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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역사 보천교 요약

2020.04.10 | 조회 1157 | 공감 0

우리 족속은 죄가 많습니다. 

형제끼리 서로 다투고 죽이나이다. 

재앙의 불꽃이 눈썹에 닿여도 아무 감각없이 코 골고 자나이다. 

원컨대 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죄를 참회케 하소서.


- 1923, 보천교 기관지 「보광普光」, 춘정생春汀生, <나의 심고>




김철수, 상생출판, 2020



1910년 일제에 강점 당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식민지 상태라는 초유의 참담함을 경험했다. 그렇지 않아도 19세기부터 힘겹게 버티어 온 조선왕조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제국주의 일본의 한 지방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민족의 숨줄마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 4p 프롤로그


1920년대 들어, 보천교 교단은 인적·물적 수단의 확대로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히 확보되면서 실력양성운동에 참여하거나 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보천교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민족에게 숨쉴 여력을 제공해주고 민족독립의 희망을 심어줬던 민족종교이다. 민족종교라 하면 그 시초를 보통 동학에서부터 찾는다. 곧 19세기 중반 수운 최제우(1824~1864)가 동학을 창교한 이래 많은 민족종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초에는 증산 강일순(1871~1909)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여 한국 민족종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천지공사는 큰병大病이 든 천하를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건설하려는 설계도이자 청사진이다. 보천교는 이러한 '9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마친 강증산이 1909년 세상을 떠난 후 그 제자였던 월곡 차경석이 조직한 교단이다. - 19p


증산 사후, 증산의 유지를 계승하는 교단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보천교와 관련된 교단으로 본다면 1911년 고판례(1880~1935)가 창립한 선도교를 최초의 교단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고판례는 강증산의 부인이며 차월곡은 고판례의 이종동생이다.


1907년 차월곡의 집에 들렀다가 증산을 만났고 1909년 종통대권을 전수받아 1909년 이후 증산의 유지를 받들면서 차월곡과 함께 교단형성에 노력하였다. 그것이 선도교였다. 그러나 점차 의견차가 생기면서 차월곡과 거리를 두게 된다. 차월곡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1916년의 24방주 조직구성이다. 따라서 보천교의 출발을 조직 구성으로 본다면 1916년 24방주를 조직하고 업무분장한 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1p


강점 직후부터 조선민중의 사상과 행동이 '민족'이나 '독립'과 연결됨을 두려워했던 식민권력은 식민지 한국인의 동향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였다. 더욱이 강점과 더불어 각종 사회단체들을 전부 해산시킨 식민권력의 입장에서 종교단체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식민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실체를 확인해서 민중과 분리했고 지식인을 동원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왜곡시켜 소멸하도록 공작했다. 그런 면에서 결론적으로 본다면 식민권력의 종교 통제정책은 성공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엄청난 교세를 확보했던 보천교는 1936년 차월곡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어 버렸고, 처음에 지적했듯이 해방 이후, 아니 현재 우리들의 기억 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식민권력이 생성해 놓은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보천교가 잘못한 죄라고는 일제강점기에 교단을 형성한 죄, 자칭·타칭 600만이라는 수많은 조선 민중과 함께 했던 죄, 그런 만큼 자금이 많았던 죄, 그리고 식민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국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죄밖에는 없는데도 말이다. - 22p


종교라는 용어는 기껏해야 1883년 정도에 우리사회에 나타난 개념이다. 그것도 religion이라는 다분히 기독교적 개념을 접했던 일본 학계가 만들어낸 용어로, 이후 조선사회로 유입된 개념일 뿐이다. 그 용어로 민족종교를 재단하는 것, 그래서 근대라는 이름으로 미신(사이비)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곧 '근대=문명=기독교↔보천교=미신=전근대'라는 틀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선은 식민주의적 시선과 연합되면서, 식민권력은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해 보천교를 '종교 유사단체' 곧 '유사종교'로 분류해 버렸다. - 24p


당시 기독교, 천도교 등 기득권 종교계는 민족종교와의 분리를 통해 제도화된 근대종교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충분히 확인가능하다. '보천교만 아니면 우리 기독교를 모든 조선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 하룻거리 일로써, 획기적으로 조선에서의 교세를 독점할뻔 하였는데, 보천교는 우리 기독교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며 커다란 악마'라 보고 보천교 박멸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다고 했다.


또 식민지 언론과 지식인들도 '근대'를 지향하는 자신들의 열의와 카르텔을 보호받으려 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학계에서 보여지는 '식민사학의 카르텔' 보호처럼 말이다. - 25p






통탄스러운 친일의 굴레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동화를 식민정책의 주요한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민족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교육(특히 역사교육)과 종교였다.


일제는 강점 내내 이러한 노력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아직 채 교단도 안정화되지 않은 형성기의 종교, 특히 소위 유사종교들이 식민권력의 이러한 정책에 저항하기는 쉽지않았다. 더구나 자신들이 강점한 다른 민족들에게 조차 단순한 복종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권적神權的 천황제를 정신적으로 승인하고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경배하라는 강요는 민족종교에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 27p


식민권력으로서는 타 종교에 비해 새로운 국가 건설을 기도하며 다수의 신도를 확보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던 보천교는 초기에 박멸하거나 어용화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사용하면서 분열과 그 조직의 약체화를 꾀했다. 종교통제 기구도 이원화시켰다. 소위 종교단체는 학무국 종교과에서 담당했지만 유사종교로 분류된 보천교는 총독부 경무국에서 감독토록 하여 강력한 폭력성과 억압성을 띤 통제를 가하였다. - 28p


'600만 교도'의 의미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민중들의 '입교 권유에 노력한 결과' 놀랄만한 다수의 교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자칭·타칭 만 교인'으로 기록될 정도로 보천교는 한때 급성장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 내의 전체 인구가 1925년 기준 1,900만 명 정도였으니 600만 명 정도면 조선 민중의 1/3이 믿었다고 볼 수 있는 숫자였다. - 41p


당시 언론들도 '보천교 교도 600만 명'으로 대수롭지 않게 기록하고 있었다.(예. 신한민보 1927.6.23).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미국 총영사관의 밀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정보보고서에도 동일한 숫자가 기록되었다. 물론 이는 "It is said to number moer 6,000,000 members."라 하여 간접 인용으로 되어 있다. 당연히 일제 식민권력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교단 기록은 그렇다 하더라도, 식민권력의 보고서들이 줄줄이 '600만 명'으로 기록한 것이다. 보통이라면 숫자를 축소해 기록하는 것이 상식적인 관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보천교의 60방주 조직은 간부가 557,700명으로 구성되었다. 교주 차월곡을 정점으로 그 밑에 육임-십이임-팔임-십오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간부들을 모두 합하면 이 정도의 수가 되는 것이다. 이 간부들이 각 10명 정도를 포교했다고 한다면 보천교의 전체 교인 수가 600만 명에 근접한다.


실제로 보천교에서 팔임이 되기 위해서는 40명을 모집해야만 했었고, 간부는 100명을 포교해야만 직책이 주어졌다고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600만 명은 그저 수가 많다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당시 민중들은 동학(천도교)이나 불교 등을 보천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보천교의 주문에는 동학 주문인 시천주주侍天主呪 등이 들어있고, 당시 천도교인들도 '천도교도가 되면 장래 조선독립에 즈음하여 물질적 이익을 얻는다'고 믿어 입교한 자들이 있었다.


민중들은 천도교인지 동학인지 보천교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불교나 타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김형렬이 위봉사에서 활동했던 경우처럼 보천교도와 불교도가 구분되지 않았고, 심지어 기독교인이면서 보천교 활동을 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 43p





이는 다음 사실과도 연결된다. 곧 일제강점기에 '소속'만을 기준으로 종교인구를 추계할 수 는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어느 '한 종교만을 신앙'해야 되고, 더욱이 '하나의 종교교단에만 소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서구적인 시선일 뿐이다.


민중들은 어떤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것이 방향을 찾아 헤매는 자신에게 심리적 위안을 주고 민족독립에의 열망을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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