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병과 밀무역

신상구 | 2020.03.10 16:40 | 조회 4496


                                                                        조선시대 역병과 밀무역

   병자호란 때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도망갈 때 통과했던 문은 광희문(光熙門)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 사이, 서울 신당동에 있다. 신당동에 있는 시장 이름은 시구문시장이다. 시구문(屍口門)은 한양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이 운구되던 문이다. 도성 서쪽에 있던 소의문과 함께 광희문은 시구문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는 역병이 한번 번지면 기본적으로 사망자가 1000명 단위였다. 중종 19~20년(1524~1525) 2년 사이에 2만2602명이 죽었고 선조 9년(1576)에는 평안도에서만 1만4000명이 죽었다. 인조 21년(1643) 12월에는 전라도에서 1만명이 넘게 죽었다.(변정환, '조선시대의 역병에 관련된 질병관과 구료시책에 관한 연구', 동서의학, 1985)
   서울 광희문. 도성 안 시신을 운구해 나가던 문이라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숙종 24년(1698)에는 서울에서만 1582명이 죽었고 팔도에서는 2만1546명이 죽었다.(1698년 12월 28일 '숙종실록') 실록은 이해에 '참혹함이 실로 전고에 없던 바(實前古所未有也·실전고소미유야)'라고 기록했으나 이듬해 기록은 깨졌다. 이듬해 여역(癘疫)이 치열하여 서울에 강시(僵屍: 객사한 시신)가 3900구이고, 각 도 사망자는 도합 25만700명이었다.(1699년 12월 30일 '숙종실록') 시각이 늦어 통행금지가 걸리면 시구문 안쪽에는 운구되지 못한 시신이 첩첩이 쌓였다.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에서도 사람들을 교회로 집합시켜 기도로 병마를 퇴치하려다가 떼죽음하기도 했으니, 지구촌 위생학은 딱 그 수준이었다.
   한 나라 인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질병에 대해 각국 정부의 관심은 지대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 선조의 명에 의해 의서 편찬 사업이 시작됐다. 어의 허준이 총지휘한 편찬 프로젝트는 1613년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꽃을 피웠다.
   중국은 동의보감이 중국 의서를 근거로 그 내용을 훌륭하게 정리했다고 칭찬했고, 조선 의사들은 이 책이 의학의 핵심을 다 잡아낸 것처럼 맹종했다.(신동원, '동의보감과 동아시아 의학사, 들녘, 2015, p369)
   일본은 조금 달랐다. 50년 뒤 일본은 이 동의보감을 공식 수입해 참고서로 삼았다. 책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일본 것으로 토착화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 토착화 사업 성공에는 일본 정부에 약점을 단단히 잡힌 조선 외교관 집단의 간첩 행위가 핵심 변수였으니 서기 1721년 조선 경종, 일본 도쿠가와 요시무네 쇼군 시대였다.
   1718년 일본 대마도주는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서고에 비장하던 '동의보감' 전질을 헌상했다. 책을 받고서 이틀 뒤 요시무네는 참모에게 "한글로 적힌 이 약재의 일본 이름을 알려달라"고 명했다.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자, 요시무네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는 있고 일본에는 없는 것들, 일본에는 있고 조선에는 없는 것들을 전부 조사해서 문서로 만들어 바치라.'('분류기사대강'8 1718년 4월 3일)
   조선의 약재, 특히 고가의 수입 약재인 인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요시무네였다. 당시만 해도 의학 선진국이었던 조선의 의학을 대중화하고 인삼 수입에 따른 무역 역조를 줄이려는 의도였지만, 대마도가 어떤 방법을 써도 젊은 쇼군은 만족하지 않았다.
   3년 뒤 대마도에 조선 문위행(問慰行) 일행이 도착했다. 조선 국왕 왕명으로 일본 수도 격인 에도(江戶)의 막부 쇼군을 방문하는 조선 외교관을 통신사라 하고 종3품 예조참의 명으로 대마도주를 찾는 외교관 일행을 문위행이라고 한다. 문위행은 역관으로 구성돼 있었다. 1721년 3월 일행 88명을 이끌고 대마도로 간 문위행 정사는 최상집이었다. 전례에 따라 이들은 몸수색을 마치고 배에 올라 출발했고, 넉 달 뒤인 윤6월 무사히 돌아왔다.('변례집요' 권18 도해)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귀국하기 직전, 누군가의 밀고로 임진왜란 이후 최대 규모의 밀수사건이 적발되고 말았다. 상인과 선원 몇 명, 문위행 일행 8명으로 시작했던 밀수꾼 인원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더니 문위행 부사 이장은 물론 정사 최상집까지 공모한 문위행 전원의 집단 밀수사건으로 확대됐다.(다시로 가즈이, '왜관', 논형, 2005, p271) 조선 기록인 '번례집요'에는 문위행 인원이 88명인데, 일본 기록에는 65명으로 나와 있다.
   배를 뒤지니 배 밑바닥과 쌓아놓은 선물상자 여기저기에서 밀수품이 쏟아져 나왔다. 소지품을 압수 수색한 결과 밀수 총물량은 은 2251냥, 금 21냥, 일본 금화 21냥에 팔고 남은 인삼 80근이었다. 그 전해 에도에서 판매된 인삼 총량이 550근이었는데, 이들이 밀수했던 인삼은 최소 200근으로 추정됐다.(다시로 가즈이, 앞 책)
   이들은 외교관인 동시에 한양 부호들이 맡긴 인삼을 대마도에 내다파는 사무역으로 이문을 취하는 장사치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이 금, 은을 압수당하고 귀국하자 왜관 업무에 종사하는 조선 고위 관리 6명이 왜관을 찾아와 은을 돌려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외교사절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고위층까지 조직적으로 준비한 밀수단이었다.
   막부로부터 약재 조사 압박을 받던 대마도는 이들을 무죄방면하며 기가 막힌 계책을 내놓았다. 대마도 측이 제시한 '신법' 5개조는 밀무역 재발 엄금은 물론 향후 선박과 신체 수색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이런 규정이 삽입됐다. '전력을 다해 왜관이 실시하는 약재 조사와 인삼 생초 확보에 협력할 것.'
   그 다섯 개 조항을 달달 외우며 문위행 일행이 '무사히' 동래로 귀국한 것이다. 귀국선에는 조선 외교문서 담당관인 고시 쓰네에몽이 동행했다. 이번에는 기록관이 아니라 '약재 질정관(質正官: 약재를 검수하는 관리)'이었다.
   쓰네에몽은 최상집과 이장, 그리고 왜관 조선 관리인 전·현직 훈도의 협조 속에 차근차근 약재 수집 작업을 진행했다. 비용은 전부 대마도가 부담하되 '박물다식(博物多識)'한 전문가까지 지원받아 이뤄졌다. 두 달 만인 9월 쓰네에몽은 스무 가지 식물의 열매와 뿌리, 잎사귀와 그림과 이름을 수집해 대마도로 보냈다. 그리고 10월 25일 마침내 대마도주는 쇼군에게 조선 인삼 생뿌리 3개를 헌상했다. 그리고 1727년 12월 9일 대마도는 대마도에서 재배한 인삼 한 뿌리를 막부에 헌상했다.(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p246)
   밀수에 간여한 역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일본에서 파견된 질정관은 독자적으로 조선 동식물 조사에 착수했다. '동래 약방의 허 비장이 푸조나무 가지와 잎, 열매를 보내주었다.'('약재질정기사' 1721년 7월 27일 쓰네에몽의 장부) 일본인 질정관은 이 조선인들에게 은으로 경비를 지불했다.
   1721년부터 5년 동안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으로 대마도가 제작한 '약재질정기사' 도록. 조선의 동식물을 총천연색으로 그리고 이들의 이름과 크기도 세밀하게 기록했다. 큰 사진은 '큰 사슴', 작은 사진은 위부터 '제니(薺)'와 '원앙 암컷(鴛鴦雌)'. 1721년 대마도를 방문한 조선 역관 65명 전원이 밀수 사건으로 적발되자 당시 일본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이 사건을 조선 정부에 알리지 않는 대가로 조선 약재 조사를 요구했다. 약점을 잡힌 역관들은 부산 초량왜관 관리들과 함께 요구대로 전문가들과 함께 약재를 조사해 일본으로 넘겨줬다. 왜관 관리들은 그림, 표본은 물론 박제까지 해서 약재를 가져갔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직 훈도 이석린은 '박물다식한' 박 첨지를 대동해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왜관으로 들어갔다. 박 첨지는 '글재주가 있어서 상의도 할 수 있는 데다 초목조수 아는 것이 14, 15종이나 되었다.'(앞 책 1721년 10월 6일 왜관 관수가 보낸 편지) 역관의 알선과 사례로 약재 수집에 동원된 조선인은 박 첨지, 이 참봉, 박 서방 및 서울 사람 김 첨지, 승려 현오, 치백 등이었다.
   이들이 수집한 조선 약재는 지역으로는 함경도에서 거제도까지, 종류로는 흰꽃뱀에서 고슴도치와 각종 식물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질정관 쓰네에몽은 함께 간 화가와 함께 이들을 도록으로 만들어 동식물 44종류의 한글 이름과 일본 명칭, 효능을 기재해 일본으로 보냈다. 조사 과정은 '약재질정기사'라는 보고서로 만들었다.
   1747년 일본에서 '조선인삼 경작기'가 출간됐다. 마침내 종자 확보는 물론 재배까지 일본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1767년 일본에 최초의 전문 삼업(蔘業)이 탄생하고 청나라로 수출까지 하게 됐다.(장일무, '한국인삼산업사'1, 한국인삼공사, 2018, p270)
   이듬해 10차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 의사 조숭수에게 오사카에서 온 의사 다나카 쓰네요시가 물었다. "우리나라에 광견병이 유행해 개들이 미쳐 날뛰고 사람을 보면 번번이 물었다. 귀국에 좋은 처방이 있으면 가르침을 베풀어 달라." 두 나라 의사끼리 필담으로 진행된 대화에서 조숭수는 함께 있던 조선 의사들과 토론 끝에 답을 내놨다.
   "돼지 똥물을 마시면 된다(用猪糞水呷之耳)."('화한창화부록(和韓唱和附錄)', 김형태, '통신사 의원필담에 구현된 조일 의원의 성향 연구', 2012, 재인용) 두 의사가 만나기 26년 전, 사익에 눈먼 외교관 무리의 행위와 겹치는 코미디 아닌가.
   조선에서는 동의보감 이후 이 책을 모범으로 삼아 의약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허준과 같은 대담한 시도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신동원, 앞 책, p328) 금과옥조처럼 여겼다는 뜻이다. 순조 22년인 1822년 8월 2일 함경감사 이면승이 이렇게 보고했다. '도내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가 자그마치 1만500명이나 되었다.'(1822년 8월 2일 '순조실록')
   3월 3일자 '땅의 역사-해주 청년 정재용이 선언문을   읽었다'에서 북한산 백운대에 새겨진 정재용 선생의 출생년은 '庚戌生(경술생)'이 아니라 '丙戌生(병술생)'이라고 수양산인기념사업회에서 알려왔습니다. 사업회 측은 '수양산인 정재용 전기(고춘섭, 빛과 글, 2008)' 제작 과정에서 착오로 병술의 '丙' 대신 '庚(경)'으로 인쇄됐다고 전했습니다. 위 사진 맨 왼쪽 세 글자는 각각 '丙' '戌' '生'입니다.
                                                                                  <참고문헌>        
    1. 박종인, “역관들의 바보짓에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의 첨단 의학”, 조선일보, 2020.3.10.일자.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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