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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로 보는 1918년 스페인독감과 조선

2020.03.26 | 조회 8362 | 공감 0

1918년 조선을 휩쓴 스페인 독감



"일명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는 1918년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이던 1918년 봄에 발생하여 1919년 봄까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적게는 2,000만 명, 많게는 1억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역학적으로는 해당 기간 동안 크게 세 차례의 만연이 있었다. 식민지조선에서 1918년 독감 유행이 처음 인지된 시기는 2차 만연 시기였던 1918년 9월경이었다. 독감은 남만주철도를 타고 한반도 북부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가 공식 집계한 결과 독감 유행으로 식민지조선의 1918년도 추정 인구 17,057,032명 중 7,556,693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 가운데 140,527명이 사망하여 사망률은 0.82%였다. 그러나 실제 이환자와 사망자의 총수는 이보다 더 많았을 개연성이 높다.


1918년 당시 조선총독부 방역정책은 경무총감부를 중심으로 한 헌병경찰의 무단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독감의 원인이 규명되기 훨씬 이전이었던 탓에 독감은 법적인 규제 밖에 놓여 있었고 효과적인 방역 역시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무총감부는 헌병경찰의 호구조사를 통해 이환자와 사망자를 집계하는 데 급급했을 뿐 독감 유행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독감 방역 실패로 일상적인 죽음을 목격하게 된 한국인들은 무단정치 10년의 절망감을 분노로 표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 김택중,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 2017 





※ 매일신보 독감기사

부산일보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1917년에서1920년까지 발간한 기사중에서 '독감'을 보도한 기사 제목을 발췌했다.


독감을 풍사(風邪)라고 부름

"독감[風邪]" 부산일보[釜山日報] 1917년 12월 09일

"폭위[暴威]를 떨치는 풍사[風邪]의 신 스페인독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 풍사(風邪)

"풍(風)이라는 것은 모든 병의 시작이다.(風者, 百病之始也)" <생기통천론(生氣通天論)> "풍이라는 것은 모든 병의 우두머리이다.(風者, 百病之長也)" <옥기진장론(玉機眞藏論)> "풍이라는 것은 잘 옮겨다니면서 자주 변한다.(風者善行而數變)"[소문(素問)] <풍론(風論)> "풍이라는 것은 모든 병의 우두머리이다. 그 변화에 이르러서 이에 다른 병이 되는데 정해진 방향은 없지만 풍기(風氣)가 있다.(風者百病之長也, 至其變化, 乃爲他病也, 無常方, 然致有風氣也.)"



『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



1918년 10월, 학교와 군대에 유행

"목하유행目下流行하는 독감毒感은 조심하여야 한다" 1918년 10월 17일

"독감 각학교毒感 各學校를 침侵함, 각 학교에 결석자가 다수" 1918년 10월 19일

"병사 3백여명 한꺼번에 독감에 걸리다"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1일

"전조선全朝鮮을 석권席捲한 독감毒感은 세계적世界的 대유행大流行인가, 지독한 감기는 팔도에 편만" 매일신보[每日申報] 1918년 10월 22일

"독감毒感에 곤고困苦한 위생계衛生系, 독감이 더 심해" 1918년 10월 23일

"현재 유행하는 악성 독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3일


독감이 악성으로 변한다

"독감毒感은 악성惡性으로 변變한다, 감기에 걸리거든 의사를 보라" 1918년 10월 24일

"재통再痛은 극極히 위험危險하다, 독감은 까딱까딱하면 재롱(*새장 안에 있는 닭이란 뜻으로, 도망할 수 없는 처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 되고 재롱이 되면 목숨이 위태하다" 1918년 10월 25일

"독감환자毒感患者가 신열身熱에 띄여서 칼로 배와 목을 찔러서 자살을 하였다" 1918년 10월 25일


1918년 10월-경성(서울), 부산에서 유행

"독감毒感의 환자患者는 경찰警察의 조사調査만 칠천명七千名 본정 관내에만" 1918년 10월 26일

"경성 독감 격렬"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6일

"부산 악성 독감 대유행"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독감毒感, 각지各地에 창궐猖獗, 감기로 인하여 함원선의 공사가 정지되었다" 1918년 10월 27일

"남미연방南米聯邦 각도회各都會는 독감毒感으로 멸망滅亡될 지경地境, 매일 죽는 자가 수천명이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8년 10월 26일

"독일 병사 20만 스페인독감 대유행"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7일

"〈내외전보〉 유행성 독감과 독일군"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8일

"동경 독감 창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1918년 10월-학교와 관공서, 군대에 대규모 감염

"만주도 독감 대유행, 각 학교 휴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독감 유행으로 소학교 대공황"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유행하는 스페인 독감, 내무성 풍사[風邪] 훈령"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판전[坂田] 부인 스페인 독감으로 서거"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9일

"독감 대 창궐, 부산 각 학교 생도 1300여명 결석"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부산 우편국의 독감 예방"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고지[高知]연대는 모두 독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조선의 스페인 독감 수만명 감염"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종로관내鐘路管內만 이만육천二萬六千, 기막히게 많은 독감환자의 수" 1918년 10월 31일

"독감으로 진주소학교 휴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1일

"부산우편국도 스페인독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1일


1918년 11월-인천에서 하루에만 2천명 사망

"인천仁川도 사망자死亡者가 매일 이천명每日二十名" 1918년 11월 03일

"全世界를 襲한 毒感, 각 군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1918년 11월 03일

"死亡者가 半日에 十七名, 인천의 독감은 더더욱 창궐" 1918년 11월 04일

"유행독감流行毒感, 모조리 멍석말이" 1918년 11월 02일


독감 치료에 대한 글

"유행독감流行毒感에 효험效驗본 방문方文" 1918년 10월 27일

"유행성 독감에 관해서"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7일

"유행성 독감에 관해서(하)"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28일

"조선인朝鮮人에 사망자死亡者가 많은 이유는 치료를 잘 못하는 까닭이다" 1918년 11월 03일


사건 사고

"독감덕毒感德에 도적盜賊을 체포逮捕, 앓느라고 달아나지를 못하고 잡혔다" 1918년 11월 06일

"기도祈禱로 독감毒感을 고친다고 돈을 먹은 중놈" 1918년 11월 22일


1918년 11월-서울, 대구 등 대도시는 줄어들고 지역은 확산

"대구大邱의 독감毒感은 차차 종식되는 듯" 1918년 11월 06일

"각지독감各地毒感: 평안도平安道 각各 군郡에 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철도종업원鐵道從業員 칠천명이 결근"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공주公州 목포木浦에 창궐猖獗"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원산元山에는 일만 명 학생에게는 적다" 1918년 11월 09일

"김천金泉에도 독감, 우편국원은 전멸" 1918년 11월 06일

"각지各地의 毒感, 날이 추워질수록 점점 심해간다" 1918년 11월 07일

"독감毒感이 점차종식漸次終熄, 그러나 지방은 지금이 한창이다" 1918년 11월 08일


1918년 11월-인플루엔자균 발견

"독감毒感의 병원균病原菌, 북리연구소에서 발견, 인플루엔자" 1918년 11월 09일

"독감毒感의 유행균流行菌이라는 인플루엔자균에 대하여" 1918년 11월 10일

"여사如斯히 치료治療하라, 독감이 들거든 이렇게 조심하라" 1918년 11월 11일


독감 사망 계층

"경성京城에 독감毒感으로 사망死亡한 사람을 조사하여 본 즉 조선사람에는 하류에 제일 많다" 1918년 11월 12일


1918년 11월-서울, 부산은 안정세, 다른 지역은 확산

"경성京城의 독감毒感은 적이 침식沈熄, 죽는 자가 훨씬 줄어" 1918년 11월 12일

"경성京城의 독감毒感이 아주 종식終熄" 1918년 11월 18일

"병세 또 악화 ; 사망률은 더욱 상승, 독감유행"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2일

"아직 휴교, 독감과 관련하여"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2일

"출정군인出征軍人이 독감毒感에 고생苦生, 거의 다 앓는다고" 1918년 11월 13일

"독감毒感의 유행流行과 우편국郵便局의 고난困難, 전멸된 곳이 많다" 1918년 11월 14일

"독감毒感으로 인因하여 수확收穫이 극난極難, 손해가 비상하다"1918년 11월 16일

"삼수三水의 독감毒感, 군수가 죽었다" 1918년 11월 19일

"휴업중의 각교 수업개시, 독감환자 감퇴"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9일

"독감毒感의 종두법種痘法, 한 번 주사로 면한다, 미국의 신발명" 1918년 11월 20일

"강진康津의 독감 사람이 많이 죽었다" 1918년 11월 22일

"인천仁川에는 반수半數, 인천의 독감조사 무서운 그 수효" 1918년 11월 25일

"독감毒感의 참화慘禍를 받은 진주晋州, 사망자가 천여명" 1918년 11월 26일

"전독제前獨帝도 윤감輪感으로 고생하는 중이다" 1918년 11월 29일


1918년 12월-각 지역 사망자

"사망자육백여명" 1918년 12월 02일

"서산 일군에만 팔만명의 독감환자가있고 예산 홍성서도 야단" 1918년 12월 03일

"독감의 사망자 오만명" 1918년 12월 04일

"바람의 신(유행성 독감) 동북으로"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2월 05일

"일가一家 3일 몰사, 독감에 걸려서" 1918년 12월 06일

"독감경과후毒感經過後의 정황을 조사중" 1918년 12월 09일

"독감毒感의 산출産出한 비극悲劇, 네식구가 죽고 가장은 미쳤다" 1918년 12월 12일

"달성 독감 사망자 수"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2월 14일

"〈내외전보〉 미군 독감[感冒] 창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2월 15일

"전남 강진에는 독감환자 사만칠천" 1918년 12월 18일

"독감으로 죽은 자 600만인"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2월 28일

"대판大阪에 독감복발毒感復發, 매일 평균 이십인" 1919년 01월 19일

"일촌一村의 주민住民이 몰사沒死되었다, 독감을 앓는 중에 교통이 막혀서" 1919년 01월 31일


1919년 2월-두 번째 유행(일본)

"유행전流行前에 예방禮防하라, 내지(*일본)에서는 이 독감의 두 번째 유행에 죽는 사람이 많다 한다" 1919년 02월 05일

"검병호구조사檢病戶口調査, 독감예방을 위하여" 1919년 02월 10일

"유행성독감流行性毒感, 경성에는 없는 모양, 동경서는 창궐 중" 1919년 02월 13일


1919년 2월-독감예방과 치료

"독감치료신법毒感治療新法, 사람의 피를 주사"1919년 02월 13일

"생명보험生命保險의 공황恐慌, 유행독감으로 지불된 보험액이 일본 전국을 통계하면 삼백만원" 1919년 02월 14일

"유행성독감流行性毒感, 한 면 내에 일백칠십팔명이 있었다" 1919년 02월 17일

"유행독감流行毒感의 역사歷史, 유행감기의 징후와 예방법" 1919년 02월 22일



1919년 11월-세번째 유행

"맹렬猛烈한 상해上海의 악감惡感, 더욱 퍼지기 시작하였다" 1919년 11월 16일

"독감毒感 우복又復 유행流行" 1919년 11월 20일

"불독감정험악佛獨感情險惡" 1919년 12월 21일

"유행성독감流行性毒感에는 실섭失攝(*몸조리를 잘 하지 못함)과 강작强作(*억지로 함)이 화근禍根, 좀 나은 뒤라도 실섭하면 위험, 일가전멸의 원인은 대개 이것" 1919년 12월 24일


1920년 이후 간헐적 유행

"최씨의 篤志, 독감환자를 거저 고쳐" 1920년 01월 03일

"김씨 施藥救濟, 독감에 걸린 빈곤자를 위하여 구제하였다" 1920년 01월 16일

"신의주 독감, 길어도 이주일 사흘이면 낫는다" 1920년 09월 29일

"유행독감流行毒感 방어책, 이 여섯가지 주의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필요(共濟醫院長 劉洪鍾氏談)" 1921년 01월 13일

"독감환자毒感患者 5千人, 요사이 같이 일기 분순한 때에, 각각 감기에 걸리지 말기 주의" 1922년 02월 03일

"전남지방全南地方에 독감毒感, 매우 만연되는 중" 1922년 02월 10일

"군대軍隊에 독감毒感 창궐猖獗, 91명이 사망" 1922년 02월 11일

"문경군聞慶郡에 독감毒感, 학교까지 휴업" 1922년 02월 28일

"마魔의 家(上), 신통 야릇한 독감이 작란이 심하다" 1922년 10월 16일



※ 조선총독부의 미흡한 방역

- 학교, 관공서, 군대와 서울(경성), 부산 등 대도시와 같이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 먼저, 크게 발생하였다가 지역 소도시로 확산된 추세를 알 수 있다.

- 일본인보다 조선인, 하층민에서 사망자가 많았다. 조선인, 그중에서도 노동자와 농부, 지역민들의 사망율이 높은 것은, 가혹한 노동환경과 영양부족 등 건강(면역력) 문제 때문이고, 의사 등 의료체계 지원 부족 때문이다.

- 총독부와 경무총감부의 방역대책 기사는 보이지 않고, 독감이 크게 휩쓸고 간 후(1919년 3월)에 피해를 조사하는 수준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 '우편국 전멸' 사례는, 마을 이곳저곳으로 우편물을 배달하던 집배원들이 감염에 쉽게 노출되었던 탓이다.



※ 3.1운동의 배경이 된 스페인독감

"1918년 독감은 식민지조선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경무총감부 및 헌병경찰의 해체까지 초래한 1919년 3⋅1 운동의 한 도화선이 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헌병경찰을 앞세운 기존의 무단적 대처로 1918년 독감 방역에 실패한 경무총감부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제 도처에서 죽음의 일상화를 목격하게 된 식민지조선의 한국인들은 절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쌀값 폭등과 기근, 그리고 이어진 인류사적 역병 1918년 독감의 창궐과 총독부의 무능한 대처가 맞물리면서 식민지조선에는 우연히도 인류 멸망의 환난을 현실화한 것 같은 종말론적 무대가 제공되었다. 


따라서 1918년 독감 유행이 가라앉자 곧 터진 3⋅1 운동에서 구시대의 종말과 현세적 유토피아의 도래를 동시에 읽어내려는 후대의 시도가 있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 김택중,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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