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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초원의 아르카임 유적지

2021.03.05 | 조회 6690 | 공감 0

시베리아 초원의 아르카임 유적지


상생문화 연구소 김현일


# 본고는 상생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올렉산드로 이슈추크 박사가 본 연구소에 보내온 논문을 바탕으로 필자가 작성한 글이다. 이슈추크 박사는 우크라이나 고고학자로서 상생문화연구소 초청으로 우크라이나 고대사와 그 역사유물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스카타이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논문들과 아르카임 유적지에 대한 논문들을 본 연구소에 보내주었다. 


1987년 시베리아의 첼리아빈스크 주의 볼샤야 카라캉가 강 댐 건설을 위한 사전 유물 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아르카임 유적지는 남부 우랄 초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행정상으로는 러시아의 첼리아빈스크 주에 속한다. 남쪽의 카자흐스탄 국경과 가까운 곳이다. 아르카임은 투르크 방언으로 능선이라는 뜻이라 한다. 



아르카임 항공사진 (1956년) 

  


수년간에 걸친 발굴 작업을 통해 이 유적지가 청동기 시대에 속한 집단거주지 즉 촌락이었음이 밝혀졌다. 연대는 BCE 2천년 경으로 한국의 단군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지이다. 아르카임 유적지는 청동기 시대 말에 주민들이 떠난 이후로 큰 자연재앙을 겪지 않고 또 그곳에서 새로운 주민들에 의해 정착 및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내려왔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될 수 있었다.


유적지의 면적은 사진에서 보듯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2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아르카임 유적지의 특징이 요새화된 촌락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내성과 외성을 갖춘 촌락이었다.


성벽은 나뭇가지를 심으로 하여 흙으로 쌓았는데 외부성벽의 직경은 160미터, 성벽의 두께는 4-5미터, 높이는 5.5미터, 해자의 깊이는 2미터이다. 문은 모두 네 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벽 안으로 열을 지어 배치된 집들의 넓이는 110-180 평방미터 정도였다. 우리 평수로는 40-60평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당히 널찍한 집이라 하겠다


촌락의 중심에는 광장이 있었고 광장을 둘러싼 집들은 27개, 내성 바깥에 위치한 주거는 모두 39개였다. 집집마다 우물과 화로가 있었다. 전문가들은 대략 1,500-2,500 명이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적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건축이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발굴작업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아르카임 모형도


당시 러시아 초원지대에는 청동기가 널리 전파되어 있었는데 아르카임 인들은 청동기를 주조하였다.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주변에서 구리를 채굴할 수 있는 고대 구리광산을 십여 곳 발견하였다.


아르카임 인들은 용광로에서 광석을 녹일 수 있는 1,300-1,400도의 높은 온도를 내기 위해 수차를 이용하였다. 즉 흐르는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풀무를 가동하여 강력한 바람을 용광로에 불어넣었던 것이다. 



아르카임에서 발견된 토기와 무기류  


주변에서 발견된 무덤들은 목곽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스키타이와 흉노 등 북방계 유목민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양식이다. 신라의 초기 고분들도 목곽묘였다. 지하에 땅을 파서 그곳에 통나무를 사방으로 쌓아 통나무방(목곽)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한 다음 흙이나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다.


아르카임인들은 동물을 희생제물로 삼아 부장하였다.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바퀴살이 있는 목재 바퀴가 무덤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아르카임인들이 마차를 이용했음을 나타낸다. 유목민들은 일찍이 수레를 사용하였는데 수레에다 천막을 얹어 이동식 가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천막을 얹은 수레는 보통 소가 끌었다) 올렉산드르 박사에 의하면 아르카임에서 발굴된 마차 유물은 지금까지 발견된 마차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랜 시기의 것이라 한다.


유골을 조사해 본 결과 주민들은 주로 코카서스 인종이었다. 일부 우랄계도 보인다. 아르카임 인들은 인도유럽어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도유럽어의 한 분파인 인도이란어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학자들은 지역 이름을 따서 ‘신타쉬타-아르카임’ 문화라는 이름으로 아르카임 인들의 문화를 부른다.


아르카임 유적과 주변 고분들에 대한 발견은 1987년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 초까지 발굴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박물관과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현재 이곳은 유라시아 초원의 역사 이해를 위한 중요한 유적지로 간주되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아르카임 유적 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아르카임과 그 주변 유적들을 통괄하여 러시아 당국은 ‘도시들의 나라’라고 부른다. 아르카임을 초기의 도시 모습을 한 집단거주지라고 보는 것이다. 아르카임 외에도 이러한 촌락들이 주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르카임에 대한 발굴은 볼샤야 카라강카 댐 조성 사업을 위한 고고학 조사로 시작되었다. 아르카임의 발굴 주역인 제나디 즈다노비치 박사가 그 작업팀장이었다. 처음에는 유적지 가운데서 낫을 주조하기 위한 석재 거푸집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며칠 뒤에는 항공사진을 통해 원형 성벽을 확인하였다.


1970년대에 소련학계에서는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의 원향原鄕과 그 이주에 대한 토론이 치열하게 이루어져 왔다. 또 인근의 신타쉬타 문화 유적지로부터 마차가 발굴되어 남부 우랄 지역이 유목문명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입증되었다.


즈다노비치는 인도유럽 문화의 발전에서 아르카임 유적지가 갖는 의미를 소련당국에 설명하였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까지 이 소식이 알려져 댐 건설은 취소되고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91년 4월 러시아 당국은 댐 건설을 취소하고 아르카임을 역사지리 박물관으로 선언하였다.


발굴작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소련 학생들과 주민들 뿐 아니라 캐나다와 미국 학생들까지 와서 발굴을 도왔다. 1995년까지 발굴이 이루어져 1만점 이상의 유물이 수거되었다.


아르카임이 이중성벽을 갖춘 요새화된 촌락이라는 것은 당시 초원지대 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일상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초원지대가 그렇게 평화스럽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경작지들이 발견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수로가 갖추어진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길이 130-140미터, 너비 45미터 정도 되는 경작지였다. 아르카임 주민들은 목축 외에도 농업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에 푸틴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즈다노비치 박사를 비롯한 발굴 주역들을 만났는데 러시아 언론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곳을 아리안계 슬라브족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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