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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천제

2018.05.21 | 조회 6304 | 공감 0

 

성리학이 정착된 조선 초기에는 『예기』의 규정에 따른 제천의식폐지론이 대두했다.

 

즉 조선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하여 중화적 천하관을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을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천자의 의례인 원구의 제천의례를 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므로 원구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천의례가 우리의 역사적 전통으로 기곡祈穀·기우祈雨 등 백성의 삶과 직결된 의례임을 알고 우리의 자주권을 강조하여 원구제도와 의례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원구제도와 제천의례의 폐지에 대한 찬반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세종 때〈오례의〉를 완성하면서 원구를 폐지하고 제천의례를 중단했으나, 세조는 의례의 제도와 절차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거쳐 다시 제천의례를 거행했다.

 

 

상의원尙衣院에 전지하기를, “천제天祭를 지낼 옥폐玉幣 5부部를 공조工曹로 하여금 조각하여 만들게 하라.” 하였다.

 

세조의 제천의례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뒤 자신의 왕위 정당성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의례적 실천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를 많이 띠고 있다.

 

따라서 자세한 고증 뒤에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성대하고 규모있게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사림파의 정계진출과 함께 제천의례는 급격히 쇠퇴하여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국가의례로서 제천의례가 다시 실시된 것은 1897년(고종 34)이다.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례로서 제천의례를 실시했다.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천지에 합제合祭하는 것은 사전祀典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원구단圜丘壇의 의제儀制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전에는 남쪽 교외에서 단지 풍운風雲, 뇌우雷雨의 신들에게만 제사지냈는데 단유壇壝의 계급階級이 법도에 맞지 않았으니 밝게 섬기는 의절에서 볼 때 실로 미안합니다.

 

동지절冬至節의 제사를 그대로 거행할 수 없으니 앞으로 고쳐 쌓는 등의 절차에 대하여 폐하陛下의 재가를 바랍니다.

 

호천상제황昊天上帝皇과 지기신地祗神의 위판과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 雲雷雨,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를 만드는 것과 제사에 쓰는 희생, 변두籩豆 등의 여러 가지 의식에 관한 글들은 역대의 의례를 널리 상고하여 마땅히 일정한 규례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때 제천의식을 행하기 위해 원구단을 서울 소공동 남별궁터에 쌓았는데, 1913년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황궁우皇穹宇만 남겨두고 원구단을 헐어낸 뒤 철도 호텔(지금의 조선 호텔)을 지음으로써 제천의례가 중단되었다.


그럼 조선시대 제천의식폐지론 주장의 배경이 되는 『예기』 규정에 대해 살펴보자.

 

 

 

천자는 천지天地에 제사 지내고, 사방四方에 제사 지내고,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고, 오사五祀에 제사를 지내되 해마다 두루 다 제사 지낸다.

 

제후는 자기 영토의 사방에 제사 지내고, 산천에 제사 지 내고, 오사五祀에 제사 지내되 해마다 모두 다 제사 지낸다.

 

대부는 오사五祀에 제사 지내되 해마다 두루 다 제사 지낸다.

 

사士는 자기의 선조先祖에게 제사를 지낸다.

(『 예기 禮記』「 집설대전 集說大全」)

 

  

 

 

예조禮曹 우참의右參議 허조許稠가 상서하였다. 상서의 대략은 이러 하였다. (중략)....

 

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하륜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參詳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廟]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예조판서禮曹判書 변계량卞季良이 하늘에 제사하는 예[祭天之禮]를 행하도록 청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이 항상 하늘에 제사 하는 예를 행하도록 원하여 이미 지나간 해에 두 번씩이나 계달 하였으나, 유윤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이 예를 행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내가 일찍이 들으니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경내境內 산천山川에 제사한다.’ 하니 나는 다만 이 예만 알기 때문에 경내 산천에 제사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예는 감히 바라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노魯나라의 교체郊禘(천자가 남쪽 교외 에서 하늘에 제사)가 예가 아닌 것을 선유先儒가 이미 논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변계량이 “우리나라가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서 중국의 제후와 같지 않기 때문에 고황제高皇帝(명 태조, 주원장)가 조서하기를, ‘천조지설天造地設하였으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라.’ 하였고, 또 전조의 왕씨王氏가 이미 이 예를 행하였는데, 다만 성상께서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예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행하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전하가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는 정성이 지극하더라도 반드시 하늘에 비는 일이 있은 연후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소격전이란?
고려 때부터 소격전昭格殿으로 불렸으나, 1466년(세조 12)에 개칭하고 규모를 축소시켰다.

 

1392년 11월에 고려 때의 재초 장소였던 복원궁福源宮·신격전神格殿·구요당九曜堂·소전색燒錢色·대청관大淸觀·청계배성소淸溪 拜星所 등을 폐지하면서도 송도의 소격전은 남겨 두었다.

 

1396년(태조 5) 정월에 좌우도左右道의 정부丁夫 200인을 징발하여,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자리에 소격전을 영조하였다.

 

태종은 재초에 관심이 컸고, 당시 소격전의 제조提調를 지낸 김첨金瞻과 공부孔俯가 도교 재초에 조예가 깊고 열성이 있어 소격전은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소격서에는 삼청전三淸殿이 있어 삼청 성신 星辰의 초제를 관장하였는데, 제조提調 1인, 별제別提와 참봉 각 2인, 잡직으로 상도尙道와 지도志道가 각 1인씩 있었다.

 

 

 

소격서의 직제는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데, 서원署員 이외에 도학 생도道學生徒가 10여 명 있었고, 금단禁壇을 낭송시키고 ≪영보경靈寶經≫ 을 읽혔으며, 과의科儀는 ≪연생경延生經≫·≪태일경太一經≫·≪옥추경玉 樞經≫·≪진무경眞武經≫·≪용왕경龍王經≫ 가운데 3경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소격서의 초제에 직접 참여한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그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소격서에는 태일전太一殿·삼청전 및 내외 제단內外諸壇이 있어서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 개의 신위神位와 상像들이 마련되어 있고, 헌관獻官·서원署員 및 도류道流가 분담하여 재초를 집행하였다 한다.

 

규모가 작았지만 재난이나 경사를 당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재초를 집행하도록 조직이 되어 있었다.

 

 

이능화李能和는 그 밖에도 소격서에 직수전直宿殿과 십일요전十一曜殿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상세한 내용은 알아 볼 길이 없다.


연산군과 중종 2대에 걸친 시대에는 소격서의 혁파 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儒臣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다.

 

연산군 에는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혁파되었으나, 위판도 보존되고 초제도 여전히 집행되었다.


 

 

 

송宋나라에는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는 소격서昭格署가 있는데, 모두 이단異端(유교에 반한 도교)으로서 국고의 소비도 적지 않습니다.

 

성종께서 폐지하려 하는데 대신이 조종 때부터 설치하여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폐지할 수 없다 하므로 중지한 것이니, 혁파革罷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당초 설치할 때 원래 경솔 용이하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뒤에도 역시 그대로 계속하여 폐지하지 않은 것이나, 이단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고,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도교의 시설이 불교의 해와는 같지 않다. 소격서는 성신星辰에 제사드리는 것이니, 역시 허무한 일이 아니다. 불가의 중들의 사찰도 일시에 다 없앨 수 없는데, 하물며 소격서이겠는가?

 

조종 때부터 설치한 지 이미 오래었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들은즉, 중국 조정에 사천제祀天祭가 있다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인가?”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사천祀天은 바로 교사郊祀의 일입니다.

 

도교의 이야기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부터 시작되어 태일太一 오제五帝를 제사드리고, 송宋나라 때에 와서는 태일궁太一宮을 설치하고 재상으로 사使를 삼았으며, 지금 명明나라에서도 역시 숭상하여 받들기를 불교보다도 더합니다.

 

숭봉한다면 불교의 폐해와 다를 것 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소격서를 설치하였을 뿐, 위에 서도 그 교를 숭상하여 믿지 않으며, 아래서도 받들어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좌도左道이니 혁파하는 것이 쾌하겠으나, 조종 때부터 설치한 지 이미 오래었으니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혁파하려면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모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연산군을 몰아 내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혁파 문제가 본격화되어 끈질기게 논란이 계속되었다.

 

조광조趙光祖를 선두로 한 신진사류들은 강경하게 소격서의 혁파를 중종에게 요청하였으나, 조종祖宗 이래로 지켜 내려온 제도이므로 경솔하게 없앨수 없다 하여 중종은 거부하였다.

 

이에 신진사류들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세상을 더립히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소격서는 혁파되어야 하고, 또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 이 할 수 있는데 일개 제후인 조선왕이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므로 소격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쌍방의 완강한 대립으로 인하여 과거의 시행이 어렵게 되고, 조광조 등이 밤중까지 물러가지 않고 집요하게 혁파를 요청하는 바람에, 중종은 1518년에 결국 뜻을 굽혀 소격서의 혁파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519년(중종 14)에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참화를 당해 제거되는데, 소격서 혁파 문제와는 관련이 없었으나 일부에서는 무인년의 소격서 혁파와 기묘년의 사화를 직접 관련시켜 논하기도 한다.

 

소격서를 혁파하게 되자 정원政院에서는 충청도에 있던 태일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고, 중종은 본원인 소격서를 없애버렸으니 태일전과 같은 지엽적인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여 같이 혁파되었다.

 

기묘사화로 신진사류가 숙청된 뒤에 중종은 모후母后의 병중 간청이라 하여 소격서를 부활시키고 초제와 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조정 신하들의 간언이 계속되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소격서에서 행해지던 양재기복의 과의적科儀的인 도교는 유교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에서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임진 왜란을 겪은 뒤 선조 때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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