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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에 대한 오해와 진실

2020.06.11 | 조회 587 | 공감 0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상생문화연구소 정원식 연구위원


 ※본 칼럼은 2019년 12월 16일자 한국일보에 필자가 게재했던 칼럼을 일부 보완한 것임


지난 6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제65주년 현충일 추념식은 작년  추념식과는 다르게 큰 논란 없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작년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가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야기했다. 독립 유공자 서훈과 관련해 논란이 일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 “약산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우리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는 언급 때문이었다. 이때 보수 성향의 언론과 시민단체, 정치권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남침의 원흉인 약산 김원봉과 그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통령 추념사 발언에 대해 맹렬히 성토하였다. 

                           

이에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국회 법사위(2019.7.16.)에서 야당의원 질의에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는 항일무장투쟁과 광복군 활동에 대해선 큰 공적이 있지만, 좌익 계통에서 활약하고 북한정권 창출과 6.25 남침에 기여했다”라고 답변하며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1940년 조선의용대 대장시절 약산 김원봉, 뒤편으로 의용단 깃발이 보인다. 


이처럼 뜨거운 논란 중에 작년 11월 9일 ‘의열단 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식을 거행했다. 그날 참석한 400여 명의 시민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삶을 재조명해보며, 좌우 이념의 대척점에 서 있는 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는 그 자체에 가치와 의미를 두었다.   



▲ 2019년 11월 9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린 의열단 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


 그날 창립식에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약산 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주도가 되어 민간 차원에서라도 그 분들의 항일애국 정신을 기려야한다”라고 강조하였다. 또 도올 김용옥 선생은 약산은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쓴 순수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임을 힘주어 피력했다.


한편, 다음날은 신흥무관학교 항일정신으로 의기투합하여 결성한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의열단은 항일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 한인애국단, 광복군의 설립에 큰 산파역할을 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 30여 년 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약산若山 김원봉                                               


그럼에도 해방 후 북한에서 11년 행적으로 서훈은 커녕, 좌우이념과 정파 간 프레임에 갇혀 세간의 온갖 오해를 받으며 정치공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첫째, “약산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약산이 해방 이전에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27년 8월 1일 중국 장쑤성에서 일어난 난창 봉기에 참여했던 대부분 의열단원 출신들이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받아 희생되자,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 세력에게 토사구팽 당했음을 인지한 후 공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약산 선생과 조선의용대에 대해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는 “해방 때까지 김원봉은 소련 및 중공과 전혀 연계를 갖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서 항일투쟁에 유리한 현실적인 정치행보를 취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약산은 1930년 4월 북경에서 안광천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울 때 관여한 적은 있지만 공산주의자로 산적은 없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특히, 약산이 주도하여 조직한 조선의용대(1938.10.10. 창설)가 공산주의 단체로 변모해 1941년 황하강를 건너 화북지역 공산당 지구로 북상할 때, 약산은 본진 40여명을 데리고 1942년 4월 김구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만약 약산이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면 임시정부에서 받아들였을까, 또 장제스 국민당정부가 과연 지속적으로 지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우한시 한코우에서 김원봉 주도로 창설된 조선의용대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담당했던 미국 전략국 요원이었던 클레런스 윔즈(Clarence Weems) 는 《약산 김원봉 보고서》에서 “김원봉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들과 손잡고 일했다. 일례로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국민당 소속의 극우파인 남의사藍衣社-1931년 중국 장제스 국민당 우파가 결성한 국민당 산하 비밀정보기관-의 일원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약산 김원봉은 조국 독립만 쟁취할 수 있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역사편수관인 리처드 로빈슨은 그의 저서 《미국의 배반》에서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가입을 단호히 거부하는 좌파 민족주의자로서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 김원봉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 기꺼워 하지는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김원봉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 있었다. 그는 조선노동당 강원도당 지부에서 활동하다 중앙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이 인물로 인해 약산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는 그의 일지에 “약산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한편, 현재 진보와 보수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김구가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지도자라면 김원봉은 민족주의 좌파세력의 한 축을 이룬 지도자로 인식한다. 약산은 한마디로 ‘실용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 약산의 정치성향은 민족주의를 뿌리로 삼고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를 자양제로 삼아 민족주의를 내실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절충주의를 넘어 실사구시적 이념, 곧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정치적인 신념체계를 정립해나간 것이다.



둘째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의용대가 한국전쟁에 남침의 전위대로서 활동했다”는 오해이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김원봉이 체계적인 항일 군사대오 형성을 목표로 창설했다. 중국 관내 정치·군사의 지형 변화로 인해 대원의 대다수가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화북 지역의 근거지로 북상하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된다. 이때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공 팔로군과 대등한 관계이면서, 동시에 김원봉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치고 있었다.


1942년 4월 중경에 있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장제스의 적극적인 권유와 독립운동 단체들 간의 통합 요구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로 합류한다. 동년 5월 화북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맞서 반소탕전을 치루고 7월 10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재편된다. 이때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중경의 김원봉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팔로군 부대 조선의용군으로 재탄생되었다. 


1943년 초 중공의 정풍운동으로 마오쩌둥이 중공당원 조선족 김무정을 조선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중공 팔로군의 정식 부대가 되었다. 해방 후 무정의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진출하여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1949년 북한인민군으로 편입되어 한국전쟁 침략의 최선봉 부대가 된다. 따라서 남침의 선봉대인 조선의용군은 약산 김원봉과 전혀 관련이 없다.



셋째 “약산은 1948년 4월20일 북한을 추종하여 자진 월북하였고, 인민군 창설(1948년 2월 8일)에 기여했다” 라는 것이다. 


약산의 월북은 미군정 하에서 좌익 정치활동 금지와 극우 백색테러, 군정청 경찰의 감시와 검거위협으로 월북할 수밖에 없는 형국 때문이었다. 약산이 “남한정세가 나빠 월북할 수밖에 없다.”라고 토로한 내용을 증언한 중국인 비서 사마로와 의열단 동료 유석현, 김승곤 그리고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동일한 증언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편 북한 인민군은 1946년 군대 형태를 갖추면서 1948년 2월 8일에 공식 창설되었다. 1948년 4월 9일에 월북한 약산이 어떻게 인민군 창설에 기여했다는 것인가?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



넷째, “김일성과 함께 6.25 남침전쟁을 주도하였다”는 오해이다. 


1948년 4월 20일 약산은 월북 이후 동년 9월2일 북조선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현 감사원장)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약산은 1952319일 당시 김일성 수상(북조선 최고인민군사령관)이 아닌,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두봉으로부터 로력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국가훈장 제1급 최고훈장보다 급수가 한참 아래인 것으로 한해 전인 1951년 조선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 있을 때 평북지역의 보리 파종 실적이 매우 우수하다고 하여 받은 것이다. 결코 우리 국군을 죽여서 받은 것이 아니다. 약산은 이 공훈으로 동년 5월에 노동상(현 노동부장관)이 임명되었다.


1957년 9월 20일에 명예직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 이후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그해 11월에 숙청되었다. 


김원봉은 일찍이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군사 분야 등 핵심적인 권력에는 진출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원봉은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 확보와 북조선 정치질서의 정당화의 장식품으로 이용당했다. 이것이 북한정권 수립과 남침전쟁에서 세간의 오해를 받는 배경이다.




북한 초대 내각 각료 기념사진 속 약산 김원봉


한편, 약산이 한국전쟁 전후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세부 문헌자료가 없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한직과 명예직이라도 고위직을 지냈다는 점으로 6.25 한국전쟁에서 도의적인 책임과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광복뿐 아니라,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거쳐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향후 한국전쟁에서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면 그 부분에 대해서 냉철한 역사적 비판이 이루어 질것으로 본다. 


현재까지도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둘러싸고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논쟁은 그의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휴전과 분단이라는 정치·군사적인 현실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느냐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째든, 해방 후 오늘날까지,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가는 탁월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월북해서 북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온갖 오해와 오명이 덧씌워져 있다. 


이명박 정부는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의 북한 70년 행적은 외면하고 13년 남한의 행적만으로 1급 최고 훈창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이 논리라면 풍찬노숙을 하면서 26년간 민족독립을 위해 싸워 온 약산의 공적이 11년간 북한행적으로 왜곡되고 폄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좌우 이념의 냉전적 사고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은 공적대로, 월북 이후의 과오는 과오대로 평가하면서 그를 종합적으로 봐라보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일제를 대상으로 26년 동안 치열하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음에도 해방된 조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남북한 현대사의 미아로 전락한 약산 선생의 심정은 어떨까? 러시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1893~1930)의 싯구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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