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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하이데거 80회 생일에 부치는 한 일본인의 축사祝辭(2)

2020.07.10 | 조회 471 | 공감 0

하이데거 80회 생일에 부치는 한 일본인의 축사祝辭(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코이치 츠지무라(Koichi Tsujimura; 1922-2010)가 1969년 하이데거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하이데거에게 바친 축사祝辭.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와 함께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의 사유를 통해 물을 가치가 있게 된 것은 이미 언제나 우리 자신인 바입니다. 그래서 비객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어떻게든 이미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그 때문에 과학과 철학에서는 늘 간과되던 것입니다.


·사유 (철학) :  개념구성판단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하이데거 사유가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은 항상 이러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사유거리는 단순히 표상하고 파악하고 인식하려 하는 한, 그 자체의 진리에서 스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사유는 원칙적으로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남습니다.


그의 사유에서 궁극적인 문제는 아마도 고대 희랍어 알레테이아(aletheia; 비은폐非隱蔽; 진리)로써 지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유거리는 서구 철학, 이 경우 형이상학의 관점에서는 형이상학 그 자체에는 은닉되어 있는 근거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태 자체는 사상가에게 사유의 변화, 다시 말해 “또 다른 사유”를 향한 철학적 사유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할 것입니다. “철학으로부터 뒷걸음질”을 의미하는 ‘또 다른 사유’에 의해 철학적 사유에 “고유한” 것, 여기서는 서구 세계와 서구의 인간됨의 본질에 고유한 것이 “고유하게” 바라보입니다.


그것은 독특한 발현發現의 사건(Ereignis)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일본인들은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서구 인간됨과 서구 세계에 “고유한 것”의 스스로에 대한 일별一瞥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유의 관점으로 보면 일본인들 또한 반드시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전통의 잊힌 기반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와 선불교

여기서 저의 사적私的인 얘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제가 아직 중학생일 때, 처음 『존재와 시간』을 접한 직후 저는 적어도 우리 일본인들이 이 참된 사유의 작품에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선불교의 전통에 감춰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선불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꿰뚫어보는 (durchblicken)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꿰뚫어 봄’을 위해서는 먼저 모든 표상함, 생산함, 개조함, 활동함, 제작함, 의욕함, 간단히 말해 모든 의식과 그것의 활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길을 따라서 의식의 근본 원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본의 위대한 선사禪師 중 한 분인 도원道元 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뒤로 물러남을 배워야 한다.”(도원, Fukan zazengi[普勸坐禪儀]) 


그렇다 해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동아시아의 선불교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하이데거 사유는 그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독자적인 사유이기에 아마도 전혀 관계가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 사유와 매우 깊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하이데거의 사유와 일본의 선불교 사이에 놓인 독특한 관계와 관련하여 다만 몇 가지 것을 언급하는 데 그쳐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하이데거가 한 번 얘기했던(cf. Was heißt Denken?) “꽃이 활짝 핀 나무”의 예를 가지고서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나무가 꽃피고 있다. 


이 단순한 상황에 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꽃피는 나무 앞에 서있다. 그리고 나무는 우리 앞에 서있다.”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쳐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나무와 마주하게 하고, 나무 앞에 세우고, 그리고 나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내보인다.” 여기서 이미 하이데거 사유의 독창성이 눈에 띱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통상 독일어로 말할 때 "We present to ourselves(dative; 3격) a tree"[영역된 표현; 저자의 의도를 살려 옮기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나무를 표상한다.”가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표상하다: 추상적이거나 드러나지 아니한 것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무와 마주하고 나무 앞에 세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고쳐 말하는 것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표상하는 주체로서의 “우리”와 동시에 표상되는 객체로서의 “나무”가 사라지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데카르트 이래 사유는 언제나 ‘나’는 생각한다, 즉 ‘나’는 ‘스스로를 향해’ 표상한다를 의미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이해했습니다.


코기토[cogito; 나는 사유한다]는 ‘나는 내가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cogito me cogitare]를 가리킵니다. 이제 이로부터 초월론적 관념론이 발생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원칙은 바로 그것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내가 표상하는 바다.”


반면 하이데거는 그 문제를 앞서 언급했던 방식으로 수정해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꽃피는 나무 앞에 서있고 나무는 우리 앞에 서있는 사태를 더 이상 “ ‘나’는 생각한다”로부터가 아니라 나무가 서있는 “거기에”로부터 사유하거나 바라봅니다.


이곳 “거기에”는 “우리가 살고 죽는” 장場입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말할 때, 우리는 “과학과 … 심지어 철학의 친숙한 영역에서 뛰어 내립니다.” 거기에 나무가 꽃핀다는 단순한 상황과 관련지어 말하면, 표상하는 주체로서의 우리 그리고 동시에 표상되는 객체로서의 나무는 또 다른 종류의 “표상함”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한 전환이 없다면 우리는 거기에 꽃피는 나무를 그것의 참됨에서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선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예컨대 다음과 같이 특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당나귀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우물은 당나귀를 들여다본다. 새는 꽃을 바라보고 꽃은 새를 바라본다.”


나무가 그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 존재는 스스로를 나무와 마주 세우는, 또 다른 “표상함”을 우리는 ‘내맡긴’ 표상함[released representing]’으로 부르고, 반면 “나는 스스로를 향해 표상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임의적인’ 표상함[willful representing]’으로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로부터 전자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 도약과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죽는”, 즉 “우리가 참되게 머무는” 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특유한 도약에 의해서만 “나무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이 개방됩니다. 


영역화”(四域)라 불리는 이 열린 장에서 나무는 스스로 그 자체를 우리에게 내보이고 우리는 존재하는 바대로 자신을 꽃피는 나무에 마주 세웁니다. 그러나 이 영역은 이미 처음부터 우리가 정주定住하고 나무가 꽃피는 곳입니다.

[이 영역화의 문제는 하이데거에 올바로 접근하는 관건이 되는 하이데거 사유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겠지만 선입견에 따를 오해는 피해야겠기에 다음의 사실만을 남겨두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기에’, ‘장’, ‘영역’은 단순히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고유하게 들어서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머무는 ‘동안’이며 ‘폭’으로서 시간이자 공간, ‘시공간’이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저는 여기서 어느 정도 이에 상응하는 예를 선불교에서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禪-문답으로서 매우 유명한 공안公案입니다. 한 승려가 한번은 조주趙州 선사에게 “무슨 이유로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인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온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라고 대답합니다. 승려는 따졌습니다. “스승님, 한 객체를 빌려 가리키지 마십시오!” 선사는 “나는 객체를 빌려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승려는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중국 선종의 개조인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온 것입니까?” 선사는 대답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선종의 조사祖師가 불법佛法을 전파하려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승려의 물음은 “선불교에서 시초이며 궁극적인 진리는 무엇입니까?”를 의미합니다.


조주 선사의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 대답은 마치 번쩍이는 번개처럼 한 순간에 환히 밝힙니다. 그것은 물음과 함께 묻고 있는 승려를 일격에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동시에 구해졌던 진리가 한 순간에 완전히 드러나게 번쩍 빛납니다.


그와 같은 반응과 더불어 승려는 그와 잣나무가 이미 있는 지반으로 돌연 뛰어들었어야 됩니다. 그러나 번갯불은 묻고 있는 승려를 관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선사의 대답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말해진 것, 즉 표상된 한 대상인 “뜰 앞의 잣나무”에 주목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한 객체를 빌려 (진리를) 가리키지 마십시오.”라고 요구해야 됐습니다. 조주 선사는 처음부터 한 대상을 빌어 진리를 보여주지 않았기에 다시 제기된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정확히 이전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승려는 뛰어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그는 표상하고 바라보고 사유하면서 객관화하는 것에 여전히 매여 있습니다


제가 좀 더 보태도 된다면,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꼬집어서 대답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나무가 그것 자체인 바로 서있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곳[이자 동시에 때]에서는 어디나 불법佛法이 본래적으로 머뭅니다(wesen).


바로 이런 이유로 그것은 더 이상 불법으로서 특정하게 지목될 필요가 없습니다. 달마 대사는 위험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결코 오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왔습니다. 그럼에도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명시적으로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예컨대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죽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사유하고 묻고 말해야 합니다.


왜 이 ‘그럼에도’가 반드시 수반돼야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죽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지반의 망각 속에서는 길을 잃고 이리 저리 헤매게 되기 때문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조주 선사의 대답조차 잘못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대답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제가 보기에 하이데거가 말하는 저 “특유한 도약”“우리는 도대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 ”라는 말 사이에는 깊이 은닉된 관계가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묻습니다. “나무가 우리에게 스스로를 내보이고 우리는 자신을 나무와 마주 세우는 사태에서는 무엇이 생기生起할까(ereignet sich)?”




이에 대해 어쩌면 하이데거와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영역(또는 영역화)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각각의 것을 각각의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그 자체 안에 고요히 머물도록 불러 모은다.”(Gelassenheit)


우리의 관점에서 기술된 “영역화”는 “부처의 장場”, 즉 진리의 장입니다. 만약 일본의 선사 도원이 하이데거의 저 물음을 들었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두나무가 꽃피는 바로 그 순간, 그 개화開花에서 세계는 생기한다.”(Shōbōgenzō)


꽃피는 나무의 예에서 마지막에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촉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꽃피는 나무가 쓰러지게 해서는 안 되며 일단 그 나무가 본래 서있는 곳에 서있도록 하는 것이다.”(Was heißt Denken?)


우리 또한 선禪에서 저 “뜰 앞의 잣나무”란 공안을 통해, 물론 문맥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뜻의 경고를 받습니다. “아무렇게나 뻗어나간 나무를 베거나 쓰러뜨리지 마라. 그 서늘한 그늘 아래에서 인간 존재가 휴식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해진 것을 고려하면서, 아마도 이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데거 사유와 선불교는 적어도 표상하는 사유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거기서 열리는 진리의 장은 양자 사이에 아직은 충분하게 밝혀지지 않은, 매우 친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선불교는 진리의 장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그 본질적 특성과 관련하여 드러나지 않은 것(un-truth)의 장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해명하는 데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이데거의 사유는 알레테이아의 본질적 특성을 끊임없이 해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선불교, 적어도 지금까지 전통적 형태에서의 선불교가 안고 있는 결점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전통적 선불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획기적인 사유와 물음입니다. 세계의 물음에 관해서 우리는 하이데거 사유로부터, 특별히 기술의 본질로서의 ‘몰아세움’이라는 그의 독특한 관념으로부터 어떤 결정적인 것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불교 그 자체는 불모不毛의 나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에서 모종의 가능한 일본 철학으로 나아가는 어떤 길도 트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은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보다 연장자인, 위대한 사상가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귀향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옛 시詩를 인용하는 것으로써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남으로 북으로 동과 서로. 깊은 밤에,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층층이 쌓아 올라간 절벽 위의 눈을 함께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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