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의 숙구지와 새울

진리가이드 | 2009.10.19 18:40 | 조회 5869
지금부터 134년 전인 1871년, 인간의 몸으로 이 땅 한반도에 강세하신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 강증산 상제님은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우주 대역사를 행하셨다. ‘천지공사`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언급한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술어로 이는 오직 천지 질서의 주재자,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언어세계이다.
 
천지공사의 내용은 크게 선천 5만년 인류역사를 심판하여 선천문명의 진액을 뽑아모아 후천 5만년 새문명의 기초를 정하신 일, 그릇된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로잡으신 일, 그리고 천지간에 가득찬 신명과 인간의 원과 한을 풀어 그들의 생사를 판단하신 일 등으로 이루어진다.
 
상제님이 천지공사를 집행하신 기간은 자그마치 9년간(1901∼1909). 이 9년 천지공사는 다시 세운공사와 도운공사로 나누어지는데 100년의 난법 시간대를 타고 인간과 신명이 하나되는 대해원의 물결 속에 현실로 파노라마 쳐왔다. 이제 운래시지(運來時至)하여 풍류주세백년진(風流酒洗百年塵)이라 말씀하신 그대로 100년의 난법해원 시간대가 다 끝나고 상씨름의 결승운이 무르익어 병란(兵亂)과 병란(病亂)이 함께 닥치는 후천개벽의 결정적인 순간에 다가서고 있다.

그러면 천지공사의 최종결론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영원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65억 인류를 열매 맺게 하여 후천 5만년 새 천지, 새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가?

상제님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천에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니라. (道典 4:5:4)
 
평천하(平天下)는 내가 하리니 치천하(治天下)는 너희들이 하라.
치천하 50년 공부니라. (道典 8:101:5)
 
천지질서를 바로잡으신 천지공사는 인사(人事)를 통해 최종 마무리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 인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상제님은 9년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어천(御天)하시기 나흘 전에 다음과 같이 공사를 보셨다.
 
기유년 6월 20일 아침 상제님께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치셨음을 성도들에게 선포하시니 경학이 여쭈기를 “공사를 마치셨으면 나서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없으므로 나서지 못하노라.” 하시거늘 경학이 재촉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겠습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되지 못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10:27:2)
 
천지공사의 최종 마무리가‘두 사람’의 출현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일월(日月)의 기운을 가지고 현실 역사 속에 오시는 ‘두 분의 스승’에 의해 의통(醫統)성업이 이루어짐으로써 후천 5만년 새 천지, 새 우주역사가 열린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지역을 가면 9년 천지공사의 수많은 공사 가운데 천하사를 매듭짓는 ‘두 사람’에게 성사재인의 천지기운을 붙이는 대공사를 집행하신 성스러운 땅이 있다. 바로 태인에 있는 숙구지(宿狗地)와 새울이다.
 
『도전』을 통해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공부할 때는 공사를 집행하신 시기[天]와 장소[地], 공사를 수종들은 성도들[人]의 이름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태인(泰仁)이라는 지명에는 ‘큰[泰] 사람 둘[仁=人+二]’이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태인 지역에서 보신 공사에는 천지공사를 매듭짓는 ‘두 사람’과 긴밀하게 관련된 공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숙구지 도수와 새울 도수는 9년 천지공사 가운데 마지막 해인 1909년에 집행하신 공통점이 있다. 상제님은 1908년 무신년 납월(음력 12월)에 집행하신 ‘무신납월공사’에서 포정소 도수, 핵랑군 도수, 혈식천추도덕군자가 배질하는 남조선 배도수 등 인류의 생사판단에 대한 많은 공사를 집행하셨다. 그리고 1909년 들어 8년 동안 집행하셨던 모든 공사를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는 인사(人事)의 참 주인 ‘두 사람’에 대한 결론적인 도수를 처결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어천하시던 해인 1909년 기유년 1월에 보신 태인 새울 도수(1월 15일)와 4월 무렵에 보신 태인 숙구지 도수다.

숙구지는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禾湖里)를 말한다. 신태인읍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 가면 평야를 가로질러 난 도로변 옆으로 화호리가 나온다. 화호리는 현재 4개 마을, 즉 용서(龍瑞)동, 용교(龍敎)동, 포룡(包龍)동, 정자(亭子)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지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정자마을을 뺀 나머지 3개 마을이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한 1914년 이전에 숙구지라고 불리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화호라는 이름은 본래의 자생적인 이름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한편 용서, 용교, 포룡동 등의 마을 이름도 1914년 이전에는 쓰이지 않았고, 다만 그 지역 전체가 숙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말한다.
 
지금의 화호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이가 도시로 떠나버린 후 마을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衰落)해 있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스런 마을이었지만 이곳 저곳 빈집이 생기는 가운데 속으로는 활기를 잃고 있는 것이다.


화호리 마을에서 만난 젊은이들 가운데 이곳 지명(地名)이 불과 수십년전 만해도 숙구지였음을 아는 이는 찾기 어려웠다. 다만 60이 넘은 분들만이 그것을 알뿐이었다.
취재진은 이 곳에서 태어나 숙구지 마을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을 촌로 몇 분을 수소문하여 이야기를 청하였다. 몇년 전까지 ‘숙구지 경로당’을 만들어 운영해왔던 용서마을의 조찬욱(77세) 옹은 마을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증언했다.
 
“1985년 마을에 경로당을 만들 때 이름을 ‘숙구지 경로당’이라고 했습니다. 행정상 화호리라는 지명이 있으나 굳이 숙구지라는 옛 이름을 딴 것은 이곳의 본래 이름이 숙구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숙구지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어느 도사가 전라북도 부안 변산과 고부 두승산 등의 산세와 인근 지형을 살피고 나서 개 구(狗)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아홉 군데 붙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배양구지, 돌구지, 역구지, 흙구지, 서구지, 미륵구지, 거멍구지, 진구지, 숙구지의 구구지(九狗地)입니다. 그 중에 우리 마을이 숙구지(宿狗地) 인데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찬욱 옹은 구구지의 이름을 붙인 도사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조선시대 언제였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다음은 정자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박종묵 옹(80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곳 정자마을에서 1923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숙구지는 저 너머 동네이고 제가 사는 곳은 정자마을입니다. 지금은 정자마을까지 포함해서 화호리라고 하지만 정자마을은 본래 숙구지와는 별개입니다. 하지만 숙구지와 정자리는 붙어 있으므로 나름대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근방에 구지(狗地)가 아홉 개 그러니까 구구지가 있으며 옛부터 구구지(九狗地)가 피난처라는 말이 전해 옵니다(편집자 주, 일설에는 구구지중에 하나가 가활만인의 피난처라는 말도 있다). 일제시대 이곳 숙구지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구마모또[熊本]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농장을 비롯하여 몇 개의 대 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근방의 토지를 전부 사들여 조선 사람에게 소작을 주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쌀을 몽땅 군산으로 실어 날라 일본으로 빼돌렸습니다.
 
제가 살아보았지만 농사 짓기에는 여기 숙구지 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기후도 좋고 다른 곳은 물난리가 있지만 여기는 없습니다. 정읍천 고부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동진강으로 잘 빠지고 수해도 없어 농사짓는데는 여기가 최고입니다. 쌀도 여기 만한 곳이 없습니다. 특히 밥맛이 아주 좋은데 불과 얼마 안 떨어진 신태인 근방만 가도 쌀맛이 여기보다 못해요.
 
숙구지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고구마입니다. 예전에는 고구마도 흔히들 감자라고 불렀는데(따라서 숙구지 감자) 얼마나 컸는가 하면 큰 호박만 했습니다. 나랏님께 진상했다고 하는 이 고구마는 너무 크다보니 중간이 터져서 갈라졌기 때문에 ‘봉지 터진 숙구지 감자나 먹어라’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습니다. 저 이북에 사는 사람도 ‘숙구지 감자’하면 다 알 정도로 숙구지는 유명했습니다.”

박종묵 옹의 증언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일제 시대만 해도 숙구지는 이 부근에서 가장 큰 곳이었습니다. ‘숙구지장’이라는 5일장이 섰는데 소장[牛市場]도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이리로 와서 장을 봤습니다. 자연히 이곳 사람들이 왕초노릇을 했고 이 근방 청년들 세력이 굉장히 컸습니다. 또한 술집도 많고 각시집도 많았으며 저녁마다 노래 부르고 난리치고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없어지고 농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 숙구지가 이 근방의 중심지였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호남선 철도가 이곳 숙구지를 통과하려고 했는데 이곳 사는 일본 사람이 반대해서 저쪽 신태인으로 났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국민학교 보통학교도 여기가 빨리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숙구지는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겁나게 컸던 곳입니다.
 
한편 숙구지에는 옛부터 학알뫼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학(鶴)이 알을 품고 있는 잔등이, 고개[峙]라는 의미인데 지금 인상고등학교 있는 자리가 그곳입니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평지 모양으로 되어 있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그곳에는 솔밭이 있었고 산과 다름없이 나무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밤길에 그곳을 지나면서 어린 마음에 무서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저는 늘 곳을 지나면서 왜 이름을 학알뫼라고 했을까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인상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교건물이 마치 학의 색깔처럼 하얗게 칠해지는 것을 보고는 학알뫼라고 이름 붙은 것이 맞긴 맞는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보통의 농촌 마을이지만 숙구지는 옛날부터 유명한 곳입니다. 이 근방에서 태인 숙구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용서마을서 만난 조찬욱 옹(77세)은 숙구지에서 태어나 이곳의 일본인 소학교 고등과 [당시 화호리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를 나오신 몇 분 안 되는 토박이 증언자다. 조옹은 숙구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제의 식민지 수탈상을 이렇게 증언했다.
 
“이 근방 농경지를 일본 놈들이 금력과 권력을 앞세워 다 샀습니다. 웅본[熊本, 구마모또]이라는 사람이 여기에서 만석을 했으며, 니시무라[西村]라는 사람이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동척 농장과 전식 농장도 있었습니다.
 
저 멀리 고부 두승산서 바라보면 이곳 숙구지가 개가 자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발이 따수어야 자고, 소는 등어리가 따수어야 자고, 개는 주둥이가 따수어야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웅본이라는 자가 어떻게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자는 형상의 숙구지에서 개 주둥이로 여겨지는 곳에 곡식 창고를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5∼6동이 있었는데 두 채는 6·25때 인민군에 의해 불타고, 한 채는 뜯겨나가고 그후 지금은 한 채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가을 추수기가 되면 30리 안쪽에서 한국인 소작민들이 소구루마에 나락을 싣고 옵니다. 당시 웅본 농장은 서기를 30명씩이나 두고 관리를 했는데 평뜨기라는 것을 해서 소작료를 받았습니다. 평뜨기는 한 평에 얼마의 소출이 나오면 그것에 준해서 전체 소작료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소작민들은 소작료 고지서에 의해 소구루마, 말구루마에 나락을 싣고 왔는데 웅본 농장에는 풍구가 50여개, 인부가 1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작료가 너무도 가혹해서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일본놈들은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른 후 몽땅 일본으로 싣고 갔습니다.”


“일제시대 숙구지는 이 부근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두 개의 지서와 한 개의 우체국이 있었는데 그 정도라면 상당히 큰 곳입니다. 호남선 철도가 신태인으로 나면서 면사무소가 그쪽으로 나갔지만 그 전까지는 이곳이 확실히 중심지였지요. 건달들도 많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보통 혈족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에선 인심이 후해서 사소한 잘못은 덮어주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는데, 이곳 숙구지에는 각성바지(성이 각각 다른 사람)가 살다보니 하나가 나서려고 하면 꺾어 버립니다. 그만큼 까실하고 까시가 센 곳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특별한 것은 이곳 숙구지 장날에 상씨름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상씨름이란 소를 걸고 하는 씨름인데 전국에서 이름난 장사들이 모여드는 큰 규모의 씨름이었지요. 화호 숙구지에서 씨름한다고 광고를 부치면 금방 소문이 나고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장사들이 왔습니다. 당시 씨름에서 이겨 중(中) 소를 타 가지고 가면 명예도 명예지만 옛날 농경사회에서 소는 중요한 재산이 됐지요. 씨름은 보통 한 사흘간 했습니다. 처음에는 군단위로 씨름을 붙이다가 나중에는 도 단위로 붙이고 이렇게 계속하면서 결국 가장 센 사람, 상씨름꾼이 나옵니다. 배들이라는 동네에 송장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소를 두어 번 따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지를 돌아보며 촌로들의 증언을 들으니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던 1900년대 초 이곳 숙구지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상제님은 “‘잠자던 개가 일어나면 산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는 개가 호랑이를 잡는다는 이야기가 이미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과연 이 말씀과도 같이 개가 호랑이를 잡는 일이 있다는 것인가?
 
취재진의 지식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누구나 인정하듯이 백수(百獸)의 왕이며 산군(山君)으로 통하는 맹수로서 여타의 어떤 동물도 호랑이를 이기거나 잡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제님은 개가 산 호랑이를 잡는다고 말씀하시며, 이곳 태인 숙구지의 지기(地氣)를 취하시어 천지공사의 최종 결론도수를 집행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넷을 샅샅이 살려본 취재진은 놀랍게도 호랑이 사냥에 동원되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얘기였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이미 KBS와 EBS 등의 방송매체를 타고 ‘호랑이를 잡는 개’의 활약상이 알게 모르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호랑이를 잡는 용감무쌍한 개에 대한 동영상 비디오는 ‘호랑이 잡는 라이카’사이트 www.laika.co.kr와 EBS 방송국 www.ebs.co.kr에 올려져 있다. 특히 1998년에 EBS에서 방영한 「자연다큐멘터리」정부수립 50주년 기념 7부작 제6편 ‘잃어버린 야생의 동물을 찾아서’편에는 호랑이 사냥에 등장하는 개에 대해 잘 나온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토종개로는 삽살개, 진돗개, 풍산개를 든다. 이 가운데 풍산개는 주인과 함께 호랑이 사냥에 나서는 개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을 인용해 본다. 
 
‘풍산개는 사람에게는 순종적이고 온순하지만 동물 앞에는 민첩하고 용맹스러워 사냥개나 군견으로 활용되는 우수한 품종의 개이다.
 
예로부터 풍산개 두 마리만 있으면 호랑이도 잡는다는 설이 구전(口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용맹성과 대담성은 다른 개와 비교될 수 없다. 잡개들은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나면 오줌을 질질 싸면서 집안으로 달려가지만, 풍산개는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다른 풍산개가 가세하면 호랑이를 공격한다고 한다.
 
풍산개의 용맹성과 대담성은 세계의 어느 견종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풍산개는 평소에는 주인에게 철저하게 순종적이나, 상대가 적이라고 판단되면 단 일격에 급소를 무는 습관이 있다. 풍산개는 한번 기억한 주인 외는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강아지 때부터 사육을 하지 않으면 길들이기가 힘들다고 한다. 즉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인 셈이다. 북한의 자료에 의하면 풍산개의 유래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번째는 풍산군 일대의 토착견이 승냥이(늑대)와의 교잡으로 고산 산악지대에 잘 적응하여 발전한 것이 지금의 풍산개라는 설이다.
두번째는 시베리안 라이카와 중국의 고리드족 개의 후손이라는 설이다. 호랑이 등과 같은 맹수를 추적하고 사냥을 할 수 있는 대담성을 가진 개는 풍산개와 시베리안 라이카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시베리안 라이카는 중국 국경지대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활동하는 시베리아(동북) 호랑이를 사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들이 개마고원 일대로 유입되어 그 지형에 잘 맞게 체형과 성품이 다듬어진 것이 오늘날의 풍산개라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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