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仙의 산 회문산回文山

초립쓴30대 | 2009.08.06 12:56 | 조회 6435

김명렬(증산도 본부)
 
 
순창 회문산은 선(仙)의 산이다. 상제님께서 불가지(佛可止)에서 공사보실 때 “이마두를 초혼(招魂)하여 광주 무등산(無等山) 상제봉조(上帝奉朝)에 장사지내고 최수운을 초혼하여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에 장사하노라.”(5:399:3,4) 하시며 공사로 처결하셨다. 최수운 대신사님은 선도(仙道) 종장으로, 이마두 대성사님은 서도(西道) 종장(4:8)으로 각각 임명하셨는데 최수운 대신사님은 동선(東仙), 이마두 대성사님은 서선(西仙)을 맡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벽이다』(하) 561쪽 도표 참조). 따라서 순창 회문산은 동선산(東仙山)이요, 광주 무등산은 서선산(西仙山)이라 할 수 있다.
 
선천문명을 일으켜 세웠던 동선과 서선의 진액을 뽑아모아 후천선경을 여는 분이 회문산 오선위기 진주 도수의 주인공이다. 선천 선문명(仙文明)의 모든 결정체가 회문산 오선위기 진주 도수로 결집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최수운 대신사는 산하대운(山河大運)이 진귀차도(盡歸此道)(4:19:7)라 하시며,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다(歎道儒心急)고 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그 깊고 먼 가을개벽의 과정에서,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 대종(大宗)을 해원의 머리로 하여 선천의 모든 원한을 해소시키기 위해 회문산 오선위기를 취하신 것이다. 태모님께서는 오성산의 오선위기 형국으로 회문산 기운을 대신하여 공사를 보셨는데, 오선위기는 동서양 기계통이요 전기통이라고 하셨다(11:369). 세운과 도운이 돌아가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종도사님께서는 한마디로‘난장판공사’라고 정리해 주셨다. 세운과 도운 1,2,3변의 바둑 난장판인 것이다.
 
오늘은 순창 장덕리와 회문산 휴양림, 탐랑승마격(貪狼乘馬格)인 회문봉과 후천선경의 진주천자장군 도수의 출발지인 순창 농바우를 순례한다.
 
 
 회문산 도수 정리
 『도전』에 회문산은 22번, 오선위기는 19번 등장한다.
 회문산에서의 중요한 도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천지부모산으로서의 회문산(4:19:4)
 2. 변산 해왕 도수와 상응되는 산군 도수가 있는 회문산 (4:109)
 3. 사명당의 회문산 (5:410)
 4. 오선위기 진주 도수 발현처로서의 회문산 (5:296)
 5. 단주 대종(丹朱大宗)의 오선위기(바둑) 해원도수가 있는 회문산
 6. 무등산과 짝이 되는 선(仙)의 산으로서의 회문산 (4:8,5:339)
 7. 오성산과 비유되어 동서양 기계통, 전기통이 되는 오선위기 형국 (11:369, 11:410)
 
회문산을 이루는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남하하여 지리산 천황봉까지 가는데 덕유산과 남덕유산, 육십령을 지나 영취산에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을 분맥하여 장안산, 팔공산, 마이산을 거쳐 주화봉을 기봉한다. 여기서 다시 두 산맥으로 갈라지는데 금북정맥은 북으로 뻗어 대둔산과 계룡산을 거쳐 부여까지 행룡하고, 호남정맥은 남으로 뻗어 경각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으로 하여 광양 백운산까지 뻗어가는데 회문산은 담양 추월산에서 나온 사맥에서 기봉한 산이다.
 
 
 
순창읍 장덕리와 장덕산
이번에는 반드시 회문산 정상에 오르리라 다짐하고 순례자 일행은 이른 새벽 대전을 출발했다. 상제님 천지공사의 이상향인 곤남건북(坤南乾北)의 전주를 거쳐 운암호를 지나 전북 순창군 순창읍에 도착, 거기서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그리고 우리의 첫 목적지인 순창읍의 장덕리(長德里)로 향했다.
 
상제님께서 회문산에 들르실 때마다 종종 가셨다는 장덕리에 들어서니, 아침을 하는지 집집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장덕산(長德山, 293m)에는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닭바위가 있으며, 산 너머 마흘리에는 호남 8대 명당으로 유명한 마명당(馬明堂)이 있다. 회문산은 순창 금산(錦山)과 무이산(武夷山), 성미산(成美山)에 막혀서 보이질 않았다. 일행은 장덕리의 아침 정경을 뒤로 하고 회문산 안시내(安心) 마을 쪽으로 향했다.
 
 상제님께서 회문산에 가실 때 종종 장덕리(長德里)를 들르시니라. 하루는 피노리에서 용전리(龍田里)를 지나 밤재 너머 장덕산 아래 장덕리에 가시어 회문산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산꼭대기에 올라갈 필요는 없다.”하시고 한참동안 공사를 보시니라. (道典5:179:7~9)
 
 


회문산 큰지붕으로 가는 길
일행은 다시 성미산을 넘어 안시내(安心)마을을 지나 회문산 휴양림 입구 매표소를 지났다. 그러자 회문산 표지석과 석축으로 성벽을 쌓아 올린 천혜의 요새지 노령문이 우리를 반겼다.
 
회문산(回文山)은 본래 한자 표기가 돌아나오는 문, 즉‘회문(回門)’이었다고 한다. 노령문은 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산의 회문 노릇을 하고 있다. 노령문을 지나면 빨치산 총사령부가 있었다 하여‘총사골’로 불리는 계곡과 구룡폭포 그리고 큰문턱바위와 작은문턱바위가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만 걸어 오르면 갈림길 오른쪽 산기슭에는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등극을 기원한 곳이자 수려한 산세에 취했다는 무학바위가 눈에 들어 온다. 예전에는 작은지붕 밑의 헬기장(650m)까지 차량운행이 가능해 큰지붕(회문봉)까지 수월하게 등반했었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한참 아래인 휴양림내 비목공원까지만 차량운행을 허락해 그곳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눈 덮인 등산로를 보면서 차량통행을 왜 금지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큰지붕까지 등반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일찍 출발했는데, 차량주차 후 등반 30분 만에 작은지붕 아래 헬기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일행은 여기서 강천산과 내장산을 바라보며 숨 한번 고르고 작은지붕을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지붕 중턱에서 보이는 돌곳봉과 석문(石問)이 있는 시루봉 너머 만일사와 옥새바위를 떠올렸다. 그리고 27년 동안 100일 기도를 100번 하면서 지극정성을 쏟은 무학대사를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서전서문의‘정일집중 건중건극(精一執中建中建極)’이란 구절을 외면서 작은지붕 꼭대기(780m)를 올랐다. 이곳을 오르니 장군이 투구를 썼다는 장군봉과 섬진강 댐을 막을 흙을 밀어오는 써래라고 하는 써래봉이 더욱더 가깝게 보인다.
 
 
천근월굴에서
 

작은지붕에서 큰지붕까지 가는 길은 잠시 내리막이다가 다시 오르막이다. 오르막 중턱에서 만나는 여근목(女根木)은 그 모양이 진실로 기이하다. 이어서 동초(東焦) 김석곤(金晳坤,1877~1953)이 썼다는 천근월굴(天根月窟) 바위가 나와서 잠시 그 뜻을 음미해 보았다. 천근월굴이란 구절은 상제님께서‘알음은 강절의 지식이 있다.’(2:31:1)고 말씀하신 송나라 소강절 선생이 복희팔괘를 읊은 시의 일부분이다. 음양의 변화와 조화를 읊은 것으로, 인체의 24마디와 12경락, 남녀의 생식기와 삼라만상을 표현했다. 천근은 양(陽)을 월굴은 음(陰)을 지칭한다.
 
천근월굴이란“우주는 일태극수(一太極水)가 동(動)하여 오황극(五皇極)의 생장 운동을 거쳐 십무극(十無極)에서 가을개벽의 성숙운을 맞이하니라.”(道典6:1:4) 하신『도전』말씀이 이루어지는 근원처를 지칭한 것이다. 즉“무극과 태극의 문명을 황극이 연다”(종도사님, 133.1.7)는 뜻이다. 문명의 시작이 천근월굴이며, 일음일양(一陰一陽) 정음정양(正陰正陽)이고, 천근월굴이 있는 회문산 오선위기 진주도수를 통해 세운과 도운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회문산 큰지붕에 서서 아버지산의 위엄을 느끼다
드디어 회문봉 정상에 올랐다. 참으로 통쾌하고 감격스러웠다. 일행은 행복감에 젖어 한동안 서로 말을 잃었다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늘이 뻥 뚫려 시원하게 펼쳐진 사방팔방에 멀리 보이는 첩첩산중 만산천봉, 그리고 산, 산, 산들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회문봉 정상에 우뚝 서니 상제님 천지공사의 숨결이 깃든 대부분의 산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역시 회문산은 명실공히 천지의 아버지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독자 여러분도 직접 올라보길 권한다. 절경 중에 절경이요, 명승지중에 명승지이다. 일행의 바램을 천지신명께서 아셨는지 오늘은 참으로 날씨가 청명하여 만방에 펼쳐진 모든 산들을 볼 수 있었다. 청명한 날씨를 허락해주심에 감사의 읍배를 올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곳은 지난달에 오른 솔봉 전망대. 그리고 시루봉, 돌곳봉, 깃대봉, 써래봉 등 회문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북으로 보이는 천지 어머니산 모악산. 오늘 따라 아름답고 너그럽게 보인다. 모악산을 중심으로 북(北)으로는 국사봉(농바우와 피노리 사이), 오봉산 등이, 동(東)으로는 마이산, 덕유산, 지리산 등이, 남(南)으로는 조계산, 무등산(광주), 무이산 등이, 서(西)로는 내장산과 불출봉, 방장산, 칠보산, 그 너머 정읍 두승산과 정토산, 태인 군신봉조와 그 위로 보이는 상두산과 구성산이 보인다. 산 하나하나에 어린 상제님 천지공사의 도수를 되새겨 본다.
 
 


회문산에 얽힌 빨치산 이야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빨치산 사령부를 재현해 놓은 비목공원을 둘러보았다. 바로 이곳이 이태(본명 李愚泰)의 소설『남부군』의 무대다. 이곳 울창한 숲 어딘가에‘사령트’라 불리던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있었다. 이현상이 사령관으로 있었고 자신들을‘승리사단’이라 불렀다. 이들을 통칭하여‘남부군’이라 했는데,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빨치산’이다.
 
회문산을 논하면서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이지만 그들의 삶을 반드시 이해하고 또 짚고 넘어가야 한다.
 
회문산 빨치산의 비극적인 역사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에서 패퇴한 공산반란자 중일부가 회문산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북진으로 고립된 인민군과 공산당들이 1950년 10월 여분산 가마골에 있던 전북도당을 회문산으로 옮겼다. 험한 산에 의지하여 활동을 전개하던 빨치산은 남부군 정치교육소‘노령학원’에서 많은 남부군 간부들을 양성시켰다. 700명 이상을 헤아렸다는 회문산 빨치산들은 1951년 국군 11사단 전투기까지 동원한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이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1951년 3월 2일 밤 각기 두 개 조로 나뉘어 소백산맥과 변산반도 방면으로 탈출했다. 이로써 회문산 빨치산의 시대도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좌우대립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고 좌우익을 떠나 이 땅의 젊은이들이 피흘리며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의 활동무대였던 회문산에는 지금 87만 평의 자연휴양림이 들어서 있고, 양민학살위령탑과 비목공원(빨치산사령부)이 조성되어 있다. 남부군 정치간부 정치훈련장이었던‘노령학원’자리도 삼림욕장으로 가꿔져 있다.
 
국군도, 빨치산도, 죄 없는 양민도, 그리고 한국전쟁 참전 16개국과 러시아, 중국도 그리고『남부군』의 이태, 박민자까지 모두 난장판 바둑의 바둑돌로 볼 수 있다(5:175:5). 시대의 소용돌이에 희생된 많은 중생들의 명복을 빌면서 나의 신앙을 재 다짐해본다.
 
지난 도기 133년 태모님 성탄치성시 증산도교육문화회관 태을궁으로『도전』개정신판 작업을 위해 증언해 주신 분들을 초빙한 바 있었다. 특히 안필성 성도의 손자 안일완 선생의 회한의 증언이 기억난다.
 
상제님께서 할아버지에게 50년의 수명을 떼어주셨다고 증언하면서 그날 참석한 전국의 증산도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상제님의 충언을 가볍게 생각하여 한국전쟁 당시 후손들이 좌우이념 대립으로 국군과 빨치산으로 나뉘어 싸우는 바람에 후손들을 잃었습니다. 이후 할아버지는 그때 증산의 말대로 했더라면 후손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탄식했습니다(10:76). 여러분들은 부디 증산 상제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잘 믿어서 가족을 보존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어서“여러분들은 복 받은 사람들 입니다. 잘 믿어서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거듭 당부했다. 당시 안일완 선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비감하게 증언하던 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안정리의 수호신 돌미륵불상
 

회문산 안심마을을 빠져나와 안정리(安亭里)로 들어서는데 눈에 익은 돌미륵상이 보인다.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왔냐며 반겨주시는 할머니를 보는 듯하다. 안내판의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 미륵불은 안정리 마을의 수호신이다”. 화전촌이었던 이곳 안정리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위로해주고 소박한 꿈을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였으리라.
 
본래 남녀미륵이 한 쌍 있었다는 기록을 보니 상제님과 태모님이 떠올랐다. 태인 불출암의 한쌍의 미륵불(1:30), 음양합덕의 이치가 갊어있는 마이산, 모악산과 회문산, 전주의 곤지산과 건지산도 생각났다. 그리고 두주막에서 회문산 오선위기 진주 도수의 음양 도수를 맡은 문공신, 차경석 두 성도님도 떠오른다. 음양공부가 우주변화원리 공부의 시작과 끝이라는 종정님의 말씀과 함께“상제님의 혼이 되자!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자!”고 내려주신 종도사님의 구호가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되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돌미륵상으로부터 발길을 돌리려니 또 오라며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진주천자 장군 도수가 붙어 있는 순창 농바우
순례자 일행은 순창 농바우에 도착했다. 신비롭고 또 신비롭기만 한 곳이다. 후천선경의 진주천자 장군 도수의 시작이 바로 이곳 농바우다. 농바우에 응기되어 있는 장군의 기운을 인사로 이화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 장군이 바로 오선위기 진주 도수의 주인공이다.
 
“이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의 형세에 붙여 돌리나니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하시니라. 이어 장근에게 이르시기를“너의 머슴을 불러 어젯밤 무엇을 본일이 있는지 물어 보라.”하시거늘 장근이 머슴을 불러 물으니 머슴이 대답하기를“어젯밤 꿈에 한 백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농바우를 열고 큰칼과 투구와 갑옷을 꺼내는데 장검은 서릿발이 돋은 듯하고 갑옷과 투구는 빛이 나서 눈이 부셨습니다. 신선이 칼과 투구와 갑옷을 저에게 주면서‘한 장군이 명(命)을 받들고 여기에 올 것이니 이것을 그 장군에게 주라.’하므로 제가 그것을 받아서 두었사온데 그 자리가 바로 저 자리입니다.” 하며 경석이 앉은 쪽을 가리키는지라. 상제님께서 들으시고“네가 꿈을 옳게 꾸었도다. 농바우의 전설이 허망한 말이 아니로다.”하시고 다시 장근에게 말씀하시기를“너는 이 공사의 증인이니라.”하시니라. 대저 그 지방에는 농바우 속에 갑옷과 투구와 긴 칼이 들어 있는데‘장군이 나면 내어가리라.’는 말이 전하여 오니라. (道典3:207:5~14)
 
농바우 옆에 사는 조일섭 옹(82세)은 일행에게 바위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옆에 있는 농바우를 비롯하여 집 뒤의 거울(비친)바위, 요강바위, 말바위, 집 아래 밭에 있는 문턱바위와 파묻혀버린 코푼바위와 호롱바위, 그리고 집 아래 소반바위와 가마바위, 그리고 농바우 입구 김진영 씨 집 장독대에 있는 계란바위까지 10개의 바위 이름을 알려주었다. 깔바위는 마을에서 수로 확장공사를 하느라고 깨버려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깔바위(3:209)에서 제(祭)를 지내시고 차경석 성도로부터 이종누님을 소개받아 정미년 11월 수부책봉 예식을 올리신다. 그리고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인 정미년 10월에 농바우에서 문공신 성도를 만나신다(3:204). 농바우에는 한 여성이 시집을 갈때 필요한 기물 형상이 구비되어 있어 신비롭다. 심지어는 시집갈 때 타고 가는 가마형상의 가마바위까지 있다.
 

이 농바우 공사는 상제님 어천 후에 현실화되는데, 농바우의 기운이 공사로 이화되어 인사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즉 태모님께 종통이 이어져 차경석 성도와 동갑장사, 즉 낙종 도수와 이종 도수인 보천교를 통해서 오선위기의 진주께서 인사적으로 출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공사이다. 농바우에서 떠나올 때 구절재로 돌아오고 싶어졌다. 구절재를 넘으면 태인 행단이 나온다. 그곳은 차경석 성도에게 삼략의 머릿장을 외워주시고“수부를 들여 세우라.”하신 곳이다. 회문산 정상에서 본 천하절경의 청화명려한 경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이, 일행은 또 다시 이념의 분수령인 구절양장의 구절재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공사(公事)가 인사(人事)로 넘어가듯 화경폭포를 지나서 이재전전(利在田田)의 땅, 대전(大田, 본래 지명은 太田)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남부군과 태백산맥
 

빨치산 출신의 작가 이태가 1988년에 펴낸 실화소설『남부군』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 회문산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가 자리했던 회문산이 소설의 주요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1990년에〈남부군〉으로 영화화되면서 당시 사회에 다시 한 번 반향을 일으켰다. 이태의 실화소설『남부군』(1988)과 조정래의『태백산맥』은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의 현대사 바로알기, 북한 바로알기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면서 빨치산 영화인〈남부군〉(이태 원작, 정지영 감독, 1990년)이나〈태백산맥〉(조정래 원작, 임권택 감독, 1994년)이 제작, 상영되어 그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해원 도수에 걸려 인생을 허비한 이들로 치부하기엔 그들의 인생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도 많다. 특히 조정래의〈태백산맥〉에서 외치는 그들의 구호‘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는 항상 내 귓가에 맴돌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세 번 죽을 각오를 했다. 토벌군의 동계 대공세로 빨치산은 보급투쟁으로 연명을 하는데 이때 나온 구호라고 한다.
 
나는 몇 번의 죽을 각오를 했나 반성하면서〈남부군〉에 등장하는 이태와 빨치산 간호사였던 박민자의 눈물 나는 사랑을 생각해본다. 동계 토벌작전 때문에 이태는 지리산으로 박민자는 변산으로 이동하는데(남부군에서 이태 분 안성기, 박민자 분 최진실) 그들의 이별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고 기억된다. 40년 후 이태가 회문산에 다시 방문하여 회고할 때“남부군은 북한과 남한 모두로부터 버림 받은 비극의 유격대다.”라고 하며‘지리산에 위령비라도 세우고 죽는 게 꿈이다.’고 했다. 박민자의 죽음은 글로로 쓸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다. 과연 그런 극한 고문에서 전향하지 않을 자가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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