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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4부

2018.09.10 | 조회 152 | 공감 0

 
<진행>지난 시간 일제의 종교 정책과 보천교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제주 법정사 봉기와 독립자금 발각으로 보천교가 일제에 저항한 일련의 운동 뒤에 곧이어 3.1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민족종교를 다루는 방법이 달라졌다고 하셨는데요.

Q.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교묘해졌나요?

 

<김철수 교수> 교묘해집니다. 이전에는 탄압이 주를 이루고 있다가, 민종종교도 등록하면 종교로 변경시켜 주겠다. 포교 규칙도 완화시키겠다. 이런 회유책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보천교도 1922년 등록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등록을 한 다음에도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월곡 차경석에 대한 체포령도 풀지 않습니다. 그대로 진행시키죠. 이건 보천교에 대한 탄압이 교묘해지고 강화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보천교라는 교명인데요. 1921년 9월 24일 황석산 고천제 때 교명은 보화라 하였으나, 등록할 때는 보천교라는 명칭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진행자> 교단 공개를 통해 공개포교를 하면서 대내외적으로 공신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조직이 훤히 드러나면서 일제가 보천교를 손바닥 보듯 통제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참 교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이때부터 보천교는 대외적인 행사나 공식적인 활동을 많이 하게되나요?

<김철수 교수> 네, 보천교가 교단을 공개하고 난 다음에 많은 사업을 하는데요. 사실 공개한 직후 바로 이러한 사업들을 생각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준비하던 내용이라 보여집니다.

 

보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월간지<보광普光> 발행 및 출판사 <보광사> 설립

 

 

 

조직에서는 부인방위 조직도 만들어내고, 민립대학설립운동도 진행을 합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 1920년대 초 조선인 실력양성을 위한 대학교 설립 운동

 

거기에 정읍대흥리에 보흥여자사립수학을 설립해서 운영을 직접하고 있죠. 남자도 아닌 여자학교를 만들어 여성인재들을 길러내는 활동도 하고 있었다는거죠.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있었고, 기산조합을 만들어 일본상품을 불매운동한다던가 이런 운동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보천교 청년단, 보천교 소년회 등을 조직하여 운영하는 등 수많은 사업을 합니다.

 

 

그래서 1924년에 이러한 활동들과 관련해서 식민권력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보천교 고민과 활동이라는 보고서인데요. 1924년에 접어들면서 보천교가 쭉 민족운동을 하다가 약간 침체되는 그 시점이 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천교 간부들이 모여 세가지 방향으로 이야기 합니다. 3.1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을 기획, 만주방면으로 아예 이주하여 거기서 독립운동,  성전신축을 하고 사회사업시설들을 운영. 이런 고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고민들이 채택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식민권력의 단속때문이죠. 눈을 뜨고 계속 감시하고 있는 이상 3.1운동과 같은것, 만주이주 이런게 쉽지않았다는거죠.

 

성전신축의 경우 1924년에 고민을 하고 1924년, 25년 거치면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1929년에 완공이 됩니다.

 

 

그리고 생각해봐야 할 대중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데요. 1923년에 서울 진정원(경성 진정원)에 불온문서 사건이라는 파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냐면 1923년 9월 1일이 되면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관동대지진 - 1923년에 일본 관동에서 일어난 큰 지진. 일제가 사회불안을 악용하여 우리 동포들을 대거 학살

 

대지진이 일어나니 일본도 사회가 불안하고 우리도 사회가 상당히 불안합니다. 이러한 불안한 때를 타 가지고 뭔가 일을 도모해 보고자 한 사건이 바로 이 불온문서 사건인데요. 어떤 선전문을 인쇄해서 이걸 배포하려던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게 성공하지 못하고 전부다 적발됩니다.

 

 

이 선전문을 보면 이런 용어가 나옵니다. 도이왜적의 제도라는 말이있습니다. 도이왜적 섬나라 오랑캐 왜적이라는 표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표현을 쓴다는건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제국주의 도시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 기회로 우리도 뭔가 해보자 하는 그런 문서를 만들었다 체포된 사건입니다.


<진행자> 네, 참 다양한 활동을 펼쳤네요. 이 과정에서 일제가 의도한대로

Q. 보천교가 와해될 조짐이 보였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김철수 교수> 진행된 흐름을 보면, 처음에 일제가 제일 고민했던게 민족종교의 비밀포교였지만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죠. 그러다 결국 회유를 거듭해서 1922년에 등록을 하게 해서 이제 그 실체가 딱 드러난 겁니다.

 

실체가 드러나니까 여기에 일본의 탄압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습니다. 그 와중에 1924년에 접어들면서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 사건이 있습니다.
*시대일보時代日報 - 1924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일간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더불어 그 당시 민간 삼대지 중 하나가 시대일보인데요. 경영난에 처한 시대일보를 보천교가 인수하려는 그런 움직임을 보였죠. 인수를 하고 난 다음 여기에 엄청난 대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안그래도 1924년이라는 시점은 보천교에서 가장 논란이 되던 천자등극설이 유포되던 해입니다. 갑자년 천자등극설이라고 하는데요. 1924년이 되면 보천교의 교주가 천자로 등극할 것이다는 설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만, 차경석도 이것 때문에 원통해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냐' 천자등극설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부정을 하죠.

 

천자등극설이라는건 어떻게 본다면 당시 식민권력과 언론이 만들어낸 하나의 왜곡이며 탄압을 하기위한 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보천교 내부에서도 새로운 나라 건설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건 아니라는 거죠. 그런 시점에 시대일보 사태가 터집니다.

 

당시 언론과 온 지식인들이 다 나서서 보천교를 성토하게 되죠. 그래서 이 해 9월 쯤 되면 서울에 있는 기독교회관이 있습니다. 그쪽 회관에서 보천교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보천교 박멸운동이 전개가 됩니다.

 

이와 더불어 보천교 내부적으로도 혁신운동이 대두가 되는데요. 보수와 혁신 세력이 대두가 되며 내부갈등으로 격화 됐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당시 일제 식민권력의 보고서들을 보면, 내부의 보수와 혁신 대립구도에 대한 보고 분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왜 분량이 많은지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거죠. 보천교에 대해 할 다른 이야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비밀보고서들은 내부 갈등을 아주 격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천교에서도 이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하죠. 조직같은 경우도 60방주제를 나중에 되면 보천교 남북 양측으로 나눕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 나누어 조직을 운영하다가 아니다 해서 60방주제로 돌아오는 등 조직에 변화를 주어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진행자> 일제의 의도적 부풀리기였다 볼 수 있겠네요. 교단을 세상에 공개하자마자 내분이 일어났으니 일제가 그 기회를 놓칠리 없었을 텐데요. 그런데 이 분열을 가속화시킨 사건이 또 있었다고 하죠.

 

Q. 보천교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시국대동단 사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김철수 교수> 보천교가 1924년을 거치면서 상당히 침체의 늪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고민이 많고 어떻게 해 나가야하나 생각하게 되죠.

 

그런 고민에서 나왔던 3가지 정책들이 시행이 안되고, 그 대신 보천교에서는 주요간부들을 일본 동경으로 보내서 보천교의 취지를 한번 설명하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동경을 방문하게 되죠.

 

동경을 방문해서 총독으로 오게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일본쪽에서 제시한게 뭐냐면 '시국광구단'을 만들어 총독정치를 홍보하는 연설회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라. 그러면 우리도 지원해주겠다 그런내용입니다.

 

그렇게해서 이 내용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차월곡 선생은 시국광구라는 말은 그렇다. 우리 주의가 대동이니까 '대동으로 해라' 해서 시국대동단을 만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1925년 1월부터 6월정도 한 6개월간 이걸 운영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몇 번 하다가 하도 일반민중들과의 갈등이 생겨 하지 않게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를 해야되는 점을 말씀드리면, 차월곡 선생이 시국대동단이라 얘기하고 이걸 어떻게 운영을 하고 어떻게 조직을 해라 하는 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이 되면 차월곡 선생도 상당히 통탄합니다. 지시대로 되지도 않고, 보고도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시 친일단체가 있었습니다. '11연맹'이라 하는데 11개의 단체가 모여있는 조직인데요. 시국대동단이 결성되고 조직을 운영하는데 이 친일단체가 개입해버립니다.

 

 

보천교라는 명칭을 빌려 시국대동단이란 이름으로 돈을 받으며 전국을 다니며 강연회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게 당연히 일본의 정책들을 지지하는게 되다보니, 당시 조선민중들은 보천교박멸운동에 가담을 하며 보천교 성토대회가 여러 곳에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보천교입장에서는 친일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죠. 이건 철저하게 식민권력에 이용당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결국 일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거군요. 이 때문에 민족의식 선양과 대한독립의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업적은 역사속으로 묻히고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는데요.

 

Q. 보천교에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일제가 목표했던 것이죠?

<김철수 교수> 그렇죠 . 보천교는 식민권력이 의도한대로 1925년을 지나면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각종 자구책이 실패했던 것이죠.

 

 

그러다 1929년 정도가 되면 십일전이 완공되는데요. 그러면서 다시 차월곡이 천자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돕니다. 식민권력은 이를 빌미로 보천교 간부들을 전부다 체포하고 조사를 하게되는데.

 

여기에서 차월곡은 이제 교리까지 바꾸어 버리는 그런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희망을 주는게 아니고 오히려 보천교를 믿었던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후에 많은 보천교도들로부터 수많은 소송을 당하게 되죠.

 

그렇게 교단이 압수수색 당하는 상황까지 맞게 되고, 1936년이 되면 차월곡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식민권력은 보천교를 해산시킴과 더불어 보천교 본소 건물들의 흔적을 전부 삭제하려합니다. 매각을 하기 시작하죠.

 

보천교 본소의 십일전이라던가 여기에 사용되었던 자재들은 서울 조계사에 가고, 기와같은 경우도 청와대의 전시 경무대에도 갑니다. 완전히 흔적을 파괴했다 해버려도 과언이 아니죠.

 

 

여기서 여러분들이 곰곰이 생각해 볼게 뭐냐면 1936년 보천교 해체와 더불어 일제 식민정책에서 심전개발운동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사실도 주의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 - 1930년대 초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입안된 정신계몽운동

 

심전개발운동은 그때까지 있었던, 나머지 각 종교단체 지도자들을 모아, 안좋은 말로 사상개조죠. 조선민중들을 자기들 의도대로 한번 해보자. 그런 정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일제강점기 600만 신도를 자랑하며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또 민족의식을 선양했던 보천교가 일제의 교묘한 술책에 참 허망하게 와해되고 말았는데요. 이는 보천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민족 종교들 전체가 철저히 탄압받았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이시간을 정리하면서

Q. 보천교가 우리역사와 민족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김철수 교수> 연구자 입장에서는 할 이야기가 참 많은데요. 그래도 몇 가지로 한번 정리해 본다면 보천교라는 것은 일제강점기 시작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겁니다. 형성되기 시작했다는거죠. 얼마나 어려움이 컸겠습니까. 사면초가의 상황이었겠죠.

 

아예 만주로 나가던지 했다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자리매김이 됐을거라 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활동하다 보니까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다 보니 뭐 친일이니, 사이비니, 미신이니, 그런 낙인까지도 받게 되고요.

 

그래서 저는 보천교에 드리워진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굴레를 벗겨보자 하는데 상당히 이야기를 많이합니다.

 

 

식민주의적이라는건 친일이라는거죠. 친일의 굴레를 벗겨줘야 된다. 우리가 민족운동사를 연구하다보면 당시 어떤 기록들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파락호 행세를 했다.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독립운동에 기여를 하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했다 뭐 그런 기록들도 있듯이, 연구를 통해 그런 낙인을 벗겨줄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요.

 

제국주의적인 굴레라는 것은 종교와 유사종교라는 구분인데요. 흔히 사교 사이비라고 자꾸 이야기 하는데 그것들은 지나치게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민족종교를 바라보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벗겨주기 위해서 자료를 계속 보완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자료를 토대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물론 과가 없다는건 아닙니다. 그 공과 과를 다 같이 살펴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천교에 드리워진 굴레들을 벗겨주시면 좋겠다는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어떤 연구자는 보천교에 대해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에 대해 한푼도 준적이 없다. 그래서 친일이다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제가 이야기 했듯 실질적인 자료들에는 김좌진 장군에게 지원했다던가 임시정부와 관련됐다는 등 그런 자료에 근거해 그 굴레들은 충분히 벗길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똑같이 공동 죄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지금까지 교수님과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에 대해 말씀 나눠봤는데요. 이 책을 기회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보천교의 일제강점기 그 역할과 업적이 더욱 많이 드러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마무리>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가 패망당하고 나라를 잃은 민중에게 새 희망의 개벽사상을 불어넣어준 보천교. 하지만 일제에 의한 민족종교 말살 정책과 역사왜곡으로 그 찬란했던 역사는 사라져 망각되고 말았는데요. 이제 보천교의 참 역사를 찾아 그 정신과 실상을 드러내야겠습니다. 보천교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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