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상원도장] 임오년 숙구지 포교 대운을 힘차게 돌리고 있다

초립쓴30대 | 2010.02.23 16:15 | 조회 5582

천지에서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이 절대절명의 기회,포항 상원도장의 성도들은 도장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힘차게 임오년의 포교 대운을 열고 있다.
 매일같이 수십명의 성도들이 도장에 와서 수도하고 배례하고 공부함은 물론 포교와 홍보에도 소홀함이 없다.
 포항 상원도장의 몇몇 성도들의 신앙담을 통해 진리의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해 본다
 
 
 
 
 
 

자기개혁 자기혁명으로 천지일월에 보은하자
 
김동영(34세)/ 부포감/ 도기 132년 8월23일 입도

 
 처음 수호사님으로부터 월간『개벽』에 사례발표를 하자는 말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저는 올 9월에 재입도를 했습니다. 재입도 자체도 부끄러운데 글까지 발표하다니요. 그러나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새로이 신앙을 시작하는 일꾼이나 재입도하려는 분들, 그리고 신앙에 지쳐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저는 포항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1989년 대학교 1학년때부터 친구의 소개로 증산도를 신앙했습니다. 1학년 입학하자마자 증산도를 홍보하고 증산도를 내 생활의 축으로 삼아 열심히 신앙했습니다. 포교도 열심히 하였고 나름대로 대학생활 전부를 바쳤습니다. 처음 한 1년 정도는 잠을 못 잘 정도로 척신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한 결과 육임도 짰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어머님의 중병 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어머님은 1993년 암 선고를 받으셨고, 그로부터 5년 후 마침내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그때 제 마음 속에는 증산도에 대한 원망이 생겼고, ‘내가 신앙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회의 때문에 신앙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는 아직 어리고 신앙도 천하사신앙이 아니라 개인신앙이었습니다. 어머니 신유한다고 하면서도 일심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하면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고 자존심과 욕심을 가지고, 오직 우리 가족, 우리 식구만 생각하였고 ‘이만큼 했으니 나에게 이만큼 돌아와야 되지 않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건 참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올초부터 꿈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자주 보였습니다. 꿈에 어머님이 여러 번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얘기해 주셨는데, 예사롭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산소를 직접 찾아가 뵙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머님은 우리가 하루빨리 신앙을 할 수 있도록 간절하게 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어머니가 항상 제 곁에 계신 것을 확신합니다.
 
 그후 여러 성도님들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점촌의 전광채 성도님과 포항의 김재광 성도님, 그리고 수원의 이인희 성도님, 그리고 박분태 수호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분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도장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날은 포항도장 이전하는 날이었습니다. 마음이 아주 편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인 손노을 성도에게도 증산도를 이야기하고 같이 도장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내에게도 너무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입문을 했고,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전부 교육받고 수행하면서 지난 묵은 기운을 떨쳐내었습니다.
 
 일주일쯤 지난 후부터 아내는 수행도중 신도세계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체험을 공유하면서 다시금 조상님의 음덕에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제가 증산도에 없었던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성도님들을 힘들게 했고, 또 태사부님 사부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웠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도전, 어록, 우주변화원리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같이 눈물을 흘리며 상제님의 삶과 태모님의 삶을 느끼고 조상님들의 삶을 느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지난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또 내가 나아가야 할 길, 나에게 주어진 사명감(진리의 수호자이며 배수진을 치며 전투에 임하는 병사로서)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입도식 당일, 저는 소감발표 중 뜨거운 감격으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사부님 말씀대로 조상선영신들의 해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지나간 신앙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이 신앙의 길을 열어주신 태사부님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단 하루라도 상제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상제님에 대한 우리들의 참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제님 진리 안에 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태사부님 사부님을 하루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또한 진리에 대한 구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감격스러운 입도식이 끝나고 3주 후 저의 직선조, 처선조 천도식을 올렸습니다. 천도식이 있던 날, 아내 손노을 신도와 포항 상원도장의 모든 신도들이 하나가 되어, 선조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상제님 사업에 대한 집념을 모두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장의 성도들 모두 각자의 조상선영신들이 응감하여 울고 웃으며 화합을 다졌습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제 아들 김홍욱 신도(5세)가 밤에 갑자기 편도선이 붓고 고열에 시달리며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신유를 했는데 그 다음날엔 열이 너무 많아서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병원에 갔다와서 아이가 너무 많이 아프다고 하여 제가 신유를 했습니다. 한참 후에 아이가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깨어나 “아빠, 태을주 읽자” 하는 것입니다. 그후 약 40분 동안 태을주를 읽었고, 읽다가 저에게 “아빠, 사배심고 해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빠, 상제님 태모님이, 태을주 안 읽으면 배 깍는데, 엄마 아빠도 배 깍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열이 내렸고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떻게 5살짜리 아이가 태을주를 40분 동안 혼자 읽을 수 있었을까요. 보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아이는 허리를 90도 이상 꼿꼿하게 세우고 주문소리도 아주 컸습니다.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말도 하였습니다. 어찌나 놀랐던지.
 
 우리 아이는 상제님과 태사부님을 자주 혼동합니다. 한참 후에 아이에게 있었던 일을 물어보니, 전혀 기억을 못했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지만 교육관성금 및 모든 월성금을 일반신도만큼 항상 헌성했는데, 조상님들이 우리들의 신앙의식을 자각시켜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의욕이 샘솟지만 내실을 기하기 위해 차근차근 공부하고,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며 조금씩 포교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대도를 갈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잠시 도문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는 옛 일꾼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여 설득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도장개창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성도님들과의 화합입니다. 화합하여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전에 포교했던 사람들은 지금 거의 신앙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개인의 사심으로 한 포교였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봅시다. 오직 공욕만을 바치는 그 순간 그때가 가장 순수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오직 공욕으로, 천지일월에 대한 일심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습니다.

증산도는 제 삶의 철학이요, 버팀목이요, 종착역입니다
 
 

김재광(34세)/ 부포감/ 도기 119년 5월14일 입도

 
 저는 1988년에 대학에 낙방하고 대구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고향인 포항 집에 잠깐 들렀다가 우연찮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홍보를 하고 있는 증산도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개벽 다이제스트』 책자를 받아 대구로 돌아와서 공부하면서 짬짬이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좀 어렵기는 했으나 뭔가 저를 끄는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구에 있는 도장을 찾아갔습니다. 일단 수행을 한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워낙 공부하느라 바빴던 때여서 가끔 도장에 들러 수행을 했습니다.
 
 그후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89학번)에 진학을 하여 다시 포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포항공대에는 증산도학생회가 있어서 공부하면서 서클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포항공대는 특성이 워낙 공부를 많이 시키기 때문에 서클활동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선배님들이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 속에서도 저는 내심 제 마음이 너무 나약하고 소심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에 갔다 오기로 마음먹고 지원을 했습니다. 군에 입대해서 정말 한번 진∼하게 고생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1992년 의정부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26사단(불무리부대) 사령부 본부대에 배치되어, 정보과에서 행정병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소속해 있던 사단은 예비사단이어서, 말 그대로 전쟁이 발발하여 최전방이 공격받으면 곧바로 진격, 총알받이가 되는 부대입니다. 때문에 연중 6개월 이상 행군과 훈련을 했습니다. 따라서 행정병은 여러 가지 훈련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만 했습니다. 매일 야근하고 보초서고 정말 죽을 맛이었죠.
 
 그런 생활 중 하루는 잠깐 외출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의정부 시내에서 『도전』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충격이었죠. 그 전까지는 이렇게 멋진 책자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근하고나서 부대에 내려와서도 남들 잠자는 시간에 매일 도전을 읽었습니다. 한 서너번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군 생활 내내 저는 남들 잠자는 시간에 도전을 읽었습니다. 그 힘든 군생활 속에서도 증산도는 언제나 크나큰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증산도는 제 삶의 철학이요, 버팀목이요, 종착역입니다.
 
 하지만 제대후 대학에 복학하고부터는 공부와의 전쟁 속에 휘말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대학졸업 직전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지금은 부부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다시 LG-EDS 연구소(인천부평소재)에 취직하여 주말부부 생활을 했습니다.
 
 신혼생활 초기부터 우리 부부는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말에 비행기 타고 포항에 내려와서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일요일 저녁에 인천행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면 월요일 새벽이 됩니다. 거의 매주 포항에 내려 왔으니까, 주말마다 포항에서 과외를 해서 비행기값을 벌었습니다. 그때는 인천 부평도장에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LG-EDS 중 포항에서 제일 가까운 구미지역에 발령날 수 있도록 팀장님께 부탁하여 구미로 내려왔습니다. 주말에는 포항에서 과외로 차비를 벌고, 월요일 새벽에 구미로 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수요일에는 꼭 구미도장에 나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옵니다. 증산도와 힘든 군대생활 덕택으로 체득된 인내력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구미가 포항에서 가깝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LG-EDS를 떠나 포항지역의 포스데이타(포스코 계열사-정보처리)에 취직했습니다. 만 2년만에 아내와 가족, 일가친척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그동안의 객지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았습니다.
 
 포스데이타에서의 직장생활은 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연찮게 사내벤처에 지원을 했는데 갑자기 소사장(사업부장)이 되는 바람에, 벤처 소사장으로서 위치, 즉 “그래 지금 시작하면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하는 패기와 자신감이 뇌리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더이상 과거의 나태하고 자신감 없는 그런 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었고, 사업하면서 배운 자신감과 know-how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산을 가지고 이제는 증산도에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해보고 싶었습니다. 매일 도장에 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업은 뒷전이 되었죠. 출퇴근 할 때나 혼자 있을 때는 무조건 태을주를 외우고 다녔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태을주를 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수도를 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증산도 관련 책자와 도전 등 거의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증산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누워 있는데, 신안이 열려 오색찬란한 꽃이 보이기도 하고, 조금만 수도해도 머리가 간질간질하면서 온 몸과 머리가 시원해면서 기에 의해 제 혼이 붕∼ 뜨기도 했습니다.
 
 2002년 7월 10일 아침 7시경에는 꿈속에서 사부님을 뵙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못했는데, 이제 정말로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리니, 사부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너무나 감개무량했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증산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왜? 증산도는 우주를 껴안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이깟 벤처 소사장으로서의 회사생활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되면, 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저는 사업을 해봐서 그런지 직감적으로 시간대의 중요성(구체적으로, 사오미 시간대)을 너무나 절감합니다. 사업이란 기술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영업력과 그 사업의 시기적절함이 필수입니다. 너무 빨리 시작해도 안 되고 너무 늦게 시작해도 사업은 망합니다.
 
 제가 아직 많은 걸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증산도 일을 하려면 바로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후회’를 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확신합니다.
 
 그동안 증산도를 다시 시작하면서 수많은 자료(타종교 포함)를 탐독하였습니다. 과연 ‘상제님 사상이 진실이냐’부터 시작해서 ‘과연 증산도가 종통인가’까지. 대략 4∼5개월 걸린 것 같습니다. 저는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게 진실이고 증산도는 종통이다! 나는 내 모든 걸 걸고 다시 시작한다, 이건 무조건 해야 된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정말 후회한다.
 
 성도님들! 다시 한번 저는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천리는 때가 있고 인사는 기회가 있다”고, 태사부님께서 수도 없이 강조를 하십니다. 정말로 “하늘이 주는 기회”, 이제 지나가면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귀중한 기회를 우리 모두 놓치지 말고, 내 생명의 모든 에너지를 바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함께 천하사에 종군합시다.
 
 하늘은 바친 만큼 반드시 몇 곱절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내 생명 다 바쳐 상제님 진리를 전하는 불타는 구도자가 되겠습니다
 
서정철(34세)/ 4구역 포감/ 도기 127년 11월21일 입도

 
 저는 포항 상원도장에서 부부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이 바닷가 라서 어릴 때는 가끔 용왕제라든가 굿을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대나무를 잡고 막 흔들면 신이 들어서 그런다는데, 어린 나이에도 ‘정말일까’하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또 제 몸이 아프면 어머님께서는 머리맡에 부엌칼을 꽃아 놓기도 하셨고, 검은콩을 삼키게 하거나 칼로 허공을 찌르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이런 일들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에서야 이해할 듯합니다.
 
 저의 신앙동기를 말씀드리죠. 도기 127년 11월 겨울, 좀 추웠다고 기억됩니다. 저녁에 『충격대예언』이란 책을 읽었는데, 다른 기억은 별로 없고 뒤쪽에 보면 “나를 보려면 금산사로 오라”는 한 구절이 머리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첫차를 타고 포항에서 금산사까지 갔고, 그 일이 증산도 신앙의 출발점이 된 계기였습니다.
 
 오늘까지 신앙해오는 과정에서 물론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늘 듣는 얘기지만, 독서와 사상신앙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누군가가 개벽이 온다고 말해준다 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우주의 운행원리상 개벽이란 게 올 수밖에 없는 이치를 스스로 터득해야 참된 신앙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우주변화원리를 깨우치지 못해 흘려 보냈던 많은 시간들, 그 돌이킬 수 없는 아까운 시간을 위해 참회하며 더이상 헛된 시간낭비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신앙하면서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은, 올 3월 제 아내를 입도시켜 이제는 저보다 더 나은 일심신앙인이 된 모습을 보는 일입니다. “일심 도제(徒弟) 한 명이 열명 신도 안 부럽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런데 한편 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정해진 내일은 오는데, 직장일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만큼 참여하지 못한다는 조건이 무척 힘듭니다. 원없이 도장에 참여하고 진리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없는 시간을 쪼개어 어렵게 진리를 전한 사람이 입문 날짜를 앞두고 하룻밤 사이에 맘이 변해 버렸을때의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몇번의 시행착오 속에서 포기하고, 절망감을 느끼고, 배신감이나 때로는 자격지심까지도 느꼈습니다. 왜 안 되는지도 생각해보고…. 그러는 사이에 제 스스로가 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 신앙인들과 일심신앙인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던가도 새삼 느껴보고, 부족한 나의 신앙생활을 반성해보는 계기도 됐습니다.
 
 결국은 더 큰 사람으로 쓰기 위한 작은 고난의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봅니다. 힘이 들면 하늘 한번 쳐다보며 상제님 태모님을 찾아보고, 나의 고생은 태사부님 사부님의 100% 중 1%도 못 미친다고 자신을 타일러도 봤습니다. 그러는 사이 신앙심이 조금씩 깊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신앙심이 조금씩 깊어갈수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성심과 조심스러움이 생겼습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치면 마가 덤벼든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항상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그리고 조상님께서 내 등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며, 제 마음까지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천지에서 보여주는 개벽의 실체에 정말 무섭도록 전율이 흐릅니다. 듣는 것과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의 엄청난 차이를…. 내가 보았던 무서운 상황이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나태해지려느냐” 하는 하늘의 준엄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지금 대세를 안다면 잠잘 시간도 없다는 태사부님 사부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깨어진 일꾼이라면 매일 드리는 심고문의 첫대목처럼, “상제님의 혼이 되고 태모님의 화신이 되고 태사부님 사부님의 분신이 되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지금 포항 상원도장의 기운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 그 자체입니다. 지금 사오미 개벽장터의 중대성와 위기감을 성도님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으며, 성도님들 한분 한분의 마음에 있는 비장한 각오를 눈빛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상제님 도수대로 지금은 준비되어 있는 일꾼들이 들어오고 마지막 대세몰이라는 게 이곳 포항의 중심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실감나게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전국도장 1위라는 것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작은 힘이지만 도무집행에 있어 보탬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끝으로 제 인생의 반려자이자 신앙의 동반자인 아내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습니다. 일심신도로써 이제는 어깨띠까지 두르며 개벽책을 판매하러 다니는 모습이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두살짜리 아들녀석까지 일심 유아신도가 되어 사배심고며 기도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증산도의 초석이 되어, 내 생명 다 바쳐 상제님 진리를 전하는 뜨거운 구도자가 되겠습니다.

내가 증산도를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이수윤(46세)/ 교정/ 도기 123년 3월6일 입도

 
 제2변때 신앙하신 아버지 밑에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저는 어릴 때부터 천지개벽이니 해원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개벽이 된다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않고, 아버지는 오직 불고가사로 도(道)에만 전념하시니 가정은 끼니조차 먹기 어려웠습니다. 형제들이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자연히 성년이 되고 나서 아버님의 도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져, 어느 자식 하나도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게 되었죠.
 
 아마도 아버지는 제2변때 신앙을 열심히 하신 것 같았습니다.그러다가 아버님의 스승은 돌아가시고 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다니다가, 우리 아버님은 어느 빈 절을 찾아 들어가 호구지책으로 승려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낮에는 부처님을 찾고 밤에는 상제님을 찾는 격이 되었죠.밤이면 마을사람들도 절로 올라와 태을주와 운장주 등을 외우면서 수행공부 하는 모습을 보고 저 또한 같이 공부를 하면서 어린시절을 절에서 보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절이라 하여 그냥 오는 신도만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양식이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님들은 탁발도 다니고 봄가을로 건대(보리나 쌀 수확 중에 한되 내지 두되를 절에 시주하는 것)도 거두고 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신이 씌운 사람이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신도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도덕사(우리가 거주하던 절이름)에 가면 그 스님이 귀신을 잘 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경주·포항 일대의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신도가 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도 1∼3학년까지는 못 다니고 4학년부터 학교를 다녔습니다.겨우 졸업을 하고 나자, 중학교는 갈 필요가 없으니 공장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그때 마침 부산에 있는 누나가 찾아왔길래 부산으로 따라가 야간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어 어렵사리 졸업을 했습니다. 그후 절의 사정이 좋아져 고등학교는 큰 어려움 없이 졸업하였고,군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행정고시에 뜻을 두고 시험준비도 몇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습니다.그것이 아마 제게는 가장 힘든 역경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증산도인 아내를 만나 신앙의 길로 들어서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결혼 이야기가 심심찮게 거론되었지만 저는 독신을 주장하고 있던 차,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누나가 한번 놀러오라고 해서 갔는데, 온 김에 선이라도 한번 보라고 해서 박절하게 거절을 못하고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님께 선을 본 처녀가 증산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니까, “자식이 많아도 한놈도 도를 닦을 놈이 없었는데 이제 며느리가 도인이 들어오는구나” 하시면서 결혼을 하라는 겁니다.아버지는 “이제 우리 집에도 복덩어리가 들어올 모양이구나” 하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 처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과는 틀릴 것 같아,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많고많은 사람 중에 증산도를 신앙하는 처녀를 만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필연적인 만남이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도기122년 9월 결혼을 하고, 그 다음 해인 도기123년 음력 3월6일에 입도식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믿었던 상제님의 도를 내가 아내로 인해 믿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그후 저는 증산도에 점점 매료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입도할 즈음, 90여평 규모의 포항도장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해 가을에 49일 정성을 드리고 천도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도기124년 양력 6월6일(현충일), 수행하고 도공을 하는데 자발동공이 되어 생각하는 대로 보이고 신명들의 마음도 보였습니다.
  호국영혼들 수천명이 와서 해원시켜 달라고 하는데 상제님 앞에 와서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들을 안하는 겁니다.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니까, 무덤 안의 뼈가 보이고 잠시 후에는 어머님이 조상선영신 옆에 와 계신 거예요. 살았을 때 그토록 고생만 하시다가 위암으로 뼈만 남아 돌아가셨는데, 옆에 와 계신 어머님은 살이 찌고 보통사람보다도 훨씬 등치가 크셨습니다.
 
 아마 어머니도 태을주를 열심히 읽으신 분이라서 천상에서는 편안한 것 같았습니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우리 모자는 서로 느낌으로 다 알았습니다.정말 반가웠습니다. 그 체험이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에서 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도장 성장과 함께 3대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다
 그후 도기 126년은 책임자가 모두 바뀌고 구역제로 체제개편이 되어 제가 구역장을 맡아 도장살림을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당시는 도장이 여러 모로 상당히 어려운 상태여서, 20평 규모의 포항 죽도도장으로 개칭 이전하였고, 신도가 반이상 감소된 상태였습니다.그후 상임 포감제도가 생겨 다시 포감을 맡았습니다.
 
 조금씩 신도와 도장살림의 규모가 커지는 가운데, 도기127년 12월에 IMF를 맞았고 다음해 도기 128년에는 증산도문화회관 부지매입을 위한 성금공사를 어렵사리 끌러내고 문화회관 착공식에 들어감으로써 증산도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됩니다.
 
 도기129년부터 태사부님 사부님의 친정체제가 시행되고 도장책임자인 포정제도가 시행되자, 그해 10월 저는 포정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아버님도 절에서 하산하시고 12월에 입도하심으로써 우리 가족은 이제 3대가 함께 증산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제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런 해였습니다.
 
 도기130년 3월에 40평 도장으로 이전한 후, 저는 가정 사정으로 포정 자리를 내놓고 새로 온 포정과 더불어 도정을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지금의 박분태 수호사님이 포항지역 책임자로 발령받아 현 포항 상원도장으로 이전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의 의식이 높아져서 9월에는 전국 1위를 달성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사실 1위는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간부들과 성도님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이제는 사부님께서 칠성도수를 선포하신 후로 신도세계에서도 사부님의 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꾼 만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우리 성도님들은 누가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분발하여 완전육임은 물론 쌍육임(12임)까지 짜서, 그동안 고생한 모든 성도님들도 성공하고,증산도의 세계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일선에서 고생하는 모든 성도님들께 격려의 구호를 외칩니다.화이팅!

육임완수만이 천지일월의 전정한 일꾼이 되는 길입니다
 
김호진(35세)/ 예정/ 도기 124년 9월15일 입도

 
 안녕하세요. 제 가족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아내인 하순식 성도, 큰아들 현우, 작은아들 찬우가 있습니다. 지면을 빌어 증산도 신앙을 하게 된 동기와 앞으로 계획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1980년대 초반 중학생때 처음으로 『개벽 다이제스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옆방에 살고 있는 형이 이상한 책이 있다며 개벽다이제스트를 보여 주었는데, 그때 잠시 쭉 훑어보았습니다.
 
 내용인즉, 앞으로 세상이 이렇게 변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휴전선 모양이 지금의 태극기 모양과 흡사하다, 바둑판에 관한 것 등 전혀 듣도보도 못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이 책을 가져가는 바람에 책을 직접 사서 읽어보고 싶었으나 서점에서는 그 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 수업 중에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환단고기』입니다. 그동안 학교생활에서 접해보지 못한 내용이었죠.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 아니라 1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단군은 실존인물이며 왕의 호칭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작은 나라지만 지나온 역사의 정통성에 비추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후 저는 달라졌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같은 잘사는 나라에 태어났으면 하고 바랬었고 약소민족의 처지를 한탄했었는데. 이제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생각이 특별한 녀석이라는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구요?
 
 영문이 쓰여진 옷은 입지도 않았으며, 비록 싸구려라 할지라도 일부러 한글이 쓰여진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도 일본의 천황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하는데, 썩어빠진 정치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고 오로지 단군사상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민족의 실제 조상으로 모셔야 하며, 아울러 조상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대학에 가면 단군사상 연구쪽으로 동아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많은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말했듯이, 앞으로 우리나라에 큰 괴병이 발생한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퍼질 때 오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상사람을 구하게 된다. 또 젊은 지도자가 나타나 세상을 이끌어 가게 되는데, 그때 내가 그 무리의 일원이 된다….’ 이런 상상을 하며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뒤 시간이 흘러, 재수하여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학년 때 군대에 갔다온 후 어떻게 하면 좋은 점수받아 좋은 직장에 취직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94년 10월 군대동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괜찮은 아가씨를 소개시켜 준다며 나오라고 해서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지금 서울 신촌도장에서 신앙하고 계시는 선형숙 포감님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은 이미 기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관심이 많았던 헤르만 헤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증산도로 옮겨가게 되었지요. 대학교에서 벤치 위에 누가 놓아둔 증산도 홍보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는데, 자의반 타의반 부산 동래도장에 간 그날, 입도를 하고 태을주 수행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장 방문 3일 만에 도공이 열렸는데, 너무나 신기한 나머지 21일 동안 매일 도장에 가서 500배례도 하고 집중수행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도 초기에 그렇게 정성을 드린 것이 그뒤 몇번의 신앙생활 고비가 있었는데도 나가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분위기 좋은 포항 상원도장에서 생활하게 된 밑거름이었나 봅니다. 지면으로나마, 그 당시 저를 이끌어준 선형숙 포감님께 감사드립니다.
 
 직장생활 때문에 포항으로 온 후, 저는 묵은 신앙인이 되어 도장도 때가 되어야 나가고 그나마 핑계거리가 생기면 치성참석조차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박분태 수호님이 부임하신 뒤, 천도식을 빨리 모시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정성을 드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 현우가 태어나자 문제가 터졌습니다. 2001년 12월 병원에서 자폐성향의 행동발달장애를 보이고 있다는 판정을 받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실의에 빠져,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망을 하며 생활에 의욕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도로써 풀어야 된다는 수호사님의 권유로, 직선조 천도식을 급히 모셨고 처선조, 처외선조 천도식까지 석달에 걸쳐 차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증산도 진리를 잘 모르면서도 순순히 따라준 집사람 하순식 성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천도식을 서둘러 주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대단한 행운아인 셈이죠.
 
 집안 가계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집안 어른들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한많은 조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돌 전후에 돌아가셨다거나 청소년기에 돌아가신 분, 가족들도 이유를 모른 채 군대에서 사망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분들까지 모두 천도식을 올려 드렸는데, 비록 급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참 잘했다고 느꼈습니다. 그후 꽉 막힌 머릿속이 뻥 뚫려 시원해지고 후련해지는 것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선조와 처외선조를 모시는 3개월간의 과정에서 매일 가족들이 도장에 와서 정성드리고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나태한 신앙을 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상제님의 대도를 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였던가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게다가 수호사님 이하 다른 포감님들이 모두 도장이전을 위해 정성드리는 것을 보면서, 힘들 것이라고 쉽게 예단했던 문제들이 다 풀려나가는 과정도 지켜보았습니다.
 
 이제는 책을 다 읽은 성도님들도 도장에 공부하러 오는 것을 보니까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말로 나보다 더 나은 준비된 신앙인들이 들어왔을 때 부끄러운 선배 신앙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많은 교육과 발표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장에서 간부들이 진리를 전하는 발표를 들으면서, 그분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내가 강사가 되어 발표한다는 심정으로 교육에 임하고 있습니다.
 
 포항 상원도장은 분위기가 너무 좋아 예전의 도장 분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며, 이젠 성도님 모두가 ‘내가 도장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도장 행사에 임하고 계십니다.
 
 포항 상원도장은 부부신앙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도장에 부부가 자녀들과 같이 나오는 분이 많은데, 아직도 몇몇 성도님들 중 남편이나 혹은 부인의 반대로 신앙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하루 빨리 그분들이 가족을 입도시키고 편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신앙하기를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께 도장 성도님들 모두 함께 심고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님들이 모두 지속적으로 개벽책 판매와 상제님 진리의 전달에 애쓰고 계신데, 저 또한 주위의 지인과 특히 부모형제 가족이 상제님 진리권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진리를 전해야 할 사람들에게 때를 놓친 일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릅니다.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의 진정한 일꾼이 되려면 기필코 육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먼저 개벽시키고 세상의 조소를 이겨내 반드시 도를 전하겠습니다. 다짐하는 바, 필히 육임을 짜겠습니다.

기적적으로 만난 상제님의 진리,
 이 양보할 수 없는 필생의 과제를 소중히 받아안으며
 
임상만(43세)/ 도기 132년 8월23일 입도

 
 불초한 인생의 명을 받아
 저는 어릴 때 영도다리와 태종대 바다를 굽어보는 부산 좌천동 산꼭대기 판자집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5살 경에는, 둥근 돔형의 공장건물을 넋 놓고 바라보며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었습니다. 그때 공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지붕 주위에는 사람 형상의 시커먼 물체가 있었는데, 그 장면이 마치 지옥세계의 형벌을 연상케 하여 “나쁜 짓 하면 저런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이셨습니다. 외근이 잦았고 철야 근무도 많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의 뼈를 에이는 생고생을 가슴속에 피눈물로 느꼈습니다. 바다보다 넓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으리라, 갚으라’ 마음깊이 생각하면서도 못난 인생살이로 깊은 한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결혼을 하고 둘째 자녀가 태어난 몇 달 후, 2년여의 치매증세로 기동하지 못하시다가 결국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나셨습니다. 못다 푼 불효의 한 때문에 지금까지 가슴이 저며옵니다.
 
 
 참신앙과 참진리를 찾아 헤맨 젊은 시절의 열정을 가슴에 묻고
 철이 들기 시작하던 중·고교시절 친구들 따라 교회를 다니며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를 거쳤습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 인생살이 과정의 생노병사의 고뇌 고통 번민 등 풀지 못할 의문, 불만, 욕구 등이 혼재되어 그 당시 저는 암울하고 고독한 어린 염세철학자가 되어갔습니다.
 
 삶의 의미도, 신의 존재도, 공부의 필요성도, 모든 것이 내게서 멀어져만 가던 고3 졸업시기에 신앙촌이라 얘기하는 ‘전도관’을 만났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습니다.
 
 고3 예비고사시험 이틀 전날 그 사람을 만났는데, 왜 그리 측은하고 애처로운지…. 불쌍한 고아를 보듬는 것 같은 심정이 들더군요. 호랑이가 아이로 변해 품에 안는 꿈을 꾸고 그 꿈이 정말로 현실 같은 생생한 느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험 전날, 수요일 밤인가 교회의 십자가 빨간불이 눈에 띄길래 머리도 식힐 겸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전도관’(기독교 신흥교파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 믿는 목적 등 ‘구원’의 문제 등을 감명 깊게 듣고 다음날 시험도 대충대충 치룬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군 입대할 때까지 거기서 전도사 수업을 거치는 등 열성으로 ‘영생’의 교리를 현실성 있는 신앙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3년 군 제대후엔 실력있는 목회자가 더 인정받는다는 판단 하에 경주의 동국대학교에 진학하여 불교를 접하고, 원불교와 천도교, 대순진리 등을 조금씩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공은 경영학이었으나 ‘인간경영’에 뜻을 두었습니다. 자유로운 사유와 종교 섭렵에 매두몰신하며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단학과 단식도 경험하게 되었고, 웬만하면 평생을 혼자 살며 인생의 풀지 못한 과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독신주의를 원하였으나, 홀어머님의 집요한 간청과 성화에 못이겨 9년 연하의 재필(才筆)을 3년간 사귄 후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10여년 전의 인연이 또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승리제단-이슬성신, 감로우, 이긴자, 의인 14만 4천의 무리들”이라는 예전에 많이 보고듣던 귀에 익은 단어들이 처가인 순천대학교 구내 게시판과 버스터미널의 담벼락에 큰 글씨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글씨들이 내게 다가온 것입니다.
 
 순천의 송광사 여름수련회에 참석 후 어떻게 변모,변화했는지 궁금해서 자발적으로 찾아가본 그곳에서 활력이 느껴졌고, ‘죄와 마귀, 사탄’ 등을 치를 떨듯 미워하고 배척하는 ‘의’로움과 ‘선’을 추구하는 신앙자세가 맘에 들었습니다.
 
 그후 1,2년 동안 관심을 갖고 참여하다가 세속의 경제생활 문제가 더욱 다급한지라 세상살이로 완전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온 내 인생, 상제님 진리를 만나 성공을 예감하며
 1남 2녀의 자식을 두고 평범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에 나 자신을 묻고 하루하루 생업에 충실하며 -마음의 의지처, 그 고향은 마음 속에 뭍어두고 아련한 갈망과 비원만을 간직한 채- 참신앙으로 참인간이 되려고 애써왔습니다. 언제나 베풀기를, 남 잘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개 범부, 소시민으로 살아가다가, ‘다단계사업’(일명 네트워크 마케팅)에 몸을 담았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동창인 이수윤 교정님을 통해 참하나님이신 상제님 진리의 도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이제야 몽매간에도 잊지 못할 사랑하는 어머님을 조우하고 후천선경의 무궁한 복록을 같이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집사람이 용하다는 어느 점집에서 점을 보고 와서 한 말 중에 “당신에겐 소운도 있고, 대운도 있대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고 보니 이제사 세상살이의 소운과 후천 5만년의 너무나도 엄청난 대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업의 완성을 위해 서로 상생해가는 이 사업을 필생의 과제로 알고 있습니다. 대경대법한 상제님 진리의 법방대로 순종하며 잘 신앙하여 진인사대천명하는 성공인이 될 것입니다. 목숨과 생명을 전부 걸고서 남아대장부, 헌헌장부의 삶을 훌륭히 살아내고자 합니다.
 
 나의 삶이 내 개인 한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분을 잘 소화해내서 훗날 칭찬받고 느긋한 웃음을 띨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승자(勝者)가 되고 싶습니다. 도문의 여러 성도님들과 살릴 생(生)자를 손에 쥐고, 억조창생을 널리 건져 다같이 후천선경에서 홍복(洪福)을 누릴 도성덕립(道成德立)의 그 날을 향해 일로매진 하렵니다.
 참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이시여, 생명의 어머니이신 태모 고수부님이시여! 굽이 보살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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