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을 자살로 모는 '명문대 병' (경향 칼럼)

진성조 | 2011.04.12 11:18 | 조회 6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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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세상]학생을 자살로 내모는 ‘명문대病’

“미국의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 서남표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최근 학생과의 개별면담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네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수가 연이어 자살함으로써 사회적 충격을 던지고 있는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2006년 부임 이후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목표로 개혁을 주도하면서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서 총장에게 학생들의 자살은 경쟁 시스템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나약한 정신력’의 결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의 발언에서 자살률조차도 아직 명문대 수준이 못 된다는 인식을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우리 옛말이 있긴 하지만 이 말의 서남표판은 ‘명문대가 된다면 자살이 대수랴’가 될 듯싶어서다. 하지만 그 명문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명문대일까.

소위 ‘서남표식 개혁’의 성과는 ‘눈부시다’. 보수언론이 자주 내세우는 지표에 따르면 서남표식 개혁이 추진된 덕분에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순위는 쑥쑥 올라갔다. 2006년 198위,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그리고 2009년에는 69위가 됐으니 50위권 진입도 코앞에 두고 있다. 서울대가 47위라고 하니 카이스트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다. 게다가 공학·IT분야로 한정하면 서울대(27위)를 제치고 21위다. 대체 무엇이 평가 기준인지 궁금한데, 매년 세계 200대 대학을 선정해 순위를 매긴다는 이 영국의 일간지는 동료평가(40%), 교수 1인당 논문 인용지수(20%), 교수 대 학생 비율(20%), 국제기업의 대학평가(10%), 외국인 교수 비율(5%), 외국인 학생 비율(5%)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료평가’를 어떻게 산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준에 ‘사회 속의 대학’이 갖는 의의는 포함돼 있지 않는 듯하다. 대학 구성원들의 자긍심 또한 평가항목에는 빠져 있는 듯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졸업자 취업률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별 행복지수 같은 것도 예가 되지만 평가항목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순위가 가능한 것이 모든 유(類)의 평가가 갖는 함정이다. 그런 결과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흔히 대학들 간의 무한경쟁시대라고 하고, 대학 경영자들은 입만 열면 ‘대학 경쟁력’을 외친다. 미국 시카고신학교의 서보명 교수가 쓴 <대학의 몰락>이란 책을 보면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경쟁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학별 랭킹을 발표하면서 각 대학을 순위경쟁으로 내몰기 시작한 것이 고작 30년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학이 서구 중세의 산물인 걸 감안하면 대학평가의 역사란 퍽 일천하다. 하지만 이 일천한 역사가 대학의 이념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학의 자유’라는 이념이 ‘대학 간 경쟁’으로 변모했으니 이만한 지각변동을 대학의 역사에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서 교수에 따르면 ‘대학 순위 정하기’를 통한 순위 경쟁의 도입은 레이건 시대 보수주의 혁명의 혁혁한 성과이다. 1960년대 좌파운동의 본산지였던 대학을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밀어넣음으로써 대학을 기업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은 상품이 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었으며 대학은 품질관리와 품질보증의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자본과 소비만이 대학을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 대학의 자유와 비판정신이 이제는 한갓 퇴색한 전통에 불과하다면, 대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대학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 명문대 수준의 자살률을 갖기 전에 다시금 고민해볼 문제다.

<이현우|서평가>


입력 : 2011-04-11 19:54:46수정 : 2011-04-11 19: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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