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해원상생 주창한 증산도

2010.03.08 | 조회 4101

國寶 제62호 金山寺 미륵전


母岳山은 혁명사상과 저항정신 배태하는 子宮이었다



미륵신앙의 근본 道場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母岳山 金山寺(모악산 금산사)는 우리나라 彌勒(미륵)신앙의 根本道場(근본도량)이다. 석가모니가 現世(현세)의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라면 미륵은 먼 훗날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다. 불교적 메시아(救世主)를 기다리는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함께 들어왔다.


金山寺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한다. 이런 금산사의 중심 金堂(금당)이 국보 제62호 彌勒殿(미륵전)이다. 미륵전에는 미륵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웬일일까? 미륵신앙의 본거지인 모악산이 우리 역사상으로는 혁명사상이나 저항정신을 배태하는 子宮(자궁)이 되었다.


필자는 甄萱(견훤), 鄭汝立(정여립), 全琫準(전봉준), 姜甑山(강증산) 등의 역사인물을 취재하기 위해 모악산 일대를 이미 여러 차례 답사한 바 있다. 모악산이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혁명가나 종교가들의 基地(기지)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미륵사상이야말로 소외받은 백성들에겐 福音(복음)이었다. 민초들은 변혁을 꿈꾸며 미륵의 下生을 기다렸다. 이런 시대적·공간적 환경에서 혁명가나 종교가들은 미륵을 자처하거나 혹은 숭봉함으로써 민심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뿌리에는 眞表律師(진표율사)가 있다. 眞表律師는 금산사 미륵신앙의 開宗祖로 존숭되고 있다. 그러나 금산사의 창건 시기는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금산사는 백제의 29대 法王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처음부터 이름난 규모 있는 사찰은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시기로 접어들자 이런 금산사에 신라의 고승 崇濟法師(숭제법사)가 등장했다.


開祖 眞表律師는 신라의 政策 승려인가

그는 金堤 萬頃(김제 만경) 출신의 백제유민인 眞表를 제자로 발탁하여 당대 최고의 律師로 키웠다. 그렇다면 眞表율사는 누구인가? 다음은 三國遺事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12세의 나이로 입문하여 11년 만에 부안의 不思議庵(부사의암)에서 三業을 닦고 亡身懺(망신참)으로써 戒(계)를 얻고 지장보살로부터 淨戒(정계)를 받았다. 그러나 뜻이 慈氏(자씨=미륵)에 있었으므로 변산의 靈山寺(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부지런히 정진한 바 다시 미륵으로부터 占刹經(점찰경) 두 권과 證果(증과)의 簡子(간자) 189개를 받는다>


亡身懺은 자신을 학대하여 참회하는 수행방식이다. 眞表律師는 무릎과 팔이 부서져 피가 바위에 뿌려지는 修行(수행)을 했다. 證果는 修行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이고, 簡子는 占(점)을 치는 대쪽이다. 이 簡子는 후일에 釋聰(석총)이란 승려에 의해 고려 태조 王建에게 전해졌다는 바로 그 佛寶(불보)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簡子 189개 중 2개는 미륵불의 손가락 뼈라고 한다. 다음은 이어지는 금산사 重創(중창)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景德王(경덕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租(조) 7만7000석을 주었으며 왕비 등도 계품을 받고 비단 500端(단)과 황금 50량을 시주하니 眞表律師는 모두 받아 여러 山寺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眞表律師는 금산사에 머물며 점찰법회를 통해 미륵신앙을 전파하고 金山寺를 대가람으로 펼쳐 놓았다. 점찰법회란 윷놀이를 연상케 하는 대쪽(簡子)을 던져 그 결과를 보고 참회하는 법회다. 그러나 眞表율사의 역할에 대해 모악향토문화연구회 崔洵植(최순식·금평새마을금고 이사장) 회장은 기존의 통념과는 좀 다른 해석을 했다. v


『663년까지 지속된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 후 모악산은 백제 유민들의 신앙적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시기에 신라의 고승 崇濟법사가 모악산에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眞表율사는 崇濟법사로부터 戒를 받고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저항했다고 전해지는 부안과 변산지역에 가서 사생결단의 구도활동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금산사를 크게 중창했습니다. v 이어 그는 삼국시대를 통해 국경분쟁이 가장 치열했던 충청권의 중심지 보은의 속리산에 출현했고, 다시 금강산까지 진출하여 鉢然寺(발연사)를 세우고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眞表율사 개인의 신앙적 포교활동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 조정의 정책적 배려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선무적인 포교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崔선생의 해석은 논리적이었다. 만약 백제 유민 출신인 眞表율사가 백제 유민들의 저항적인 미륵신앙에 동조하는 승려였다면 금산사의 대대적인 중창은 불가능했을 것은 물론 포교활동조차 견제당했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조정이 백제 유민의 저항적 미륵신앙을 체제에 협조적인 미륵신앙으로 순화시키기 위해 眞表율사를 정책 승려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야 어떻든 통일신라는 五敎九山을 개설하면서 모악산 금산사에 法相宗(법상종)을 開宗하여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삼았다. 고려 文宗 33년(1079) 慧德王師(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한 이후 더욱 큰 불사를 일으켜 금산사는 88당 711칸의 大가람이 되었다.



鄭汝立이 鄭氏왕조를 꿈꾸던 基地


金山寺는 전주시와 김제시의 접경을 이루는 모악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전주 시내로부터 가려면 712번 지방도로를 통해 모악산 서북쪽 기슭에 있는 歸信寺(귀신사) 옆을 지나 금산사로 들어오는 것이 지름길이다. 전주종합터미널에서 오전 6시20분부터 오후 8시5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금산사行시외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초행자들은 호남고속도로의 金山寺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는 길이 찾기 쉽다. 여기서 교통표지판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리면 금산 쌍룡을 거쳐 곧장 금산사 입구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새로 닦인 널찍한 도로여서 편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그러나 권하고 싶은 코스는 金山寺 인터체인지에서 院坪(원평)까지 내려와서 원평우체국 쪽으로 꺾어 金山상업고교 앞을 지나 金坪(금평)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는 옛길이다. 여기엔 역사의 현장이 많다.


금평저수지 앞에서 잠시 하차하여 둑 위에 오르면 2등변 삼각형의 帝妃山(제비산: 높이 약 300m)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다. 제비산엔 호남의 恨(한)과 怨(원)이 서려 있다고 한다.


건국대 申福龍(신복룡·정치학) 교수는 제비산을 「호남의 抵抗史(저항사)에서 나타난 클리토리스(陰核)」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매우 민감했던 곳이라는 뜻이다. 생김새도 그러하다.


제비산은 조선왕조 중기의 급진혁명가 鄭汝立(정여립)이 살면서 역성혁명을 기도하며 무장집단을 길렀던 곳이다. 아직도 그의 집터에는 당시의 축대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


鄭汝立은 전주 南門 밖에서 태어났다. 諸子百家(제자백가)에 통달했던 그는 1570년 文科에 급제하여 栗谷 李珥(율곡 이이)의 門人이 되었으나 栗谷의 사후에 東人의 강경파 李潑(이발) 등과 친교를 맺고 西人 비판의 선봉에 섰다가 宣祖(선조)의 미움을 받고 낙향하여 제비산을 근거지로 삼아 金溝(금구)-院坪 일대를 중심으로 大同契(대동계)를 조직했다.


大同契의 무력으로 丁亥倭變(정해왜변) 때 왜구를 무찌른 그의 위신은 편지 한 장으로 인근 고을 수령들이 다투어 군량을 댈 만큼 높아졌다. 그는 전국의 奇人謀士(기인모사)를 포섭했다. 鄭鑑錄(정감록)을 이용하여 「木子亡 奠邑興」(목자망 전읍흥)이란 讒說(참설)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했다. 木子는 李, 奠邑은 鄭의 破字(파자)다. 李씨 왕조가 망하고 鄭씨 왕조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또한 「天下는 公有物(공유물)」이라면서 전제왕정을 비판했다. 모두가 동등한 大同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鄭汝立은 「英國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전라도와 황해도의 大同契 私兵(사병)들을 동원하여 서울 都城을 남북에서 협공하여 두려뺀다는 시나리오도 준비했다. 그러던 1589년 鄭汝立 일당을 체포하여 거사계획을 자백받았다는 황해도 안악군수 李軸(이축)의 급보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鄭汝立을 체포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급파했다. 그러나 그는 한 발 앞서 진안 竹島(죽도)로 도피했다. 은신처에서 그는 관군에게 포위되자 자살했다(피살설도 있음). 鄭汝立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己丑獄死(기축옥사)로 인해 東人 1000여 명이 피의 숙청을 당했다. 그후 조선왕조는 호남을 逆鄕(역향)으로 격하, 호남인의 등용을 제한했다.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全琫準의 활동무대

모악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상을 크게 한 번 바꿔보려고 했던 인물은 鄭汝立뿐만 아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全琫準(전봉준)의 활동무대도 모악산 아랫마을인 院坪이었다.


全琫準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院坪에서 약 1km 떨어진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황새뫼 마을에서 성장했으며, 거기서 2km 떨어진 김제시 봉남면 從政(종정)마을에서 서당공부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그의 본거지는 행정구역상 정읍이지만, 성장기의 생활권은 院坪이었다.


한양대 鄭昌烈(정창렬) 교수는 논문 「古阜(고부=정읍)민란의 연구」에서 1893년 금구·院坪 집회의 지도자는 金鳳集(김봉집) 또는 金鳳均(김봉균)이라는 가명을 썼던 전봉준이었다고 밝혔고, 그가 院坪 집회를 계기로 정치적 역량을 크게 키워 1894년 갑오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어가게 되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기축옥사 이후 모악산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왔던 미륵신앙과 참위신앙의 잠재 세력들이 동학의 人乃天(인내천), 즉 「사람이 바로 하늘이다」는 사상을 만나자 院坪장터를 중심으로 大활기를 찾게 되었다.


全州和約(전주화약) 직후 全琫準은 원평에 와서 執綱所(집강소)를 설치하고 호남 일대를 호령했다. 그러나 갑오년 9월의 再봉기 때 全琫準이 지휘한 농민군 2만명은 公州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그는 院坪으로 물러나 최후결전을 시도했으나 참패하고 혁명전선의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解寃相生 주장한 甑山敎 교주


피를 피로 씻은 동학농민전쟁은 새로운 종교 하나를 뜨게 했다. 그것이 모악산 자락을 聖域(성역)으로 삼는 甑山敎(증산교)다. 교주는 20代의 나이로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탐관오리의 횡포, 억울한 농민들의 봉기, 원한의 복수와 살육 등 민란의 비참한 현장을 목도한 姜一淳(강일순)이었다.


甑山은 姜一淳의 號인데,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승지인 黃土峴(황토현)에서 10리 떨어진 그의 생가(井邑市 德川面 新基里) 앞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증산교 경전에 따르면 그는 「金山寺 미륵불의 現身(현신)」을 자처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역할을 선언했다.


『모든 人事가 道義에 어그러져서 寃恨(원한)이 맺히고 쌓여 三界(삼계)에 넘침에 마침내 殺氣(살기)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이제 내가 天地都數(천지도수)를 뜯어 고치고 神道(신도)를 바로잡아 萬古(만고)의 寃(원)을 풀고 相生(상생)의 道로써 仙境(선경)을 열고 造化(조화)정부를 세워 하염없는 다스림과 말 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화하여 세상을 고치리라』


姜甑山은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불교계에선 어떻게 생각하든 증산교 교인들은 金山寺를 그들의 聖域으로 삼고 있다. 미륵전의 미륵불상을 증산교 교주의 化身으로 믿기 때문이다. 姜甑山은 생애의 마지막 9년 간을 모악산 줄기인 제비산 옆 동네에서 살았다. 금산사 밑 2km 지점의 삼거리에서 700m쯤 떨어진 곳이다.


제비산 옆을 지나 1.5km쯤 더 들어가면 상가와 여관 마을이 있다. 모악산 줄기들이 에워싼 아늑한 분지다. 이곳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냇물을 건너면 금산사를 지키는 石城(석성)의 홍예문과 마주친다. 「甄萱(견훤)성문」이라고도 불린다.



견훤王이 유폐되었던 失意의 현장


견훤은 서기 900년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전주에 입성하여 『百濟(백제)의 忿怨(분원)을 씻겠다』며 후백제를 세웠다. 그는 금산사의 미륵을 받들었다. 금산사의 寺誌(사지)에는 「寺는 甄萱王의 崇奉(숭봉)한 바 一新 重創(일신중창)을 得(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은 901년에 泰封國(태봉국)을 세운 弓裔(궁예)와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다. 918년 泰封國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륵불을 자처하던 弓裔가 축출당하고, 王建(왕건)이 高麗(고려)를 창업했다. 이후 王建과 甄萱의 라이벌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935년 후백제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金剛(금강)을 후계자로 지목하자 장남 神劍(신검), 차남 良劍(양검), 삼남 龍劍(용검)이 이찬 能奐(능환)과 짜고 아우 金剛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다. 장남 神劍이 왕위에 올랐다.


아들들에게 반역을 당한 견훤은 억장이 무너졌을 터이다. 그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영토 羅州(나주)로 망명했다. 고려 태조 王建은 곧 장군 庾黔弼(유금필)을 羅州로 급파하여 海路(해로)를 통해 견훤을 開京(개경)으로 모셔가 尙父(상보)로 우대했다.


이듬해인 936년 고려 太祖는 10만여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고려·후백제 양군은 一利川(일리천:오늘의 경북 구미)의 낙동강 상류에서 결전을 벌였다. 一利川전투에서 甄萱이 逆子(역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선두에 서는 바람에 후백제군은 대번에 사기가 떨어졌다. 神劍 등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伐谷面(벌곡면)까지 도주했다가 고려 太祖의 軍門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후삼국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甄萱의 심사는 몹시 우울했을 터이다. 회군 길에 오른 甄萱은 갑자기 등창이 터져 황산벌의 절에서 급사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태조 王建은 후백제 유민들의 저항을 의식해서인지 그가 후대 왕에게 남겨놓은 訓要十條(훈요십조)에서 車峴(차현) 이남에서의 人材등용을 막았다. 車峴 이남은 망국 후백제의 통치지역을 말한다.


견훤성문에서 잘 다듬어진 산행로를 따라 400m쯤 들어가면 일주문이 있다. 입장료는 2600원. 여기에 「母岳山 金山寺」라는 가로 편액이 걸려 있다. 좀더 들어가서 계류 위에 걸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金剛門과 四天王門을 차례로 만난다. 그 오른편으로는 천 몇백년의 세월을 지켜온 幢竿支柱(당간지주)도 보인다.


다시 中門인 保濟樓(보제루)의 누각 아래 진입로를 지나면 넓게 트인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북쪽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5층석탑이 올라 있는 방등계단이 보인다. 방등계단은 受戒(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그 아래로 서향한 3층 殿閣이 금산사의 중심 金堂인 彌勒殿이다.


1층 처마 밑에는 「大慈寶殿」(대자보전), 2층에는 「龍華之會」(용화지회), 3층에는 「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모두가 미륵신앙의 도량임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전은 丁酉再亂(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탔다. 임진왜란 때 金山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승병장 處英(처영)의 僧兵부대의 활약에 대한 보복이었다. 金山寺의 전각 등 건물 80여 동과 모악산 내 암자 40여 개가 전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미륵전은 仁祖 13년(1635)에 중창된 것이다.


彌勒殿의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규모가 큰 데다 상부의 遞減(체감)이 큰데, 이것이 안정감을 주는 비결로 보인다. 불당을 세우기 위해 큼지막한 화강석으로 基壇(기단)이 마련되었고, 그 위에 막돌 초석을 올려 놓았다.


여덟 팔(八) 자 모습의 팔작지붕이다. 겹처마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각 층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들은 雲工(운공) 조각 등으로 치장했고, 우측 처마 밑에는 龍頭 조각이 돌출해 있다. 그리고 그 밑의 벽면에는 불교의 여러 설화를 묘사한 벽화들로 채워져 있다.


겉모양은 3층이지만 속은 하나의 공간으로 확 트인 통층이다. 높이 12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삼존불을 안치하기에 알맞다. 현재 봉안되어 있는 미륵삼존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金復鎭(김복진,1901∼1940)의 작품이다.


金福鎭은 일본 東京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소설가 八峰 金基鎭(팔봉 김기진)의 형이기도 한 그는 항일운동을 하다 두 차례에 걸쳐 5년8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법당 안에 스며든 빛이 삼존불의 얼굴에서 반사되어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2층과 3층의 정면 낮은 벽에 채광창을 둘러서 바깥의 빛을 받게 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를 깔아 예불공간을 만들었다. 3층까지 이어진 高柱는 모두가 서너 토막의 아름드리 나무를 철물로 두르고 감아 단단하게 엮은 것이다.



최고의 피서지 金山寺


金山寺에는 국보 제62호 미륵전 이외에 보물 10점이 있다. 불볕 더위 아래 石蓮臺(석연대:보물 23호), 石鐘(보물 26호), 6각다층석탑(보물 27호), 당간지주(보물 28호), 大藏殿(대장전:보물 827호), 石燈(보물 828호) 등을 둘러보았다.


이 날 기온은 34.5℃까지 올랐다. 이마의 땀이 눈에 흘러들어 눈알이 쓰릴 정도였다. 처음 일주문으로 들어설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그 밑의 계곡으로 직행했다. 바지를 동동 걷어붙이고 시원한 계곡물에 무릎까지 첨벙 쑤셔 박았다. 곧 오장육부가 다 시원해졌다.


1시간이 지나고 다시 30분이 흘렀다. 휴대폰이 걸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모악향토문화연구회 崔洵植(최순식) 회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원평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崔선생은 5년 전 필자가 鄭汝立의 행적을 취재할 때부터 자주 신세를 진 분이다.


崔선생과 필자는 모악산 자락의 음식점 「산천초목」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다시 자리를 정읍시 감곡면 청원여관으로 옮겼다. 지번은 그렇지만 가랑이만 벌리면 김제시와 정읍시의 관할구역에 한 발씩을 둘 수 있는 경계지역이다. 여기서 밤 늦도록 崔선생으로부터 金山寺 일대의 저항사와 미륵신앙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7월28일 아침 6시 눈을 뜨자 필자는 다시 金山寺로 향했다. 鄭汝立의 제비산, 姜甑山의 동곡약방, 그리고 이른 아침 햇살 속의 彌勒殿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母岳山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적 속의 산세는 과연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고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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