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경축하며

신상구 | 2020.03.03 20:27 | 조회 427 | 추천 7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2020년 10월 25일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 홍법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순국하신지 77주기가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1. 수렵과 광부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의 남양홍씨 가문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평양성을 빠져 나온 선생은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또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 파계한 뒤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용하고, 단발령을 강제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갔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와 축멸왜이(逐滅倭夷)를 위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홍범도 선생 또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그 후 홍범도 선생은 1897년까지 단독으로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면서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1907년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삼수(三水)·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과 대적하여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 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를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그는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1911년 계연수 선생이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 할 때에 오동진(1865~1930) 장군과 함께 출판비를 부담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그는 이 회의 회장으로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그는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 장군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그는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그는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홍범도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홍범도,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가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2.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9월에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썼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은 뒤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스탈린이 밀려드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 지휘부는 집단 강제이주에 반발하는 고려인 지도급 인사나 군 장교 약 2800명을 숙청했다. 69살의 노인 홍범도 장군은 다행히 학살은 면했지만 이미 울안에 갖힌 늙은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된 이후 야간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주간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외로운 삶을 살다가 조국의 광복을 바로 눈 앞에 둔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홍범도 장군의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였으며, 차남은 전투 중에 병사했다. 그래서 혈육 한점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조국 해방에 바쳤다.
                                                                      3.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여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의 시신은 아직도 고국으로 봉환되지 못해 지금도 카지흐스탄의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어 홍범도 장군을 존경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4.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의 역사적 의의
   사단법인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종찬 이사장은 홍범도 장군 70주기를 추모하며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이 우리 한민족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을 한겨레신문 2013년 10월 22일자 33면에 다음과 같이 잘 요약 소개하여 한민족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첫째, 홍범도 장군은 양반계급도 아니고 비천한 광부였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절을 찾아간 식객승이었고, 포수로서 생활을 이어간 하층계급이었다. 그는 조선왕조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조국이 외세에 의하여 침탈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로부터 강제로 해산되자 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궐기하여 즉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의병투쟁은 후에 만주나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하였다. 독립군은 국경 지대에서 전투태세를 준비하였으며 언젠가는 국내에 진공하여 다시 나라를 찾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홍범도 장군은 이때 독립군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항상 자기를 낮추었다. 의병투쟁은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자연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고, 어떤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위임된 사령부도 없었다. 의병이나 독립군은 서로 자신들 위주로 사람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다. 이로 인해 상호 간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고, 이기적인 종파의식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비범한 인격과 지휘력을 갖추었다. 그는 항일투쟁 전선을 앞에 두고 서로 작은 이해로 싸워 전투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스스로 연합한 부대의 사령관 자리를 피하고, 오히려 그 휘하의 연대장으로서 임무를 맡아 부대를 지휘하였다.
   셋째,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갖추었다. 192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전투에서 열세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정규 사단의 병력과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부대 지휘 능력과 기발한 전술작전 운영으로 열세를 극복했다. 적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완전히 퇴로가 차단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적을 섬멸하는 그의 탁월한 전술 지휘는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봉오동 전승이 있었기에 후에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재차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한편 전 독립기념관장으로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을 저술한 김삼웅 선생은 한겨레신문 2013년 11월 5일자 33면에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잘 평가하고 정리하여 한민족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국가(왕조)의 온갖 혜택을 입었던 왕족․대신․고위 관료들이 친일파가 되어 민족을 배신할 때, 홍범도 장군은 산포수가 되고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빨치산 대장이 되어 일제와 싸웠다. 그리하여 그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계급투쟁이 아닌 민족해방투쟁에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였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항일 무장투사들의 존재로 인해 항일독립운동이 문약에 빠지지 않았고, 한민족의 당당한 패기를 지키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수십차례 항일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 부를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청산리대첩의 승리에는 그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이 연구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장군이 자신이 속한 부대를 띄워 올리고 홍 장군을 폄하하면서 공적이 엉뚱한 사람한테 넘어갔다.
   한편 홍범도 장군은 사학자가 아니면서도 계연수 선생이 1911년『환단고기』를 발간할 때에 오동진 장군과 함께 출판비를 지원하여 오늘날 재야 민족사학자들이 국사광복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3.1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이하여 문재인정부가 지금도 카지흐스탄의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한다고 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았다.
                                                                                      <참고문헌>
    1. 김삼웅,『홍범도 평전』, 레드우드, 2019.6.30.
    2. “독립운동가 홍범도 대한독립군 사령관”, 네이버캐스트, 2020.3.3.
    3. 박정업, “文대통령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온다", 조선일보, 2020.3.2일자.
                                                                                     <필자 약력>
   .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조치원중, 조치원여고, 삽교중, 한내여중, 천안북중, 천안여중,  태안중, 천안중 등 충남의 중등학교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 주요 논문: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97편
   . 주요 발굴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 수상 실적: 예산군수 감사장, 대천시장상(2회), 천안시장상(2회),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2회) 교육부장관상(푸른기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문학 21』시부문 신인작품상,『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칼럼/기고 활동: 동아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경향신문·한국일보·서울신문·서울일보·신아일보·문화일보·전국매일신문·시민신문·천지일보 등 중앙 일간지, 대전일보·충청일보·충청투데이·중도일보·동양일보·금강일보·중부매일·충남일보·중앙매일·충청타임즈·충청매일·대전투데이·충청신문·충북일보·우리일보·시대일보·중부일보·강원도민일보·국제신문·영남일보·경북일보·전북도민일보·무등일보·한라일보·제민일보·대한일보· 등 지방 일간지, 충남시사신문·천안일보·충남신문·천안투데이·아산투데이·아산시사신문·예산신문·홍성신문·태안신문·태안미래신문·보령신문· 내포시대·진천신문·증평신문·옥천신문 등 주간신문, 아산톱뉴스·천안일보·디티뉴스·대전뉴스·충청뉴스·충청뉴스인·시티저널·충북인뉴스·굿모닝충청·예산뉴스 무한정보·괴산타임즈·코리안스프릿 등 인터넷신문 등에 수백편의 칼럼 기고.
   . 방송활동: 30년 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환경운동 전개, KBS 중앙방송국 라디오 <논술 광풍>프로 출연, STB 상생방송 <홍범도 장군> 프로 출연, KBS 대전방송국·MBC 대전방송국·CJB 청주방송국 라디오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발굴> 프로 출연.
   . 대전 <시도(詩圖)> 동인,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충남민주시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사회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국민윤리교육회 회원, 천안향토사 연구위원,『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통합논술 전문가, 평화대사, (사)대한사랑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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