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북부여기가 전해주는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만국활계 | 2012.02.05 09:29 | 조회 3031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1)북부여기의 저자 범장范樟은 누구인가?

범장은 고려 말 사람으로서 휘諱는 세동世東, 자는 여명汝明, 호號는 복애로 금성錦城( 현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통찬 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이다.

공민왕 18년 (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등을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세 번이나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고향 금성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현재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에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용호재가 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와 동방연원록 東方淵源錄,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이 있다. 이맥의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따르면 행촌이암, 청평산인 이명과 함께 범장은 양주의 천보산 태소암에서 소전거사를 만나 환단시대 우리 역사에 관한 진귀한 고서들을 보았다고 한다. 그 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행촌은 단군세기를 지었고 이명은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썼으며 범장북부여기를 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역사의 맥을 바로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행촌과 범장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망국의 비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부여사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였다. 즉 고조선의 국통맥이 부여로 이어졌듯이 고려의 멸망 이후에도 국통맥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를 각각 지필한 것이다.

2)북부여기의 주요 내용과 구성

북부여기北夫餘紀는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182년에 이르는 북부여 역사와 3세 108년에 걸친 가섭원부여(동부여)역사를 담고 있다. 북부여와 동부여 왕의 이름과 재위연대는 다음과 같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단군 재위 45년(BCE239~ BCE195)

2세 모수리慕漱離단군 재위 25년(BCE195~BCE170)

3세 고해사高奚斯단군 재위 49년(BCE170~ BCE121)

4세 고우루高于婁단군 재위 34년(BCE121~ BCE87)

5세 고두막高豆莫(동명왕)단군 재위 49년(BCE108~ BCE60)

6세 고무서高無胥단군 재위 2년(BCE239~ BCE195)

<가섭원부여(동부여)>

시조 해부루解夫婁왕 재위 39년(BCE86~ BCE48)

2세 금와金蛙왕 재위41년(BCE48~ BCE7)

3세 대소帶素왕 재위 28년(BCE7~ BCE22)

북부여기는 열국시대의 출발이자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이야기 , 북부여사의 틀이 바뀌는 동명왕 고두막한의 출현(졸본부여와 동부여의 탄생)과 이를 전후로 한 무제의 침략과 위만정권 내 번조선 유민의 조선족 독립전쟁인 소위 한사군 전쟁, 그리고 북부여 말기 남삼한 성립사와 부여 잔여사殘餘史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자 열국시대의 첫머리가 되는 나라가 바로 북부여라는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이다.


그런데 북부여기에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에 관한 기록 외에도 남삼한南三韓의 기원에 대한 귀중한 기록도 담겨있다. 해모수 단군 때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 이남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때 제가諸加 무리가 상장上將 탁을 받들고 월지(금마)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 당시 변한과 진한도 한반도 이남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로써 한반도 한강 이남지역에서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변한과 진한은 모두 마한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3세 고해사 단군조에는,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는 낙랑 왕 최숭이 마한 땅으로 옮겨가 나라를 세운일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북부여기에는 다른 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고두막한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4세 고우루 단군 때 한나라 무제는 위만의 손자 우거를 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한무제는 우거가 있던 왕검성만을 정벌하려 한것이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까지 완전히 집어삼키려 하였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바로 고두막한이다. 고두막한이 세운 나라가 졸본부여이다. 후에
고구려가 바로 졸본부여 자리에 나라를 세운다.


북부여기에는 고두막한에게 밀려 가섭원으로 쫓겨 간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역사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해부루는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아우이다. 아들이 없던 해부루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금와金蛙]를 얻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여기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 금와가 바로 동부여의 두번째왕이다.


주몽의 탄생이야기도 해부루왕 조에 같이 나온다. 여기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고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의 아들이다. 그런데 유화를 유혹하여 임신을 시킨 사람은 해모수가 아니라 고모수高慕漱라고 한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고모수는 부여의 황손(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진의 손자)이다.


동부여의 3세 대소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여러 번 언급되었다. 대소왕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된 계기와 대소왕의 죽음, 그리고 동부여 멸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내용과 다른점이 없다. 또 대소왕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의 유래와 그 멸망, 그리고 연나부 부여에 대한 기록이 모두 삼국사기와 같다. 결국 북부여기는 우리 역사의 국통에 관한 다른 사서들의 미비한 기록과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 줄수 있는 결정적 기록이라 하겠다.


물론 북부기에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연나부 부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빠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5세기말 고구려 문자열제 때 나라를 고구려에 바쳤다는 기록 외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삼국지 동이전과 후한서 등 중국사서에 나오는 부여에 대한 기록은, 주로 2~5세기에 존재했던 연나부부여에 대한것이다. 그런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는 연나부 부여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을 정복하고 고대국가(4세기 야마토大和정권)를 건설한 부여의 왕자인 의라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라를 세운 의라는 일본에 부여의 문화를 전파하게 된다.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역사고리 북부여사로 동방 한국사의 국통맥을 회복한다.
( 북부여기中 상생출판 )

*북부여는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단군 칭호를 그대로 사용했었다.

PS) 2006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해부루와 주몽이야기는, 동명왕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제위에 오르게 되면서 4세 단군의 동생인 해부루가 동쪽으로 옮겨가 건국한 동부여 이야기다.북부여기 역사가 후세에 전해오지 않은것은 위만조선을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후대에 사대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말살했기 때문이다.
구국의 영웅이 바로 고두막한이 본래 동명성제 였고, 한무제의 강력한 군대를 물리쳤던 인물이었는데, 그 동안 역사책에는 한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식민사학의 망령에 물들어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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