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이 이 땅에 강세하기까지

2014.01.04 | 조회 7288

그러면 상제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의 역사적인 배경 몇 가지를 들어 보겠다. 


진표율사의 기도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때 진표율사(眞表律師)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 분은 도통을 받기 위해 어떤 독특한 구도 행각을 했냐 하면, 망할 망(亡)자, 몸 신(身)자, 망신참법(亡身懺法)이라는 방법으로 공부를 했다. 시한을 정해 놓고 그 시간까지 손가락을 돌로 찧어서 다 으스러뜨리고, 자기 몸뚱이를 부수면서 팔도 끊고, 또 높은 바위에서 떨어져 몸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안 되니까 시한을 또 정해 놓고 그 때까지 견성(見性)이 안 되면 아주 벼랑에서 떨어져 죽어 버리기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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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건 대상이 딴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미륵부처님에게 자기 소원을 들어 달라는 것이다. 참하나님에게 직접! 천상에서 하나님이 볼 때 너무너무 안됐다. 그런 인자한 하나님이 가만히 보니 안 만나주면 죽게 생겼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온 생명을 다 바쳐 죽기를 각오하고 열정적으로 도를 구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륵부처님이 도솔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내려 오셔서 진표에게 도통을 내려 주셨다. 진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 구도에 정진하여, 앞으로 닥쳐올 천지 대개벽의 환란을 내다보고 지극정성으로 미륵부처님,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나라에 강세하시기를 빌었다. 


이에 하나님이 진표를 보고, “네가 그렇게 정성이 지극할진대 네가 본 내 모습 이대로 불상을 받들어 세우겠느냐?”고 다짐을 물으니, “예, 받들어 모시겠습니다”한다. 그러고서 세운 불상이 지금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의 미륵불상이다.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33척의 미륵불을 세웠다. 


그런데 그 미륵불상을 세운 자리가 원래 금산사 연못자리였다. 진표가 그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그 자리에다가 미륵불상을 조성했고, 그때부터 미륵신앙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 후 진표는 속리산 법주사에도 미륵불상을 세우고 금강산 발연사에도 세우고, 그렇게 미륵불상 셋을 세우고 죽었다. 


진표라는 불자가“미륵부처님, 이 땅에 꼭 와 주십시오!”하고 생명을 다 바쳐 기도하고, 또한 천여 년 동안 수많은 중생들 이“미륵부처님, 이 땅에 꼭 와 주십시오!”하고 빌어 왔다. 그러니 상제님은 진표를 비롯한 민중들의 염원(念願)과 기도에 응하여 한반도에 오시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앉아 있는 좌불(坐佛)과 서 있는 입불(立佛)이 있다. 좌불은 지나간 세상의 부처를 상징해서 앉아있는 상으로 만들었고, 입불은 내세불(來世佛)로서 앞 세상에 장차 걸어온다는 의미에서 서 있는 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서 있는 부처가 미륵부처인 것이다. 


불자들에게는 부처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세속의 하나님, 주님, 상제님을 그들은 부처라고 한다. 불자들은 부처 하나밖에 없다. 부처 지상주의다. 부처가 하나님이고, 부처가 아버지고, 하여튼 부처 하나밖에 없다. 상황이 그러하니 상제님이 불자인 진표에게 잠깐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가톨릭 신부 마테오 리치의 하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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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볼 때 많은 성자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 이마두(利瑪竇), 즉 마테오 리치 신부는 지나간 세상 성자들 중에 인간 세상을 위해 쌓은 공덕이 가장 큰 분이다. 리치 신부는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법관으로 키우려고 했지만 리치 신부는 예수회에 가입하여 세상을 문명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 예수회는 인재를 양성하여 전 세계 각국에 새 문명을 개척하는 봉사 활동을 했다. 그때 리치 신부는 열아홉 살 나이에‘나도 전 인류를 위해서 내 몸을 바쳐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회에 가입을 했다. 


그 후에 그는 가톨릭 문화를 세계에 널리 전파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인도와 마카오를 거쳐 31세 때 중국 땅을 밟았다. 중국으로 건너온 그는 중국말도 배우고 중국 문화도 배우면서 사람들을 포교해 나갔다.‘ 나는 신(神)을 모시는 사람이라’해서 승려처럼 회색 물들인 옷을 입고 머리도 깎고 맨발로 다니면서, 10년 동안 포교를 하고 보니 자기가 포교한 사람이라곤 하층민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화 사업은 문화인을 데리고 해야지 하층민만 가지고서는 안 되지 않는가. 거기서 대오각성을 하고 그때부터 비단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고, 머리에 관도 쓰고 다니면서 상류층을 포교했다. 그리고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을 해서 구라파에 소개도 시켰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같은 세계 지도를 그려서 동양에 배포도 하였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서로 교류시켜 준 것이다. 그렇게 상류층과 접촉을 계속하다 보니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에게까지 리치 신부의 활동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리치 신부가 황제에게 자명종(自鳴鐘)을 선물했는데, 황제가 그 시계를 받고 보니 시간이 정확한 것은 물론이요 시간에 따라 뻐꾸기가 나와서 울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 년 전이니 얼마나 신기 했겠나. 


그런데 리치 신부가 중국에 와서 동양 문화를 접하고 보니, 동양의 음양오행이 자연 섭리의 바탕이고 자기네 서양의 물질 문명은 자연 섭리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원 진리의 고갱이가 동양의 음양오행 이법임을 깨닫고 동양 문화를 연구해서 절후도 더 보완을 하고, 일식과 월식도 더욱 치밀하게 계산을 해서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어 오히려 명나라 학자들에게 가르 쳐 주기도 했다. 


또한『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도 만들어 동양의 여러 나라에 퍼뜨리기도 했다. 가톨릭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그렇게 한평생을 다 바치고서 쉰아홉의 나이로 중국 땅에 묻혔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볼 때 모든 성자들이 육신을 가지고 살 아있을 때까지만 자기 이상을 폈을 뿐이고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리치 신부는 죽어서 신명이 되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천상의 여러 문명한 별나라에 가서 새로운 문명을 따내려다가 인간 세상의 과학자들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세상의 생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래서 전기도 만들고 각종 문명이기를 개발하게 하여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없이 범하였다. 이에 리치 신부는 생활 문화만 발전시킨다고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틀을 본질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들, 즉 동서양의 역사적인 훌륭한 신명들과 더불어 인간 세상을 건질 묘책을 강구해 보았지만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종국적으로 그들을 전부 거느리고 상제님께 나아갔다. 상제님을 알현하여, ‘저희들의 능력으로써는 인간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없으니 옥황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임어하셔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하소연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상제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게 된 것이다. 리치 신부가 아니어도 상제님은, 요한이 계시받은 대로‘장차 오실 분’이었지만, 리치 신부가 상제님이 오시는 데에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요컨대 불가에서도 서교에서도 상제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계기와 인연을 만들었다. 


상제님께서 내려보낸 전령, 최수운 대신사 


그리고 상제님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신 것이 아니다. 상제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 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하다가 너희 동토(東土)에 그쳐 금산사 미륵불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다”고 하셨다. 상제님 강세 전에 먼저 최제우(崔濟愚)를 내보내셨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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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水雲) 최제우는 충남 논산군 양촌면이라는 곳에서 연담 (蓮潭) 이운규(李雲奎)라고 하는 유학자 밑에서 김일부(金一夫) 와 같이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하였다. 김일부 선생은 광산 김씨로서 출생지는 논산군 양촌면이고, 최수운 선생은 경주 최씨로서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김일부 선생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고, 최수운 선생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후손이다. 혈통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김일부 선생은『정역(正易)』을 지었고, 최수운 선생은 상제님에게서 신통(神通)을 받았다. 


최수운 선생은 원래 양산 천성산(千聖山)에서 수도를 했다. 도통을 하기 위해 토굴에서도 암자에서도 공부를 했으나 전부 실패하고 득도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경주 용담에서 수도에 정진하던 중 마침내 경신(庚申: 1860)년 음력 4월에 상제님께서 신통을 내려주셨다. 신통은 천지에서 내려주는 기운을 받아 도통하는 것이다. 


최수운이 신통을 받고는‘앞으로 상제님이 오셔서 후천 새 문화를 만들어 새 세상을 조성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걸 묶어서 글자로 만든 것이“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이다. 바로 상제님이 최수운에게 천명으로 내려주신 주문이다. 그 글 속에는 수운 자신이 무슨 사명을 받았고, 앞으로 상제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고, 그 일이 어떻게 결론지어진다 하는 것이 다 함축되어 있다. 


“시천주(侍天主)”하나님을 모시고,“ 조화정(造化定)”조화를 정하니,“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만사지문화를 개창해서 좋은 세상 만들어주는 은총을 후천 5만 년 영세토록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글자 열석 자에 앞 세상 이루어질 것을 다담아 놓은 것이다. 


지금도 최수운의 이 열석 자가 유효하다. 그 열석 자에 앞으로 펼쳐질 우주원리를 담아 놓았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그 주문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주문은 후천 5만 년 동안 유효하다. 


그러나 최수운은 그것만 밝혀 놓았지, 참법을 지어내어 대도를 세우지는 못했다.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의 국교(國敎)가 유교였다. 최수운이 그 유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되다 보니 유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해서 결국 상제님께서 갑자(甲子: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시게 되었다. 

경신, 신유, 임술, 계해, 갑자! 신통을 내려준 해로부터 기운 을 거두신 해까지 5년, 만 4년이다. 기운을 거둬들이면 죽는 수 밖에 더 있는가. 해서 갑자년에 최수운이 대구 관덕당(觀德堂) 형장에서 참형을 당했다. 상제님이 그렇게 최수운의 도통기운을 거두시고, 그 후 8년 만인 신미(辛未: 1871)년에 친히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다. 


최수운 선생은 이미“더디도다, 더디도다, 무극대도가 8년이 더디도다”라고 하여, 자기가 죽고 8년 만에 상제님이 강세하실 것을 예언도 했다. 상제님이 천상의 옥황상제님의 위치에서 이 세상에 오시는 데에는 그런 허구한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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