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말 한마디가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든다

환단스토리 | 2016.07.31 15:13 | 조회 5663



졸리앙의 서울일기 ⑬ "고맙습니다" 말 한마디가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든다


중앙일보 2016-07-31


사랑의 계단 오르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의 일상이 비정한 정글을 넘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진정 서로 사랑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우리 마음속 크고 작은 사악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계산 없이 사랑하기란 왜 그토록 어려운가. 남을 겨냥한 앙심과 권력욕에서 자유롭기가 어찌 그리 힘든가.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고백했다. 이따금 견딜 수 없는 두통이 몰려올 땐 다른 사람 머리도 똑같이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이 일더라고. 폭력의 악순환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악몽처럼 고달픈 일상에서 남에게 차갑고 까칠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세상에 일부러 못되게 구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정녕 그렇다면 나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사람이야말로 잔인한 괴물이기보다 스스로 병들어 괴로워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우리 모두 증오나 공격성이 밖으로 불거지기 전에 마음속에서 삭이도록 기꺼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다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에 귀 기울여 보자. 그는 사소하게 들리는 말 한마디의 기적 같은 힘을 강조한다. 다름 아닌 “부탁합니다(Please)”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적어도 타인을 악의적으로 착취하거나 도구로 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은 비굴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태도요, 남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때론 별생각 없이 내뱉기도 하는 그 간단한 말 한마디. 우리가 얼마나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인지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고맙습니다(Thank you)”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맙다고 말하기, 감사함을 느끼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고통과 욕구 불만의 소굴인 편협한 에고이즘에서 벗어나는 비법이다. 감사의 표현 속에 가식과 저의가 숨어들 여지는 없다. 오히려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ego)의 고집을 꺾고 삶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당당한 자유의 몸짓이 거기 있다.


‘부탁’이나 ‘고마움’보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용서’라는 단어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모든 비판과 앙갚음을 포기하고, 내게 잘못한 사람의 죄책감을 면제해 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용서를 택하는 이유는 영혼의 암 덩어리인 증오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새날을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왜 과거를 놓아 주기 어려워할까. 잘못 자체를 잊기는 불가능할지언정 잘못을 범한 누군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가 어찌 그리 힘들단 말인가.


잘못된 행동·실수·오판 속에 누군가를 가둬 영원히 낙인찍는 것은 변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는 처사로 그 자체가 인간 사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악(惡)이다. 용서의 미덕에 있어 넬슨 만델라만큼 뛰어난 스승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오랜 세월 부당한 수형생활을 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향한 문턱을 넘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모든 증오와 울분, 고통을 내려놓고 이 문을 나서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言)이라는 것은 툭하면 거칠어질 뿐 아니라 거짓으로 흠집 나기 일쑤다. 조금이라도 진정이 담긴 말, 단순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건강한 말이 뜻밖에 문제를 풀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계단이 되어 각자의 내면과 사회생활 모두를 잠식한 폭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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