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신상구 | 2020.03.13 03:01 | 조회 426 | 추천 18


                                                                  아직 끝나지 않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

   세월호 시국선언 참여 인사 등 9,473명의 이름이 담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건의 일부. 총 60쪽에 달하는 이 명단은 2015년 오모 서기관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직접 작성한 것이다. 이 문건의 존재는 본보 보도(2016년 10월 12일자)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캡처
   박근혜 정부 시절 세월호 시국선언 참여 등을 이유로 만들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와 관련해, 이를 작성ㆍ관리하고 집행한 문화체육관광부 핵심 담당자가 사실상 아무 징계도 받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상부 지시를 따른 단순 실무자라기보다는 이 사건에 깊숙이 가담한 정황이 뚜렷해 ‘가해자’로 지목됐었는데도, 공식 징계가 아닌 ‘불문경고’ 처분만 내려진 것이다. 해당 직원에 대한 문체부의 중징계 의결 요구를 이끌어낸 진상조사 활동을 무색하게 만든 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문화예술계의 반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6일 문체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징계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ㆍ실행 등의 업무를 주도한 오모 문체부 서기관에 대해 불문경고 처분을 의결했다. 불문경고란 ‘죄는 묻지 않지만 경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법률상 징계 처분은 아니다. 국가공무원법은 파면 해임 강등 정직(이상 중징계) 감봉 견책(이상 경징계)만을 징계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불문경고를 받을 경우, 1년간 인사기록카드에 해당 내용이 등재돼 표창대상자에서 제외되는 등 불이익이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건에 있어 오 서기관의 역할을 감안할 때, 중징계는커녕 경징계마저 내려지지 않은 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2016년 8월까지 문체부 예술정책과 사무관(5급) 및 서기관(4급, 2015년 5월 승진)으로 근무했던 그는 블랙리스트 작성ㆍ관리ㆍ집행은 물론, 청와대나 국정원과의 소통도 전담했다. “블랙리스트 정책 허브(hubㆍ중심축)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실제로 2017년 7월 꾸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펴낸 백서를 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4~5월쯤 청와대 행정관이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세월호 시국 선언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야당 정치인을 지지하는 집단의 활동내역을 알려주자, 오 서기관은 인터넷 확인을 거쳐 총 60쪽 분량의 문서를 직접 작성했다.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정부 지원 배제 대상자 9,473명(중복집계 포함)을 추려낸, 민주국가의 헌법 정신을 파괴한 ‘블랙리스트’의 탄생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이러한 검열 행위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해, ‘명단 송부ㆍ하달’을 위한 문체부 창구를 오 서기관으로 일원화했다.
   특히 그는 문체부 산하기관에 ‘블랙리스트 실행’도 직접 지시했다. 2013년 연극 ‘개구리’에서 박정희ㆍ박근혜 대통령을 풍자, 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박근형 연출가에 대한 ‘지원 배제’가 대표적이다.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의 우수작품 제작 지원사업에 박 연출가의 작품이 선정되자, 오 서기관은 예술위 직원에게 “박근형을 배제할 방법을 찾으라”는 노골적 지시를 내렸다. 결국 예술위 직원들은 박 연출가를 찾아가 ‘공연 포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문체부는 지난해 2월 중앙징계위에 오 서기관의 중징계 의결을 요구했다. 앞서 진상조사위가 징계를 권고했던 44명 가운데 문체부가 유일하게 중징계 대상으로 삼은 직원도 바로 그였다. ‘비위 행위에 대한 관여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판단했던 셈이다. 그런데도 5개월 뒤 중앙징계위는 정식 징계 없이 ‘불문경고 의결’로만 사안을 종결해 버린 것이다.
   오 서기관의 징계 수위가 크게 낮아진 건 실질적 역할과는 관계 없이, 당시 그가 하위직으로 근무 중이었다는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징계위 운영을 담당하는 인사혁신처, 그의 소속 부처인 문체부는 “개인 신상에 관한 내용”이라며 정확한 결정 배경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오 서기관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징계 결과는) 작년에 있었던 일”이라며 “아무 언급도 하고 싶지 않다”고만 말했다. 현재 오 서기관은 문체부의 한 산하기관 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문화예술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위원장은 “책임 규명은 재발 방지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책임자였던 송수근 전 문체부 1차관이 작년 8월 계원예대 총장으로 임명되고 오 서기관 같은 인물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블랙리스트 문제를 중대한 국가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질타했다. 또 다른 문화예술계 관계자도 “사무관급 또는 서기관급 실무자에 불과했다고 해도, 오 서기관은 실질적인 배제 지시를 직접 내리면서 산하 기관들을 쥐고 흔들었던 인물”이라며 “중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정리된 사람이 아예 징계를 안 받았다는 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참고문헌>
   1. 채지선, "피해자 트라우마 2차 피해 큰데...가해자 솜방망이 처벌 사과도 없이 현직 복귀", 한국일보, 2020.3.7일자.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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