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진리(포스트)

16세기 사림의 기자숭배

진실무망 | 2017.05.22 20:43 | 조회 1107

16세기 사림의 기자숭배


"우리 동방에도 백성이 살아온 지 중국에 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예지를 지닌 성신이 나오시어 군사君師의 구실을 다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물론 단군께서 제일 먼저 나시기는 하였으나 문헌으로 상고할 수 없다. 


삼가 생각하건대 기자께서 우리 조선에 들어오시어 그 백성을 후하게 양육하고 힘써 가르쳐 주시어 머리를 틀어 얹는 오랑캐의 풍습을 변화시켜 문화가 융성하였던 제나라와 노나라 같은 나라로 만들어주셨다.


그리하여 백성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은혜를 받아 예악의 습속이 왕성하게 계속되고 쇠퇴함이 없었으니, 우리 동방은 기자의 발자취에 대하여 집집마다 읽고 사람마다 익혀야 할 것이다." [기자실기] 



▲ 율곡 이이 (1536∼1584)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를 읽게 되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半성인으로 추앙받는 대학자 율곡이 단군보다 기자를 숭상하고, 기자로부터 비로소 '문명국'이 되었다는 그의 말은 요즘 말로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곡 이전에 이미 조선초부터 사림에 의한 '기자조선 숭배' 분위기는 팽배했었던것 같습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 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단군에게는 초하루, 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세종실록]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조금씩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분위기가 오죽했으면, 이런 내용이 왕조실록에 실리게 되었을까요?



▲ 사서에 그려진 기자 초상 '평범한 유학자'의 모습이다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인가?"


이러한 기자숭배는 정통주자학을 진리로 삼아, 중화사대로 매몰된 조선유학자들의 '무無정신'의 결과이지만, 이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호 윤휴입니다. 



▲ 백호 윤휴 (1617~1680)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윤휴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지만, 정통 주자학을 비판하는 윤휴와의 격한 논쟁 끝에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아 경신환국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 백호 윤휴


그러나, 송시열이 벗이었던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는 윤휴를 처음 만났을때 느꼈던 솔직한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삼산에 이르러 윤휴와 더불어 사흘간 학문을 토론해 보니 우리의 30년 독서는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당시 30세였던 송시열이 20세였던 윤휴의 학식과 천재성에 감탄하고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윤휴와 미수 허목, 그리고 남인


위에 말했듯이, 윤휴는 주자를 비판하고 원시유학의 경전(육경)을 깊이 연구하여, 그 나름의 주해를 달고 원시유학에 숨겨져있던 '상제 신앙'을 밝히게 됩니다. 


또 윤휴는 잠시동안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으로부터 사사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윤휴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바로 조선말 천재 유학자 정약용입니다.



▲ 다산 정약용 (1762~1836)


'개벽실제상황'에 실려 있듯이, 윤휴, 정약용 등은 우리 잃어버린 상제신앙을 되찾으려했던 남인 실학자들이고 이 남인의 영수라 일컬어지는 미수 허목 또한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였습니다.


허목은 '동사'를 저술하여 '단군세가'를 통해 '단군문화 정통론'을 내세우고, 원시유학을 재조명하려 했던 자주적인 학자였습니다.


또, 미수 허목이나 윤휴, 정약용 등 남인의 뿌리에는 유성룡과 이황, 이언적이 서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관학파'라 불리운 조선 초 정도전, 권근 등의 급진개혁파들이 있습니다. 


유성룡은 우리가 잘 알듯 '상제 신앙'을 철저히 실현한 이였고, 이순신 또한 '둑제'를 지내고 '상제 신앙'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언적은 도전 측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상제님 천지공사에 神道에서 참여한 인물이고 이황은 전선필성도의 전생으로 일컬어지며, 태모님 말씀 증언의 사명을 맡았습니다.)



이수광 '내각의 비서를 보다' 



▲ 이수광 (1563∼1628)


이러한 실학의 뿌리에는 이수광이 있고, 남인의 뿌리, 이황의 사상은 이언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수광과 이언적, 이 둘에 관한 이야기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 총론'에 전해집니다. 


"이수광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조선사 총론] 


이수광과 이언적이 내각의 비서 즉, 단군조선 정통론 등의 자주사서를 본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언적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황의 학맥에 유성룡, 윤휴, 정약용, 허목 등 상제신앙과 자주사관을 가진 이들이 있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 동인과 서인(남인과 노론)의 3백년 붕당의 치열한 전쟁에서 결국 노론이 승리하고 그 노론의 계보 끝에 있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서 있습니다.





"미수야, 우암을 잡아 오너라."


이제 생각나는 도전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4편 124장의 성구 말씀입니다. 


김사명(金士明)의 아들이 급증으로 죽자, 상제님께서 친히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혀 살려주실때 허공을 향하여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하고 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의 배경에는 우암과 미수의 유명한 일화가 깔려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우암과 미수'로 대표되는 사림의 붕당정치의 결론을 내 주신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암 송시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우암 송시열 (1607∼1689 )과 미수 허목 (1595∼1682) 



미수 vs 우암


우선, 죽은 아이의 아버지 이름에 주목해봅니다. 

김사명金士明 - 선비 士, 밝을 明 자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미수의 남인계열은 원시유학, 상제신앙(인격천), 민족사관을 대변하고 우암의 노론계열은 정통주자, 天사상(도덕천), 사대사관을 대변합니다. 


'죽은 김사명의 아들을 살려주실때' 미수에게 '우암을 잡아오라'하신 것은 같은 병을 앓았던 우암을 치료해본 경험이 있는 미수에게 그 공사를 맡기심이 첫째 이유이고 


미수에게 우암을 잡아와 심판하심이 둘째 이유이고, 원시유학의 상제신앙과 민족사학의 맥이 막혀버린 사림의 도리를 밝혀 회초리를 들어 되살려주심이 셋째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5백년 사림의 썩은 역사정신과 매몰된 사관, 잘못된 상제신앙을 도려내고 밝혀주신 '사림 심판공사'가 아닌가 추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5백년 조선유학의 틀을 바로잡고 뿌리부터 뒤엎는 공사가 바로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에서 보신 '만동묘 황극신 공사'가 될 것입니다. 



▲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만동묘 (복원 후, 복원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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