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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 쿠사누스 (4)

2022.06.27 | 조회 3894 | 공감 0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4


쿠사누스 (4)


4. 시대가 빚은 모순에 찬 삶


1438년 쿠사누스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 온 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그에겐 퇴보를 의미한다. 비록 교섭의 능력이 비상하게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는 정신적인 면에서 보자면, 외교의 수준, 곧 가능성의 기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보수적이었던 그는 오직 자신의 설득력만으로 교회를 구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그에겐 토마스 모어(『유토피아』)와 같은 이들이 보여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전망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르게 표현하면, 정치를 재개한 쿠사누스에게는 더 이상 정치적 위상이 커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전의 바젤에서의 위치를 능가하지 못한 것이다. 거의 10년 가까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각지의 제후들에게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일을 한다. 당시도 계속되던 바젤의 공회의에서는 참석자들이 여전히 갈라서 있고 교회 분리의 기운은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제후들은 분열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당분간 지켜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쿠사누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유진 4세가 사망한다. 하지만 신임 니콜라우스 5세는 쿠에스 출신의 인물에게 오히려 더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488년 마침내 그간 쿠사누스가 공들여온, 바티칸과 제후들의 연대가 성사되자 니콜라우스 5세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를 추기경에 임명한다. 쿠사누스는 추기경이 쓰는 붉은 모자와 함께 새로운 성직록 그리고 명의名義 주교로서 로마 빈콜리의 성 베드로 성당을 선물로 받는다. 이로써 그의 경력은 외관상 정점에 올랐다.


1450년 그는 다시 한 번 독일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외교관이 아닌 정치가로서 독일을 방문한다. 수도원을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는 수도사들의 침실에서 창녀들을 내쫓는 일을 의미한다. 수도원 안에서 난잡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남자들이 수녀원을 출입하는가 하면, 갈수록 미신에 빠져드는 신자들을 돌보는 성직자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이때 쿠사누스는 자신의 가장 가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음란한 모습과 난잡한 술자리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격분을 누르지 못한 채 단호한 조치를 내리고는 한다. 특히 베네딕트파派 교단과 아우구스티누스파 교단 소속의 수도사들에게 더욱 그랬다. 수도사들 또한 그들대로 그에게 적대감을 갖고 대항하는 바람에 쿠사누스는 자기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까지 몰린다. 한번은 한 수도사가 독이 묻은 십자가를 입 맞추도록 자기에게 내민 적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수도사들은 추기경이야 말로 살인자라고 반박한다. 주교가 되고 싶어 하는 한 수도사를 그의 손으로 직접 라인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이다.


쿠사누스는 또한 신자들의 호감을 사지도 못한다. 신자들은 그가 가진 재산 중 일부는 가난한 자들의 희생으로 모은 것이라고 악의적인 판단을 내린다. 게다가 그의 쇼를 지켜 본 많은 신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쿠사누스는 마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귀를 타고 성문城門을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모든 개혁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신학자들은 곧잘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만약 쿠사누스의 개혁들이 보다 더 성공적이었더라면 “루터란 존재는 없었지 않았을까?”하고. 철학자이자 쿠사누스 전기를 쓴 칼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교회는 분리됐을 것이다.” 쿠사누스는 개혁엔 내적인 전환이 따른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개혁들은 금기들-예를 들면 음란함 같은-의 확산 속에서 제 자리를 맴돌 뿐이다. 니콜라우스는 수도사들로 하여금 향락적 생활을 단념하도록 만드는 영혼의 정화 작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개혁의 실패가 그에게서 안정감을 앗아갔다. 그는 다만 밤이 돼서야 철학 작업에 몰두할 여유를 갖는다. 그의 대부분 저술들이 낮 동안 깨끗이 청소해놓은 수도원에서 양초 불빛 아래 쓴 것들이다. 이 저술들의 제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지혜의 사냥에 관하여』, 『관조의 절정에 대해』 혹은 『믿음의 평화에 관해』.


그는 무한성에는 ‘대립되는 것들의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이 점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 우리가 팽이채를 가지고 팽이를 돌린다고 하자. 이때 우리 눈에 팽이는 돌고 있는 게 아니라 한 곳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시각의 착란 현상이다. 하지만 팽이가 무한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팽이는 실제로 회전하지 않고 정지 상태에 있을 것이다. 무한한 속도란 곧 절대적인 정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신에 대해서도 심오한 개념들을 생각해낸다. 예를 들면 그는 신을 ‘가능-존재’라고 파악한다. 신은 가능을, 특별히 숙련된 기술자의 경우처럼 특성이나 재능으로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능-존재’와 같다는 말이다. 가능-존재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가능들에 앞선다. 때문에 모든 사물들은, 그것이 무엇이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어서, 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은 모든 존재이며 모든 가능이다. 그 어떤 것도 가능-존재보다 앞서거나, 능력이 뛰어나거나, 크거나 작을 수 없다.


하지만 유한하고 ‘비교 가능한’ 쿠사누스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진다. 노화老化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450년 교황은 그를 브릭센의 주교로 임명한다. 이와 함께 그의 삶 중 가장 어두운 비극이 시작된다. 브릭센의 귀족들은 쿠사누스를 자신들의 목자牧者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특히 지기스문트 공작이란 귀족은 주교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한다. 쿠사누스와 벌어진 이 싸움에서 공작의 어릴 적 친구였고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베레나 수녀원장이 그의 편을 든다. 수녀원장은 새로 부임하는 주교가 수녀원을 개혁하려고 들지 않을까 하는, 그녀로선 당연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다.


노련한 심리학자이기도 한 지기스문트는 일단은 추기경을 관망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쿠사누스의 약점을 찾아냈다. 니콜라우스는 심리적 불안 증세를 가지고 있고, 누군가 자기를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기스문트는 이 약점을 이용하기로 한다. 모종의 음모를 궁리해 낸 그는 누군가가 쿠사누스를 올가미에 씌워 칼로 찔러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흘려 그의 귀에 들어가도록 한다. 금새 소문을 접하게 된 추기경은 그 내용을 그대로 곧이듣는다. 브릭센에서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교구 외곽에 있던 자신의 부쉬켄쉬타인성城으로 도피한다.


이곳에서 그는 1년 동안을 숨어 지낸다. 1458년 피콜로미니 가문 출신인 에네아 실비오Enea Silvio가 교황 비오 2세로 추대된다. 새 교황은 지기스문트 공작이 추기경을 농락한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니콜라우스에게 “눈과 어두운 골짜기에서 재능을 허비하지 말고” 로마로 돌아오라고 종용한다. 쿠사누스는 기꺼이 교황의 권유에 따른다.


로마에 돌아 온 그는 주교 자리를 둘러 싼 부질없는 싸움을 다시 벌인다. 성직록을 빼앗긴 것에 대해 울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이번엔 교황을 끌어들여 잃어버린 자기 권리를 되찾고자 한다.


비오는 그에게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브릭센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 쿠사누스가 스스로 단념하는 것만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그는 전혀 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티롤의 주교 자리가 자신의 것이란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나이 이제 57세. 그는 또 한 차례 승진한다. 교황의 수석자문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영향력은 오히려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줄었는가는 비오 2세가 터키를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이려 할 때 특히 잘 나타난다. 쿠사누스는 유럽이 심각한 분열로 시달리고 있고 대전쟁을 벌일 만한 힘을 더 이상 끌어 모으지 못할 것이란 이유를 들어 교황을 만류한다.


하지만 교황은 그의 경고를 묵살하며, 나아가 그에게 아드리아로 가서 출전하는 함대를 축복해줄 것을 지시한다. 쿠사누스는 이에 순종키로 하고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문예가文藝家 비오 2세의 뜻에 따른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길을 떠난다.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농촌풍경 (사진: 위키백과)


여행은 고통스러웠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채, 움브리아 산맥의 무더위는 계속된다. 여행을 떠난 지 2주 만인 1468년 8월 11일 쿠사누스는 열병에 걸린다. 토리란 소도시의 한 여인숙에서 그의 기력은 완전히 소진된다. 싸구려 여인숙에서 그는, 브릭센과 십자군 그리고 실망을 남겨둔 채, 중세 추기경의 죽음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고독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빈콜리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된다. 그의 시신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물인 성 베드로의 사슬이 놓여 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그의 사슬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 성당에는 쿠사누스의 성격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된 유명한 입상立像이 하나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像이다. 칼 야스퍼스에 따르면, 이 입상은 순종함에 있어서나 불순종함에 있어서 또한 분노함에 있어서나 사랑함에 있어서 격정적이었던 한 남자를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은 언약의 땅에 대한 전망과 가장 힘든 고난의 시기에 처한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는 정치적 재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다. 게다가 현명함마저 갖추고 있는 이런 탁월한 재능들이, 쿠사누스의 경우와는 달리, 의례적이고 일반적인 평가로부터 모세를 벗어나게 해준다.


50년이 지난 뒤 쿠사누스의 유해는 쿠에스로 옮겨져 자신이 세웠고 또 2차 대전 중에는 영국인들에 의해 폭격의 참화를 피할 수 있던 요양원의 예배당에 안치된다.


모든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환기의 철학자’가 명백하게 지니고 있는 위대함을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형이상학자로서의 그의 사유는 시대를 넘어서 있다. 그의 사유는 어떤 특정한 사회체제, 예를 들면 봉건제라든가 자본주의 등의 사회질서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같은 점이 또한 쿠사누스가 칸트나 헤겔처럼 특정한 철학 학파를 만들지 못했던 한 가지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그가 전혀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실제 정치적 삶은 그의 이론, 학설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의 모순에 찬 삶은 그의 시대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그의 순종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무절제한 탐욕스러움만큼이나 그의 두드러진 성격이다. 그는 곧 여전히 중세에 속해있지만 또한 이미 근대에 속해 있기도 하다. 그는 깊은 학문적 예감을 통해 새로운 한 시대가 인간에게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틴 루터나 칼 마르크스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전통과 단절하고 철저하게 미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쿠사누스는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믿음을 다지는데 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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