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라는 병

환단스토리 | 2016.07.25 14:38 | 조회 5412

거짓이라는 병


중앙일보 2016-07-25 


이런저런 핑계로 그간 못 본 신문을 한꺼번에 읽었다. 집에서 보는 세 개의 신문을 제목이라도 훑지 않으면 못 버리고 쌓아두는 이상한 습관 탓에 가끔 이렇게 역주행을 하는데, 토요일에서 금요일·목요일 순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읽으면 매일 챙겨 볼 때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큰 이슈 당사자의 발언을 역순으로 읽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지난주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그랬다. 그를 둘러싼 언론의 문제 제기는 아직 의혹 수준에 불과하지만 신문을 역순으로 읽으니 그의 거짓말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1300억원대의 처가 부동산을 넥슨에 팔면서 각종 부당한 혜택이 오가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된 후 지금까지 알려진 건 그가 근무 시간 중 자리를 비우고 계약 당사자로 현장에 갔다는 사실이다. “(부동산 거래는) 처가에서 들었다”며 이 계약이 본인의 지위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발뺌을 하려다 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증언이 나오자 “장모님을 위로하러 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꿨다.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지기 마련인데 큰 사건에 연루된 고위직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당당해 늘 보는 사람만 당황스럽다. 


지난 5월 별세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에는 일제 때 그가 다녔던 평양상업의 일본인 교장 얘기가 나온다. “조선이 망한 건 조선 사람들이 거짓되기 때문”이라며 조선인을 멸시했던 교장은 광복 직후 김 전 의장 덕분에 봉변을 피했다. 교장은 훗날 국회의원이 된 그에게 “거짓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힘써 주기 바란다”는 감사 엽서를 보냈다고 한다. 이번엔 멸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언짢을 수밖에 없는 김 전 의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도산 안창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나라를 망친 원수는 거짓”이라는 대목 말이다. 도산은 자기 이익만 챙기자고 우리끼리 싸우다 외세에 놀아나 결국 나라를 망친 정직하지 못한 자들을 저주한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거짓말 불감증에 걸려 있고 이런 나쁜 습성을 고치는 데 몸을 바치겠다”고도 했다. 거짓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게 도산의 절실한 바람이었던 셈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지는 이미 오래다. 하지만 거짓이라는 병을 고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시감 있는 우 수석의 거짓말이 왠지 더 찜찜하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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