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다양성과 미래

신상구 | 2020.03.11 11:24 | 조회 383 | 추천 6


                                                                              민족주의 다양성과 미래

   근대사회가 열린 이후 특히 비서구사회에서 민족만큼 뜨거운 말이 있었을까.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 혈통적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김구라는 상징적 이름과 결합해 ‘혈통적 민족’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강렬한 호소력을 지녀 왔다. 2020년대 벽두에서 이러한 민족주의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어떻게 봐야 할까.
   민족주의에 대해선 인문ㆍ사회과학에서 두 시각이 맞서 왔다. 오래된 견해는 ‘영속주의’ 시각이다. 영속주의는 민족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이들은 민족의 기원을 고대와 중세에서 찾는다.
   이러한 이론에 반론을 제시한 것이 ‘현대주의’ 시각이다. 현대주의는 민족을 근대성의 발명품으로 간주한다. 근대화가 민족주의를 만들고, 이 민족주의가 다시 민족을 주조했다고 보는 게 현대주의의 핵심 아이디어다.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어니스트 겔러와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은 현대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들이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따르면, 민족이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공동체가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이다. 현대주의 시각은 서유럽 근대사를 돌아볼 때 나름의 적실성을 가진 논리였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국민통합을 위해 민족주의를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호명했다.
   이러한 이론에 비판을 제기한 이는 사회학자 앤서니 스미스다. 스미스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같은 조상ㆍ장소ㆍ정체성을 가진 ‘종족(ethnie)’을 주목한다. 그는 민족이 이 종족과의 연속성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근대 이전에도 역사적 실재로서 존재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근대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민족주의는 근대성의 발명품으로서의 성격과 종족의 발전 형태로서의 성격을 두루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스미스 이론의 적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였다. 사회학자 신용하와 사회학자 신기욱이 강조하듯, 근대 이전에 한국ㆍ중국ㆍ일본의 경우 민족과 민족주의는 실재했다고 보는 게 더 온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선언은 민족주의의 부활을 알렸다.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시한을 2주 정도 앞두고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 반대 표결을 가결시킨 가운데 지난해 3월 13일 런던의 의사당 앞에서 브렉시트 찬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이러한 민족주의에 짝하는 것이 세계화다.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는 세계화는 국민국가ㆍ민족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는 걸까.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세 가지 견해가 맞서 왔다. 첫 번째가 세계화가 국민국가를 퇴조시켜 왔다는 견해라면, 두 번째는 국민국가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는 견해이고, 세 번째는 이러한 상반된 시각을 모두 비판하고 절충하는 견해이다.
   내가 보기에 이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은 세 번째 견해다. 한편에서 오늘날 세계화의 강화로 인해 국민국가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정치 및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민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비서구사회의 경우 현재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중대한 국가적 과제인 나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주목돼야 한다.
   서구사회에서 1970년대 이후 점차 약화되는 것으로 보였던 민족주의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민족주의의 부활에 촉매가 된 것은 포퓰리즘이었다.
   21세기 포퓰리즘의 핵심 아이디어는 ‘엘리트 대 국민’의 2분법이다. 엘리트가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라면, 국민은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다. 계급이나 시민이 아니라 국민을 정치적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포퓰리즘은 국민국가와 이에 대응해 작동하는 방어적 민족주의와 친화성이 높았다. 특히 우파 포퓰리즘은 외국인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킴으로써 그 친화성이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 10년 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부활을 선명히 알린 것은 영국의 브렉시트 선언과 미국의 트럼프정부 출범이었다. 유럽연합(EU)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한 브렉시트와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는 우파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등장은 지구정치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선도해온 두 국가에서 민족주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했다.
   돌아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은 세계화 담론이 얼마나 과장돼 왔는지를 깨닫게 했다. 1980년대 이후 30년 동안 세계화가 꾸준히 증대돼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한경쟁이라는 세계화의 기치 아래서도 국민국가 간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의 정체와 중국의 부상은 그 상징적 사건들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문화적 차원에서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관계도 간단하진 않았다. 세계화가 민족적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이 분석하듯,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됐다. 첫째, 세계화가 강제하는 문화적 동질화가 민족적 정체성을 침식해 왔다. 둘째, 세계화에 대한 저항으로 민족적 정체성이 외려 강화돼 왔다. 셋째, 새로운 ‘하이브리드 정체성’이 등장해 왔다. 하이브리드 정체성이란, 예를 들어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한국적 블록버스터’, ‘한국적 힙합 뮤직’에서 볼 수 있듯, 서구적 양식과 비서구적 현실이 결합한 것을 지칭한다.
   2020년대에 민족주의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무역전쟁은 민족주의로의 회귀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또한, 대다수 나라에서 분출하는 포퓰리즘이 민족주의에 정치적ㆍ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포퓰리즘적 민족주의’가 앞으로 세계정치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이러한 국면의 전개는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한 기성 담론을 재고하게 한다. 세계화와 민족주의는 제로섬 게임의 관계에 놓여있다기보다 국면에 따라선 포지티브섬 게임으로 변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세계화와 민족주의는 함께 증대해 가는 동시에 그 안에서 긴장 및 갈등이 증가할 수 있다. 요컨대,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불확실성의 10년이 2020년대 지구정치의 주요 풍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강대국 대 강대국, 강대국 대 약소국이 경쟁하는 지구적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 시대에 민족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정치적 기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를 승인해선 안 된다.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극복돼야 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세계시민적 정체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공존시킬 것인지는 인류에게 부여된 새로운 정치적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김구의 사상은 혈통과 문화와 역사를 중시한 민족주의였다. 광복 이후 지난 70여 년 동안 이러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이념이었다. 우리 역사를 길게 돌아봐도, 서구사회와 달리 근대 이전에 민족과 민족주의는 실재했다고 보는 게 설득력이 높다. 신용하는 우리 역사에서 민족이 먼저 형성되고, 이어 민족주의가 출현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신기욱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에서 우리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로 바라본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이중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한편에선 반식민주의ㆍ반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담당하고 산업화를 위한 개발 윤리의 토대를 이뤘지만, 다른 한편에선 인권과 시민권의 침해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작동했다.
   2020년대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해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구적 경제 헤게모니를 놓고 미중 무역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생각할 때, 그 갈등의 한가운데 우리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양날의 검’의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배타성을 거부하고 지구적 시민권과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적 차원에서 치열해지는 국가 간 경쟁을 고려할 때, 국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 역시 중대한 국가적 과제다. 주권과 인권 사이의 지혜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문헌>
   1. 김호기,  “민족주의 부활 이면엔 포퓰리즘···주권인권 공존의 지혜를”, 한국일보, 2020.3.3일자.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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