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칼럼3- [고미숙의 행설수설] "쓰나미보다 두려운 탐욕"

진성조 | 2011.04.14 13:16 | 조회 8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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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行설水설]쓰나미보다 더 두려운 ‘인간 탐욕’

거대 문명이 붕괴하고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구는 황폐해진 대지와 썩은 바다로 뒤덮인다. 설상가상 ‘부해’라 불리는 독기를 내뿜는 균류의 숲이 확장되면서 사람들은 마스크 없이는 단 5분도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짐작하시겠지만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명작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다.

자연 외면하고 문명 구축에 골몰

3월 내내, 나는 마치 나우시카를 다시보는 듯한 환각에 빠지곤 했다. 검푸른 물결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밀려오면서 자동차며 선박, 빌딩과 고속도로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그 장면은 마치 나우시카에 나오는 오무대군의 질주와 너무나 흡사했다. 오무떼는 눈이 14개나 되는 거대한 몸집의 갑각류로 독성의 포자를 실어 나르는 곤충이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사방은 삽시간에 죽음의 땅이 돼버린다.

영화에선 이 곤충떼들을 태워버리기 위해 지하 깊이 잠들어 있는 불의 악령 거신병을 불러낸다. 맙소사! 이런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니.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자 후쿠시마원전이 폭발하면서 방사성물질들이 세상밖으로 흘러 나온 것이다. 대기중으로, 또 바닷속으로. 아,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바람계곡에 살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천년 뒤의 미래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인가?

영화에서 오무떼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 두려웠던 건 쓰나미가 아니었다. 공포의 원천은 자연의 소리를 외면하고 오직 문명을 구축하는 데만 골몰했던 인간의 탐욕이었다. 그리고 그 탐욕의 뿌리에는 ‘지독한 무지’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빌딩을 올리고 고속도로를 만드는 기술은 그토록 민첩하면서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돕는 일에는 어찌 그리도 더디고 어설프단 말인가.

방사성물질을 추출하는 데는 첨단의 기술력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불러올 재앙에 대비하는 시스템은 어찌 그리 원시적일 수 있단 말인가. 천안함 침몰 때, 구제역 바이러스 때 확인했듯이 문명이란 빼앗고 파괴하는 일에는 신의 능력을 압도하지만,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는 원시인들보다도 미력했던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재난대비국가인 일본이 이럴진대 다른 나라의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으랴. 이건 일본 열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진과 해일에 국경이 있는가? 플루토늄과 세슘에 국적이 있는가? 그것은 바람이고 공기고 물이다. 그 자체로 ‘전지구적’이다. 하여, 역설적이게도 이번 재난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우리의 몸 또한 탄소·수소·질소 같은 원소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의 생물학적 위상, 물리학적 좌표를 이보다 더 확연히 보여줄 수 있을까.

재앙 대비 시스템은 너무 원시적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무수한 경계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자연의 침묵을 전제로 인간의 독주를 가능케 했던 모든 표상의 격자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삶과 죽음 사이의 견고한 철책을 거두고 새로운 에콜로지(생태계)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때다. 저 바람계곡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설지니/ 그때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다시 맺고서/ 저 푸른 청정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리라.” 눈 먼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나우시카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곤충떼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용감무쌍한 소녀, 나우시카! 그녀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오무대군과 거신병을 통해 천하를 지배하려는 제국의 군대 사이를 누비며 존재와 세계의 ‘절대적 상생’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이제 우리에게도 이런 노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문명과 자연, 바이러스와 인간, 방사능과 생물, 이 적대적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에코소피아(ecosophia)’를 향한 대서사시가.

<고미숙 고전평론가>


입력 : 2011-03-28 19:47:28수정 : 2011-03-29 11: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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