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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단 제101주년’을 앞두고 (1)

2020.07.23 | 조회 583 | 공감 0

항일무력투쟁의 아방가르드 ‘의열단 창단 제101주년’을 앞두고


 상생문화연구소 정원식 연구위원

 

(본 칼럼은 2019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필자가 기고했던 것을 대폭 수정 보완)


금년 11월 9일과 10일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제2차 세계대전시 항독무장단체)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의열단(1919년~1935년)이 제101주년 되는 해이다. 항일무장단체인 의열단은 일본제국을 향해 적극적인 작탄활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01년 전 1919년 11월 9일, 시베리아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친 늦은 밤 만주 길림성 중국인 반씨(潘氏)가 운영한 화성여관에 조선인 열혈청년 13명이 모였다. 이날 모인 13명의 청년 독립지사들은 도원결의를 통해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소위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결성했다.


13명의 단원은 김원봉을 포함한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과 권준(權俊) 등이었다.



 

조직의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해서 의열단(義烈團)이라 하였고 단원들 대부분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의열단의 리더는 2015년 큰 흥행을 거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모습으로 “나, 경남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라고 했던 그 약산 김원봉 선생이다. 2016년 영화 <밀정>에서 배우 이병헌도 약산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상단 김원봉 선생과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김원봉 역을 맡았던 배우 조승우와 이병헌>

 

‘의열단 행동강령과 활동방향 구체화 및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공포

당시 의열단 창립에 앞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거국적인 ‘3.1혁명’이 일제의 무력 앞에 대실패로 끝났다. 이에 대부분 3.1혁명을 주도했던 독립운동 지식인들은 비폭력 투쟁이 갖는 한계에 대해 뼈저린 성찰과 반성을 하였다. 


동시에 평소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여겼던 독립지사들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서만 일제로부터 독립 쟁취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9월 11일 대한국민의회(블라디보스토크), 한성임시정부(서울), 상하이 임시정부 등이 통합해 만든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이듬해 기관지 독립신문을 통해 1920년 1월 17일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여 의열단의 항일무력투쟁에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김원봉의 고향 경남 밀양의 선배이자 의열단의 고문이었던 김대지와 황상규는 ‘의열단의 행동강령과 활동방향’을 다음과 같이 ‘공약(公約) 10조’와 ‘칠가살(七可殺:죽여야 할 일곱 대상)’, 그리고 ‘오당파(五當破: 파괴해야 할 다섯 일제기관)’ 등으로 구체화하였다.


의열단 창단시 행동강령 및 활동방향



‘칠가살(七可殺:죽여야 할 일곱 대상)’

1. 조선총독 이후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 탐

7. 반민족적 토호 열신

‘오당파(五當破: 파괴해야 할 다섯 일제기관)’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한편, 1922년에 의열단의 무력을 앞세운 암살파괴 활동에 대해 일부 비판적 견해가 존재하자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은 의열단의 정체성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산 선생은 동년 12월, 의열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열단의 무력투쟁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대문장가 단재 신채호 선생을 찾아가 글 한 편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신채호 선생은 약산의 부탁에 적극 호응하여 의열단 참모인 류자명 선생과 함께 한 달간 합숙하며 불후의 명작이자 당대 최고의 격문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국한문 혼용체로 1923년 1월에 완성했다.


전체 5개 부분 6,400여 자로 되어 있는 이 선언문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일본제국을 조선의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폭력적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만 할 수 있으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 번 던진 것만 못하며,

천억 장의 신문, 잡지가 한 번의 폭동만 못할지니라.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ㆍ암살ㆍ파괴ㆍ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상에 사실에 거(據)하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특히, 민중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했다.


의열단의 민중직접혁명노선과 전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여 수정이 가해져, 창단 초기에 비하면 강령상의 변화를 보인다.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




‘민족 종교인 보천교 간부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1923년 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국내와 상해, 만주·북경·간도 일대 등 각지에서 독립활동을 하는 100여 개의 단체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보천교(普天敎)'에서도 진정원 간부인 배홍길(배치문)과 김종철, 청년회 대표인 강홍렬(강일) 3명을 파견은 물론, 군자금을 비밀리에 상당히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강홍렬(강일)은 3.1운동 때 영남지역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합천지역에 배포했고 합천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배홍길(배치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두 사람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일제시대 보천교를 깊이 연구한 종교사학자 김철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의열단에 입단하여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김원봉 단장에게 단원과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였습니다. 강홍렬(강일)과 배홍길(배치문)은 의열단과 보천교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습니다. 의열단 활동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신도였습니다. 당시 선화사급의 여성간부였죠. 1924년 초에 독립단체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하였습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실용주의적인 행보를 통한 실천적 민족독립운동을 한층 강화한 의열단’

1926년부터 점차 당대 사상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성향을 수용하기 시작한 의열단의 강령 및 사상은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창단 제9주년 기념성명>을 계기로 종래의 조국광복을 목표로 한 순수한 민족주의노선에서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성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구축을 위한 항일민족공동전선을 세계 약소민족의 반식민제국주의전선으로 연결하려는 시대적·민족적 요구를 실용주의적으로 반영한 탄력적인 행보로 보인다.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급진적 좌파 성향을 보이게 된 것은, 1929년 12월 북경에서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조직하였을 때부터이다. 의열단의 창단 초기에는 성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구축왜노(驅逐倭奴), 광복조국(光復祖國), 타파계급(打破階級), 평균지권(平均地權)을 단원들이 강령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이 중 구축왜노와 광복조국은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추구한 목표였고, 타파계급과 평균지권은 민중을 직접혁명의 중핵으로 하는 3·1혁명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나타냈다. 특히, 다음의 주장은 의열단의 초기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동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實策)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동경(東京)·경성(京城)의 2개 소로서 우선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대대로 5, 6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국민 스스로가 한국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민족적 지상과제인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오직 암살과 파괴라는 직접적이고 과격한 투쟁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초기의 의열단은 순수한 민족독립운동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강령은 1928년 이후에는 21개 조의 강령으로 확대되고 창단 초기와는 변화된 사상경향을 보이면서 1930년대에 들어서 민족주의를 뿌리로 삼고 사회주의를 자양제로 삼아 민족주의를 더 내실화하는 사상 신념체계로 나아갔다.


그 중심에는 오직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국 독립쟁취"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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