 향용오복과 외용육극이라 합니다.(중략)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 而不臣也(이불신야)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사기』 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8)


셋째, 위만을 첫 조선 왕이라 기록했다.

사마천은 동방 조선의 첫 왕을 위만이라 기록했다. 그리고 위만은 분명히 연나라 사람이라 했다. 기자가 동방에 봉해졌고 구체적인 기록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최초의 조선 왕은 위만이라는 것이다.


朝鮮王滿者(조선왕만자) 故燕人也(고연인야)

조선 왕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


계속해서 「조선열전」 기록을 보면, 사마천은 한나라의 전신인 진秦나라와 그 이전의 연燕나라 때의 기록을 남겼다. 그 결론은 중국의 연나라 전성기와 진나라 때 동방 조선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진번조선屬眞番朝鮮 위치리爲置吏”라고 하였다. ‘속屬’은 ‘엮다. 모으다’라는 뜻으로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치리置吏’는 중국에서 관리를 두고 조선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나라가 일어나자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했고, 그 조선도 노관의 연나라(한나라의 제후국)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연나라 시절부터 진나라, 한나라 때까지 동방 조선이 이미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사기』 속에 못박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이 조선 땅으로 망명한 과정을 소상히 전했다. 위만이 패수를 건너 상하장上下鄣에 거처하다가 망명자를 모아 왕검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燕王盧綰反(연왕노관반) 入匈奴(입흉노) 滿亡命(만망명) 聚黨千餘人(취당천여인)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았다.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퇴결만이복이동주출새) 渡浿水(도패수) 居秦故空地上下鄣(거진고공지상하장)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 동으로 달아나 변경을 넘고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지역 상하장에 거처하다가


稍役屬眞番朝鮮蠻夷(초역속진번조선만이) 及故燕齊(급고연제) 亡命者王之(망명자왕지) 都王險(도왕험)

조금씩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부렸으며 왕검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렇듯 사마천은 동방 조선의 원뿌리 역사를 전부 왜곡했다. 지나支那 입장에서는 현장 답사와 훌륭한 필체로 기록을 남긴 최고의 사관으로 칭송받을 수 있지만, 이웃 나라인 우리 동방 배달의 백성에게 사마천은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일 뿐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동방 조선의 역사를 거세시킨 원흉인 것이다.


사마천은 세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 지나 역사 뿌리를 높이기 위해, 황제헌원을 높이기 위해 ‘황제작난’을 ‘치우작난’으로 왜곡·날조한 것이요.

둘째, 기자가 동방으로 도망갔을 뿐인데, 조선의 제후로 봉해졌다고 왜곡한 것이요.

셋째, 연나라 도적 위만을 조선의 첫 왕이라 기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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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치우작란蚩尤作亂인가? 황제작란黃帝作亂인가?

『사기』 주석인 집해를 보면 ‘치우는 옛 천자다’라는 글이 나온다. 치우는 단순 제후가 아닌 옛 천자였다는 것이다.

集解應劭曰(집해응소왈) 蚩尤古天子(치우고천자)


그리고 『환단고기』 「삼성기」를 보면 헌원이 난을 일으켰고, 치우천황께서 제압을 해서 신하로 삼았음을 전하고 있다.


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우수전이유자오지환웅)하시니 神勇冠絶(신용관절)하사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 환웅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중략)


蚩尤天王(치우천왕)이 見炎農之衰(견염농지쇠)하시고 遂抱雄圖(수포웅도)하사

屢起天兵於西(누기천병어서)하시고

치우천황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지켜보시고 드디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여러 번 서쪽에서 천자天子의 군사[天兵]를 일으키셨다.


又自索度(우자삭도)로 進兵(진병)하사 據有淮岱之間(거유회대지간)하시고

삭도索度에서 군사를 진격시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을 점령하시고


及軒侯之立也(급헌후지입야)에 直赴涿鹿之野(직부탁록지야)하사

擒軒轅而臣之(금헌원이신지)하시고

헌후軒侯(헌원)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탁록涿鹿의 들로 진격하여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삼성기』 하를 보면 14세 자오지 환웅은 치우천황의 본래 호칭이다. 거기에 치우천황이 151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고 나와 있다. 노자·장자가 선언한 선도仙道문명의 원조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그것을 사상적으로 체계를 세운 분은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仙師인데, 황제헌원도 자부선사에게 와서 신선이 되는 도를 배웠다.


『포박자抱朴子』를 보면, 황제헌원은 배달국의 자부선사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전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昔黃帝到青丘(석황제도청구) 過風山(과풍산) 見紫府先生(현자부선생) 受三皇內文(수삼황내문) 以劾召萬神(이핵소만신)

옛날에 황제헌원이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전해 받고서 만신을 부리게 되었다. (『포박자抱朴子』 내편內篇 지진地眞)


그런데 사마천은 한족 중심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헌원을 높이면서 가르침을 전한 동방 배달국의 자부선생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사마천은 오히려 동방 배달 역사를 왜곡하고 뒤집어 기록하였다.


후대 중국의 왕조들은 치우천황을 전쟁신戰爭神으로 높이 받들었다.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치우천황에게 천제를 올렸다. 대표적인 예가 한나라의 시조 유방劉邦이다. 유방은 풍패豐沛에 치우천황 사당을 짓고 아주 비장한 각오로 천제를 올리고 승리를 축원했다.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에 허무하게 패배했다면 어찌 전쟁신으로 받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무왕은 기자를 봉했을까? 기자는 무왕의 신하?

기자조선의 문제는 사마천의 글을 곱씹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사마천은 자신도 모르게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이불신야而不臣也”라고 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제후로 봉했으면 당연히 주나라의 신하가 되어야 할 텐데, ‘이불신야’라 하여 신하로 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사마천의 기록에서 두 가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첫째, 무왕이 은나라를 붕괴시키자 기자가 동방 조선의 강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고, 둘째, 기자가 가서 조선을 연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을 드러낸 사마천의 기록은 오히려 동방 조선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과, 주나라의 영향권에 있지 않던 기자가 동방 조선의 변방으로 망명했음을 알게 해 준다.


사마천은 기자조선이 허구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했다. 우리는 기자조선의 진실을 동방 조선의 기록인 『환단고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만은 조선의 계승자인가? 도적인가?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조선을 열었다는 것을 『삼국유사』와 『환단고기』는 공히 인정한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시대 동방 조선의 역사서들도 단군왕검을 전했다. 그리고 구한말의 교과서에도 부루 태자가 지나의 우임금을 만나 치수 사업을 도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중국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동방 조선 역사의 첫 줄에 위만을 세웠다.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에 따라 일본도 위만조선을 중심에 놓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했다.


동방 역사의 맥을 잡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 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내일강도乃一强盜].”라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연나라 출신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일 뿐이다. 잠시 번조선 강역을 차지한 위만을 현 교과서에서는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못 박아 놓은 사관 그대로 인정하여 칭송한다. 당당히 단군조선의 계승자라 칭한다. 그리하여 2,096년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아직도 암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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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방 조선의 정신으로 역사를 올바로 보자

이런 사마천의 붓장난에 동방 문화의 종주국이자 천자국인 조선의 역사는 심하게 왜곡·날조되었다. 환웅천황의 배달倍達과 단군의 조선朝鮮은 지나支那 고대사를 이루는 하상주夏商周에 문명을 전수한 선생국임에도, 역사를 뒤집어 기록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살던 때도 배달과 단군조선 초기의 역사 도서를 제대로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천 년 전의 기록을 쉽게 알지 못한 사마천은 너무나 거침없이 동방 종주국의 역사를 왜곡했다. 결과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는 동방 조선의 역사맥을 틀어 놓은 첫째 책이 되고 말았다. 사마천 이후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도 사마천의 기록을 따라 기술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중국인의 기록을 100% 믿고 그대로 옮겨 놓은 지나인의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 아울러 전 지구촌의 교과서도 동방 조선은 독자적인 천자관이나 우주관이 없는 나라로, 중국의 아류이자 중화문명의 속국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동방 조선의 치우천황과 마흔일곱 분 단군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와 『환단고기』 기록을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대한인의 눈으로 명확히 확인해야 한다.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 줘야 한다. 그 중심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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