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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명장 전명숙全明淑의 큰 공덕

2010.02.22 | 조회 4565 | 공감 4


나상민 _ 수원 매교도장

 인류역사를 보면, 지배권력의 횡포와 탐학을 못이겨 민중이 들고 일어선 역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부(富)의 독점’이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회적 불의(不義)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 조선의 역사에서 ‘세금’하면 떠오르는 한 사건이 있다. 바로 ‘갑오동학혁명’이다. 상제님은 갑오동학혁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밝혀주고 계신다.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세상 사람이 전명숙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1결(結) 80냥 하는 세금을 30냥으로 감하게 한 자가 전명숙이로다. 언론이라도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道典 4:11)
 
 
 이처럼 갑오동학혁명의 중심에는 ‘세금’ 문제가 놓여있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아 세상을 고치려 한 역사무대의 중심에 전봉준(자는 ‘명숙’, 이름은 ‘봉준’) 장군이 서 있다. 이제 그 내막을 알아보자.
 
 
 갑오동학혁명은 ‘세금전쟁’
 19세기말, 조선은 관리들의 부패와 탐학이 극에 달하여 백성은 안주할 길을 찾지 못했다. 민비척족 세력의 전횡과 관료사회의 부패는 민중의 삶을 끝없이 옥죄어 들었다. 특히 호남(湖南)은 조병갑 등 지방수령의 탐학이 극에 달해 갑오동학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의 부패상을 한번 들어보자. 각종 잡세를 부과한 조선조 지배층의 수탈은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갔다.
 
 조선 말, 농민에겐 각종 명목의 잡세가 부과되었다. 삼정(三政: 전정, 환곡, 군역)이 모두 문란했지만, 전정(田政)의 실태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전정이란 토지의 결수(結數)쪹에 따라 부과하는 세납을 말한다. 먼저 기본세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田稅)를 비롯해, 중앙관서나 궁중을 위한 특산물을 쌀로 대신하여 부과한 대동미(大同米),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들을 위한 삼수미(三手米), 강화 진무영 군비를 위한 포량미(砲糧米), 토지 부가세에 해당하는 결전(結錢) 등을 합쳐 약 20두였다. 헌데 여기에 아전의 수수료인 인정미(人情米)를 비롯하여 부족미(不足米), 읍용미(邑用米), 경주인역가미(京主人役價米), 전관미(傳關米), 낙정미(落庭米) 등이 연달아 부과된다. 더군다나 신·구관(新舊官)의 여비는 물론이고 온갖 무명잡세를 부과한 결과 20~30두에 지나지 않던 세미(稅米)는 결당 100두가 넘게 되었다.
 
 당시 조선말의 양심적 지성, 황현은 “결세(結稅) 및 호세(戶稅)가 해가 거듭될수록 그 수량이 가중되어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죽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일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잦은 흉년과 역병(疫病)으로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세금은 곧 심각한 ‘생존의 위협’이었다.
 
 특히 전라도 고부 일대는 조병갑이 농토가 아닌 곳에 세금을 매기고, 죄없는 사람에게 불효·불화(不和) 등 갖은 죄를 뒤집어 씌워 벌금을 강요했으며, 만석보(萬石洑)라는 보를 쌓아 물세를 거두었으니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지배층, 특권층의 ‘탐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로 국내 쌀이 부족한 상황에서,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했던 기득권의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외세를 비난하기에 앞서,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갑오동학혁명’에서 ‘갑오개혁’으로
 동학 농민군의 개혁안 중 민생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첫째 “부당한 조세를 중지할 것”, 둘째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셋째 “탐관오리를 제거할 것”, 넷째 “쌀 무역상을 모두 금지할 것” 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봉준 판결문』의 폐정개혁안을 보면 “국결(國結)을 가(加)하지 말 것(國結不爲加事)”이라는 항목이 들어있는데, 이는 세미(稅米: 세금으로 내는 쌀)의 증가로 인한 폐해를 지적한 것이었다.
 
 갑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사건은, 분명 민씨정권의 퇴진과 조선왕조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전주성이 함락된 이틀후인 1894년 4월 29일, 민씨정권은 청병(淸兵)을 차용해서라도 동학군을 진압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는 청일전쟁의 빌미로 작용하였다. 일본은 기왕 출병한 이상,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주장하며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려 들었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조선 정국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이 갑오정권은 자신들의 개혁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개혁안을 공포하였다.
 
 먼저 양반과 상놈[班常]이라는 낡은 신분 제도를 폐지하여, 귀천에 구별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선언했다. 노비제 폐지, 인신매매의 금지 등 조선조 신분질서의 모순이 ‘갑오정권’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와 더불어 특히 주목되는 점은, 여러 가지 명목의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조세 금납화(金納化)’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조세 금납화는 7월 초순부터 준비가 이루어져 10월에 시행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은, 분명 제1차 농민봉기의 개혁안을 대체로 수용한 것이었다.
 
 
 1결 80냥 하는 세금이 30냥으로 감면된 역사적 배경
 한편 조세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로 인한 민중의 동요는 갑오정권을 크게 긴장시켰다. 『일성록』 8월 4일자에 따르면, “급히 결가(結價)를 책정 시행하여 백성들의 의혹을 풀도록 할 것”이라는 의안이 제출된 것으로 보아, 사안의 급박함에 비해 이때까지도 구체적인 조세 금납화 방안이 마련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갑오개화파정권’은 대원군파는 물론이고 민씨척족파, 그리고 국왕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군의 2차봉기는 정권에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1894년 9월초, 농민군이 재봉기 함에 따라 갑오정권은 결가의 내역과 책정방안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중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한 고육책이자, 개명관료의 개혁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갑오정권은 한편으론 일본의 힘을 빌어 농민군을 진압하면서 ‘조세 금납화’ 안을 추진하여, 1894년 말에 이르러서야 이를 책정, 시행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세금납’은 기본적으로 토지에 부과되던 각종 명목의 세금을 통합하여, 결가로 책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1결을 20두(1두당 1냥 5전)로 하여 30냥이 책정되었다.
 
 
 세상 사람이 ‘전명숙의 힘’을 많이 입었느니라
 황현은 『매천야록』 고종 31(갑오)년 12월 13일자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결세(結稅) 및 호세(戶稅)를 개정하여 돈으로 대신해 ‘꿰미 돈’으로 징수하였다. 매년 1결당 징수한 꿰미 돈은 30냥, 1호당 징수한 꿰미 돈은 3냥으로, 그 외에 징수하던 금액은 일체 엄금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오히려 구습에 젖어 신법을 준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새로 개정된 신법이 반포되자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희색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현종(연세대 원주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매천야록』과 『통상휘찬』의 기록 등을 인용하며 “당시 결세(結稅)는 현물과세로 인해 파생되는 부가세나 잡비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50두 내지 60·70두, 심지어 100두에 달하였습니다. 이를 화폐로 환산하면 70, 80냥에 이릅니다. 갑오개혁에서 ‘결가 30냥의 법정화’는 농민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킨 획기적 조치였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갑오동학혁명이 갑오개혁으로 이어져, 조선민중이 과중한 세금의 고통을 덜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금 감면의 주역, 전명숙 장군을 기리며
 상제님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살리고, 그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주고자 했던 ‘전명숙 장군’을 크게 치하하셨다. 그리하여 “언론이라도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세상을 공평하게 하려던 전명숙 장군의 의거는, 조선의 역사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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