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강우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 2020.02.01 03:11 | 조회 4727


                                              한의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강우규 선생의 생애와 업적

   강우규(姜宇奎, 1855.7.14-1920.11.29) 선생은 1855년 7월 14일(음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지만,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으며 의기 또한 대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청소년기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기독교 장로교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에서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인술(仁術)을 베풀면서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다.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선생의 계몽운동 활동은 을사늑약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감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 선생의 영향이 컸다.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선생은 이동휘 선생과 친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구국운동론에 감화되어 교육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훗날 연해주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선생은 한말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 교육과 기독교 전도 사업을 통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국운은 계속 기울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이동휘·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선생의 집에 2개월 동안이나 유숙하기도 하였다. 이때 계봉우는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는데, 선생은 이를 보면서 안중근 의거를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긴 것 같다. 즉 자신도 독립운동 전선에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로 산화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음 노령의 정세는 악화되어 갔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제정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일대의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평소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던 선생이 눈여겨보아 둔 곳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선생이 이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의 한인 마을로 성장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크게 세 가지 일을 추진하여 갔다. 첫째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기독교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셋째는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신흥동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국제 정세가 변화하여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레닌 정부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공언하였던 것이다. 특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 속에 국제사회에는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가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를 파악하고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일으킨 것이 바로 1919년 3·1운동이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명부』(1919). 1919년 9월(음) '노령한교노인동맹단'에서 미국에 체류 중인 서재필에게 노인동맹단의 총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한 문서에 첨부된 서명록이다. 이 명부에는 총 2,500명의 단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강우규 선생의 이름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당시 서명자들이 노령(러시아령) 지역에 국한됐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번져 갔다. 이 소식은 해외로도 퍼져나가 만주·노령·미주·일본 등 한인 동포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선생이 건설한 북만주의 신흥동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광동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만세 시위운동만으로 조국독립이 이뤄지리라고 믿지 않았기에 무엇인가 다른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이동휘가 활동하고 있던 블라디스토크로 건너갔다. 선생은 여기에서 3월 26일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와 김치보·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결성된 단체로, 주요 활동 방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과 같은 방식의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있던 선생은 이 같은 독립운동 방법에 만족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정세는 점차 비관적으로 바뀌어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강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더구나 3·1운동은 그해 5월을 넘기며 소강상태에 빠져들어, 그토록 바라던 독립이 이루질 것 같지 않은 위기감이 선생을 사로잡았다. 이 같은 상황 변화를 이용하여 일제는 조선총독을 교체하고,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는 술수를 꾀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무단정치의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같은 일제의 정책 변화는 3·1운동 무마책에 불과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술책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생은 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민족의 독립, 동양 평화,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정의 인도를 위해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새로운 조선총독의 처단을 결심한 것이다.
   선생은 거사 계획을 추진하였다. 폭탄은 긴요한 때를 대비하여 이미 구입해 두었던 것이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경의 눈을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선생은 묘안을 생각해 냈다.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선생은 6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편으로 원산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잠입 하는데 성공하였다. 원산에서 선생은 전부터 알고 있던 최자남을 찾았다. 그는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흠모하던 사람으로 선생의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거사 자금과 함께 자신의 집에 머물던 허형이라는 청년을 소개하였다. 허형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노령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최자남의 집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선생은 허형을 동지로 포섭하여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여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다. 사이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역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에 나섰다. 매일같이 역전에 나아가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ㆍ조사하면서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 하게 거사를 준비한 것이다.
    드디어 거사 당일인 9월 2일 아침이 밝았다. 이날 선생은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뒤,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형과 함께 남대문 밖 중국 요리점에서 점심을 같이한 뒤, 단신으로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다. 남대문역에 도착한 선생은 사이토를 폭살시키고, 그 자리에서 자작시 한 수를 읊은 다음 의연히 일경의 포승을 받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토 일행이 오후 5시 남대문역에 도착하였고, 환영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선생은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한발의 폭탄을 힘껏 던졌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은 비록 사이토를 폭살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강우규 선생 피체 기사(《매일신보》1919년 10월 7일자). “투탄 진정범인 강우규 체포"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사진과 함께 선생이 피체되기까지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의거 직후 혼비백산하는 군중의 틈을 유유히 빠져 나온 선생은 생사를 초월한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순사 김태석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법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처음 '피고'라고 부르던 일본인 판사는 선생의 인격에 압도되어 ‘강선생’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선생은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항소를 한 것은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자남 등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요. 그리고 검사가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니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요. (중략)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폭탄의 위력을 몰랐소. 내가 왜 그 불쌍한 신문기자나 사진반을 죽이겠소.”
   이와 같이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최자남·허형·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아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확정된 뒤에도 선생은 매일 성경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바라지를 하던 아들 중건이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략) 너는 나의 이 유언을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고 하면서 의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선생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선생은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이러한 선생의 사이토 총독 폭살 의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의 효시라는 점이다. 3·1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 군경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최고 식민지 통치자의 처단을 목표로 한 의열투쟁은 없었다. 그런데 선생은 처음부터 새로 부임하는 식민지 최고 통치자인 조선 총독을 목표로 의거를 계획하여 준비한 뒤, 사전 답사까지 거쳐 의거를 결행하였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의열투쟁의 본질이 그것을 통해 조국독립의 뜻을 일제와 세계에 전달하려는데 있다고 본다면, 총독의 생사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선생은 의거와 그 후의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겨레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와 국제사회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의거는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노선은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강우규 의사가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 모습. (왼쪽 사진,《매일신보》1920년 2월 27일자). 같은 해 5월 2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선생의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음을 알리는 기사. ‘강우규는 결국 사형’이라는 제목이다.(오른쪽, 《동아일보》1920년 5월 28일자)
   둘째,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라는 점이다. 선생이 의거를 결행한 나이는 66세였다. 즉 환갑이 넘은노객이었다. 이전의 역사에서도, 이후의 역사에서도 폭탄 투척 의거는 주로 청장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선생은 청년 같은 노객이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노인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노인동맹단을 대표한 거사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제사회는 3·1운동을 통해 한국의 남녀노소가 모두 식민지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선생의 의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한국의 독립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사회의 청장년들은 이에 자극 받아 독립운동 전선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그 해 11월 10일 조직된 의열단을 보아도, 그리고 선생의 의거 직후 각지에서 조직된 수많은 비밀결사를 보아도 명백하다. 이러한 점에서 선생의 의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1. "강우규 (姜宇奎)", 네이버캐스트, 2020.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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