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처음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은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모티브로 하고 곡옥(曲玉)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인해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런데 신라 금관이 발견되기 4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금관이 흑해 연안의 호흘라치라는 고분에서 발견됐다. 이후 1978년에 아프가니스탄 틸리아-테페에서도 발견되었다. 이후 북반구 거의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이 관(冠)은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된다는 점도 밝혀졌다. 물론 샤먼의 관은 황금이 아니라 철이나 동으로 만들었지만 사슴과 나무를 모티브로 해 많이 닮았다. 바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대표물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관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유라시아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셈이다.
사슴의 뿔은 매년 자라는 것이니 그 자체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 하늘로 뻗은 아름드리나무는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케 했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하늘과 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쓰고 신성하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대표하는 제사를 모셨다. 샤먼의 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시베리아의 암각화 묘사에는 마치 와이파이 수신기처럼, 관을 쓰고 하늘과 소통하는 샤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라만의 일이 아니었다. 흉노가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한 직후인 약 2000년 전부터 유라시아 곳곳에서 비슷한 금관과 편두가 나왔다. 흑해 연안과 아프가니스탄의 금관이 그 증거다. 황금과 샤머니즘을 받아들인 동서양의 각 지역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금관을 재창조했다. 기독교의 십자가나 불교의 불상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종교가 확산되면서 각 지역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그 종교적인 이미지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 황당한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모로가 히데오라는 자칭 문화재 애호가였다. 그는 경북도 의원을 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힘이 있었지만 사실 유물을 도굴하고 판매하는 자였다. 결국 일본 경찰이 1933년 그의 집을 수색해 도굴한 유물을 압수했다. 하지만 총독부와 일본 고고학자들은 그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연이어 제출하고 비호했다. 그의 행적은 유야무야 마무리됐고 모로가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모로가뿐이 아니었다. 한국의 고분에 황금 유물이 묻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의 도굴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한국을 실습장 삼아 사방을 파헤쳤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금관총은 물론 수많은 한국의 유물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금관총의 유물도 상당수가 지금 일본의 도쿄박물관과 교토대에 흩어져서 보관돼 있다. 이렇듯 우리 고대사의 새 장을 연 금관총의 발견의 뒤에는 가슴 아픈 식민지 역사가 숨어 있다.
한국인이라면 수십 번은 보았을 신라 금관. 그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비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 유물을 다시 조사해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냈다. 금관총 금동제 칼 손잡이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을 발견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서양에 ‘다빈치 코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금관의 코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가장 외진 동남쪽에서 유라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신라의 모습은 식민지 아픔을 딛고 하루가 다르게 세계로 뻗어 나가는 21세기 한국의 모습과 닮았다. 1500년 전 유라시아 각국과 맞닿으며 세계와 조응하고자 했던 신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신라 금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1. 강인욱, "신라 ‘금관의 코드 제사와 권력을 독점한 왕족 상징”, 동아일보, 2021.11.26일자. A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