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진리(포스트)

[도전공부] 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는

진실무망 | 2017.04.21 04:29 | 조회 1535

노비제도의 폐지를 불러온 동학혁명





이제는 없어진 노비제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실록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입니다. 


"노비 가격은 대부분의 경우에 오승포(五升布) 150필을 넘지 않습니다. 말의 가격은 400~500필에 달합니다. 

이는 가축은 중히 여기고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인 노비 가격이 가축인 말馬 가격의 삼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사고 파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것도 짐승보다 못한 값어치가 매겨졌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통해보면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짐승'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비를 셀 때도 ~명(名)이나 ~인(人)을 쓰지 않고 가축이나 시체를 셀 때 쓰던 ~구(口)를 썼습니다. 




노비문서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한 평생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려졌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가면 노비의 가격은 더 떨어져서 소나 돼지만도 못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자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살았던 그들. 

깊은 한의 멍울을 지고 살았을 설움은 여춘형의 만시에서 절절히 느껴집니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 여춘형이 정초부라는 노비를 장사지내주고 지은 만시晩時  



이러한 노비제도가 철폐된 결정적인 계기는 전봉준 장군이 이끌었던 동학혁명에 있었습니다.



물론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공식적인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농민군은 농민혁명 과정에서, 횡포한 양반과 수령을 비롯한 관속, 그리고 양반 지주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다. 또한 농민군 사이에서는 신분의 벽을 없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런 활동은 집강소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민군은 집강소기간 이전에도 서로 '접장'(원래는 서당에서 나이와 학력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 선생을 돕도록 맡긴 사람)이라는 평등한 호칭을 썼는데  집강소 기간에는 그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평민 이하 계층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군의 신분타파운동은 점차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농민군은 분명 양반도 상놈도 없는 그런 신분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비록 이를 글로 써서 공식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으나, 농민혁명 과정에서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신분제도의 폐지요구는 결국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는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을 통해 법적으로 철폐되었다. 

출처 : www.cein21.net/donghak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 남이 잘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우리 일은 되느니라.

전명숙(全明淑)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되어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이 되었느니라. [2: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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