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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바로 읽기

2016.06.25 | 조회 2852 | 공감 0

『삼국유사』 바로 읽기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는 세계적으로 서양제국주의가 급속하게 팽창하던 때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진보라는 미명 아래, 문명이 발전한 나라나 민족이 그보다 뒤처진 다른 나라를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일본도 이 영향을 받아 아시아를 식민 지배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을 강탈한 일제의 고민은 우리민족이 일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일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스승국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총칼로 잠시 지배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식민지로 삼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저력이 너무 컸다. 이에 일본은 조선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보다도 조선 상고사 말살과 역사왜곡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20여 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그러면서도 조선사를 왜곡과 식민지배에 도움이 될 만한 사서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 결과 남겨진 것이 『삼국사기』·『삼국유사』였다.


『삼국사기』가 살아남은 것은 고조선 이전 역사를 뺀 삼국에 대한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치밀한 역사왜곡정책에 따라 어용학자들이 동원되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사 말살과 왜곡을 위해 식민사관을 만들어냈다. 이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서구 과학주의의 산물인 랑케의 실증사학이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실증사학을 내세워 『삼국사기』에 기록된 4세기이전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만들어냈다. 이 이론은 지금까지도 한국 주류사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삼국유사』를 남겨둔 이유는 삼국이전 역사를 말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조선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왜곡에 앞장선 인물 가운데 하나가 이마니시 류今西龍이다. 이마니시 류는 일제가 강탈한 조선사 문헌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조선의 시원 역사를 말살할 결정적 작품을 만들었다. 바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囯’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건국 이야기를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라는 인물사로 바꾸어 버렸다. 국囯을 인因으로, 글자 하나를 변조함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첫 나라인 환국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일연이 주석에 “제석을 이른다(謂帝釋也)”라고 했기 때문에 석유환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석은 제석천환인의 줄임말로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이마니시류는 일연을 내세워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의 근거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석유환국의 ‘국囯’ 자를 깨뜨림으로써 환국에서 뻗어 나간 배달과 고조선도 잘라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한민족의 7천 년 상고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혀버렸다.


이 석유환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 주는 유일한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삼성기』 하에 적혀 있는 ‘석유환국昔有桓國’뿐 아니라, 『삼성기』 상의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라는 기록이 그 진실을 말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앞으로 환국을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환국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일본서기』를 지어 1,300년의 자국 역사를 2,600년으로 늘렸지만, 조선 역사는 여전히 일본보다 장구하였다. 


하지만 이마니시 류가 환국-배달-고조선의 삼성조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조선 역사는 불과 9,000년 역사가 2,200년으로 대폭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일제가 『삼국유사』를 우리민족 시원 역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말살하는 근거로 삼았지만, 이 속에는 환국과 배달, 조선의 역사를 밝히는 진실이 담겨있다.


그러면 우리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가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오랫동안 읽다 보면 이유립 선생이 왜 이 글을 『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이라고 정의를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중국 왕침의 『위서魏書』를 인용해 일연 당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그 다음 단군조선이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옛 기록, 『고기』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석유환국昔有桓國)’는 인류 최초의 나라를 선언한다. 그런데 이마니시 류가 이 나라 국國자를 인因으로 조작하면서 글자 하나로 우리 역사의 근원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환국의 통치자 환인으로부터 그 아들 서자부의 환웅이 국통과 종통 상징인 천부인 세 가지 성물을 받아가지고 동방으로 와서 신시라는 나라를 여시고 어떻게 다스렸다는 것이 나온다. 


그 다음 사람이 되기를 원한 곰과 호랑이 대목에서 우리 역사를 잘못 보는 문제가 발생한다. ‘환웅천왕이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된 곰과 결혼을 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해석하면서 신화로 변질되어 역사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주류사학계에서는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족속으로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통치자의 신성성神聖性과 권위를 과시하는 신화일 뿐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우리 상고역사 시대에 대한 진실이 너무 간결하고 핵심만 전해지던 것에 일연이 불교의 안목과 그 시대 역사지식으로 주석을 잘못 달았을 뿐이다. 


일연이 『고기』에서 인용한 「고조선」조의 내용은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의 상고사를 바르게 만나게 된다.


『환단고기』의 원동중 「삼성기」 하에도 일웅일호一熊一虎라는 대목이 똑같이 들어있는데 구체적으로 웅족과 호족이라고 나온다. 이것은 웅족과 호족 대표자가 환웅천왕께 와서 자기들도 천지광명의 도를 체득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또한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웅족이 여자의 몸을 얻었다는 것은 수행기간을 잘 견디고서 마침내 진정한 사람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제대로 해석된 한민족 뿌리역사의 핵심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암송하여 9천년 민족사의 자긍심을 드러내자.


『삼국유사』「고조선」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卷第一 기이紀異 제1第一
 
위서   운 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입도아사달
魏書에 云 乃往二千載에 有壇君王儉이 立都阿斯達하시고
개국호조선       여고동시
開國號朝鮮하시니 與高同時니라.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께서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하시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 하였다.
 
고기   운  석유환국      서자환웅  삭의천하     탐구인세
古記에 云  昔有桓囯하니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父知子意하시고 下視三危太伯하시니 可以弘益人間이라.
내수천부인삼개     견왕이지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往理之하시니라.

 『고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부의 환웅이 천하를 건지려는 뜻을 가지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늘, 환국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이런 뜻을 아시고 아래로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에게 이로움을 줄 만한지라. 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이곳을 다스리게 하셨다.
 
웅   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신단수하
雄이 率徒三千하사  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하시니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謂之神市오 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장풍백우사운사      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將風伯雨師雲師하시고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하시며
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     재세이화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在世理化하시니라.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어 이를 신시라 이르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환웅께서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고 농사와 왕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비롯하여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시고, 신교의 진리로써 정치와 교화를 베푸셨다.
 
시   유일웅일호   동혈이거     상기우신웅     원화위인
時에 有一熊一虎가 同穴而居러니 常祈于神雄하야 願化爲人이어늘
시   신유 영애일주   산이십매       왈
時에 神遺 靈艾一炷와 蒜二十枚하시고 曰
 이배식지     불견일광백일     변득인형
「爾輩食之하고 不見日光百日이면 便得人形하리라.」

이때 웅족과 호족이 같은 굴에 살았는데, 늘 삼신상제님과 환웅님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신령스러운 것을 내려주시며 그들의 정신을 신령스럽게 하시니 그것은 곧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매였다.

환웅께서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 동안 기원하라. 그리하면 인간의 본래 참모습을 회복할 것이니라.” 하셨다.
 
웅호득이식지     기삼칠일
熊虎得而食之하고 忌三七日이러니
웅득녀신     호불능기     이부득인신
熊得女身이나 虎不能忌하야 而不得人身이라.
웅족과 호족이 환웅께서 주신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스무 하루 동안을 삼감에 웅족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족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자무여위혼고   매어단수하  주원유잉
熊女者無與爲婚故로 每於壇樹下에 呪願有孕이어늘
웅   내가화이혼지     잉생자      호왈단군왕검
雄이 乃假化而婚之하사 孕生子하시니 號曰壇君王儉이시니라.

웅족 여인이 혼인할 곳이 없으므로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웅족 여인을 임시로 광명의 민족으로 받아들여 혼인해 아들을 낳으시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위서魏書에 대하여

삼국유사에서 단군에 관한 기록은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다. 위서魏書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책은 3세기에 진晉나라의 진수陳壽(西晉. 233~297)가 쓴 삼국지三國志에 인용된 위서魏書와 6세기 중엽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지은 위서, 2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책에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단군 기사가 전해지지 않는다. 한때 일제 어용학자들은 이것을 문제 삼아 위서를 인용한 단군 기사를 일연이 꾸며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서류類의 책은 전해져 오는 것보다 없어진 것이 더 많으며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해도 근 수십 종이다.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는 ①어환魚豢의 『위략魏略』 50권, ②왕침王沈(생몰연대 미상, 위진魏晋시대)의 『위서魏書』 47권, ③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30권, ④위수魏收의 『위서』 130권, ⑤위담魏澹의 『위서』 107권, ⑥장대소張大素의 『위서』100권, ⑦배안시裵安時의 『원위서』30권, ⑧『진서晉書』 「진수전陳壽傳」에 언급된 하후담夏侯湛의 『위서』, ⑨『삼국지』 위서 유소전劉劭傳의 배송지裵松之 주에 거론된 손해孫該의 『위서』, ⑩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에서 논평된 원적阮籍의 『위서』 등이다. 

이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③과 ④이며, 『위략』의 내용 일부가 일문逸文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일연의 조작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현재 전해지는 위서를 기준으로 삼국유사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일제가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김병룡은 「단군의 건국사실을 전한 위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중국 측 문헌인 위서에 단군 기사가 실리게 된 이유는 246년 위魏나라가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할 때 그 약탈품에는 고구려 국초에 편찬된 유기留記를 비롯한 당대까지 축적되었던 책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후위後魏 때에도 436년에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이후 시종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사신들이 매해 왕래하였으므로 우리 역사가 그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많았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위당 정인보는 위서에 대해서 논하기를,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라는 책은 북위北魏의 탁발씨拓拔氏가 쓴 위서가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 왕침王沈이 쓴 조위서曹魏書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일연이 위서와 위지魏志를 엄연히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 왕침의 위서 48권은 진서晋書 왕침전王沈傳에 따르면 정원正元(254) 중에 순의荀顗, 원적院籍과 더불어 찬술했다. 隋書 「志」〈經籍〉편에서는 왕침王沈이 진晉(西晉)의 사공司空이었다고 전한다.

이유립은 대배달민족사에서 ‘청淸나라 장종원章宗源(1752~1800)이 쓴 수서경적지고증隋書經籍志考證에 보면 “중국을 낮추고 동이족을 높였다華夏陋而矜夷狄”는 이유로 후대에 불태워졌다’고 하였는데,  『수경적지고증隋經籍志考證』 권1 원문에는 왕침王沈이 지은 『위서魏書』에 대해 당대의 사학자 유지기劉知幾(661-721)의 『사통史通』「서사」편을 인용하여 “왕침과 손성 같은 사람들은 왕업王業을 논하면 패역한 무리를 편들고 충의지사를 헐뜯으며, 국가를 서술하면 정순正順(바름과 순종)을 누르고 찬탈을 기리며, 풍속을 서술하면 이적을 중시하고 화하華夏를 소략하게 하였다[「書事」篇曰: “若王沈·孫盛之伍, 論王業則黨悖逆而誣忠義, 敘國家則抑正順而褒篡奪, 述風俗則矜夷狄而陋華夏]”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왕침이 임금을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하는 일 등의 정치적으로 극히 민감한 일에 참여한 것을 좋지 않게 보고, 그가 지은 『위서』를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혹평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헌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당대에도 남아있었음이 분명하다.


위서魏書 10종 및 현전 여부

종류

저자

시대

현전 여부

『위략魏略』 50권

어환魚豢

위진魏晋시대

×

『위서魏書』 47권

왕침王沈

위진魏晋시대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진수陳壽

서진西晋(233~297)

현전

『위서魏書』 130권

위수魏收

북제北齊(506~572)

일부 현전

『위서魏書』 107권

위담魏澹

남북조南北朝~수隋

(580~645)

×

『위서魏書』 100권

장대소張大素

당唐시대

×

『원위서元魏書』 100권

배안시裵安時

당唐시대

×

『위서魏書』

하후담夏侯湛

서진西晋(243?~291?)

×

『위서魏書』

손해孫該

수隋시대

×

『위서魏書』

원적阮籍

위진魏晋(210~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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