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이후 적막강산 근백년에 담긴 의미

2009.10.16 | 조회 4185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과 순종이 떠나가던 날의 역사적 현장
 
천개어자 지벽어축 인기어인 도수에 따라 상제님께서 임인년(1902)에 인간역사과정에 처음으로 천지공사의 첫발자국을 떼신 이래, 올 임오년(2002)까지 꼭 100년의 시간이 흘러왔다.
 
乾坤不知月長在 건곤부지월장재하고 寂寞江山近百年 적막강산근백년이라(道典 10:19:6)
 
적막강산(寂寞江山)은 사람이 없어 아주 적적하고 쓸쓸한 풍경을 이르는 말이다.

안경전 종정님께서는 일찍이 ‘적막강산근백년’이란 상제님 천지공사 후 이어지는 근 100년의 과도기 과정(해원시대)을 일컫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즉 조선의 마지막 통치자인 고종, 순종이 폐위되어 나라에는 주인이 없고, 이 땅의 백성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지경에 처하는 세월이 근백년 동안 지속된다는 말씀이다.

이번 호에서는 도전 10편 19장 6절의 “건곤부지월장재하고 적막강산근백년이라”하신 성구말씀을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 순종의 사진과 함께 되새겨보기로 한다.
 
최초이자 최후의 황제

 
고종과 순종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마감한 최후의 임금이다.
고종은 1897년 조선왕조사에 최초이자 최후로 ‘황제’로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하고 ‘광무’원년으로 연호를 고쳐쓰는데, 이는 조선이 자주적 주권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된다. 이는 당시 러시아와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외세의 간섭 와중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마저도 거부한 조선왕조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 두 황제는 “일본사람이 천지의 일꾼이 되어 조선에 와서 남의 집을 산다”(道典 3:22:4)하신 상제님의 공사에 따라,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비운의 황제로 기록되었다.
 
일본의 조선침략과 고종황제의 슬픔

1863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중국에 예속되지 않은 자주국임을 내외에 알리고 광무라는 연호를 선포함으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당시는 왕비 명성왕후가 군대를 동원한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1895 을미사변) 이에 충격받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가(1896 아관파천)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한 후였다.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을 짓고, 옥황상제 위패를 모셨다. 이로써 고종황제는 상제님을 모신 정통성 있는 황제로서의 위상을 되살려내고, 비로소 중종 이후 소각, 상실되었던 제천문화를 일시적으로나마 복원해낸 셈이었다.
또한 고종황제는 단발령에 따라 먼저 자신의 상투를 잘라내기도 했다. 그러나 1897년 시작된 광무개혁은, 이미 가까운 일본을 비롯한 서양의 앞선 나라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한국 제9조에서 선포한 바와 같은 자주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것이다.
반면 일본은 개화파를 앞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압력을 가한다.

 
마침내 1904년 러일전쟁을 핑계로 군대를 동원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을 둘러싼 강대국간의 상대적 우위를 이용, 한일의정서를 강제조인하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 체결을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기 시작한다. 이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실제적인 지배에 들어가자,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세계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오히려 이를 빌미로 강제퇴위를 당하고 만다.
고종 황제는 1919년 1월 한많은 세월을 마감하였다.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독살되었다는 설이 시중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는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

 
 
순종은 1875년 세자로 책봉된 후,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고종이 이완용(李完用)의 강요에 못이겨 헤이그 밀사사건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이어 순종이 24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미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그해 8월 1일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마저 해산되었으며, 12월에는 황태자 영왕(1897-1970, 순종의 이복동생, 일본이 영친왕으로 격하하여 부름)이 유학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1908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설립을 기화로 경제침탈의 길을 뚫은 일본은 1909년 조선의 국권탈취공작을 착착 추진,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합병조약을 조인함으로써 마침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만다.
 
결국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조선왕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후 한일합방 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한 침략아래 36년의 긴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1945년 대망의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은 예전의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서양에서 도입된 민주주의에 의한 대통령제로 바뀌게 된다. 이후 상씨름의 초판싸움인 6·25가 발발하고, 휴전 그리고 4·19, 5·16등을 거치며 민족의 시련기를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그 사이 정치체제는 잠시 장면총리가 이끄는 내각책임제가 있었지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선거로 통치자를 뽑는 대통령제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그런데 상제님의 ‘적막강산근백년’이란 말씀은 군사부 일체로 원시반본이 실현되어 대한강토에 진정한 새 주인이 나오기까지 백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는 말씀이다. ‘풍류주세백년진’, ‘백년탐물일조진’이란 말씀과 함께 오늘의 일꾼들에게 후천개벽의 대운을 예고하는 말씀인 것이다.
 
위 사진들은 코리안포토koreanphoto.co.kr를 통해 100년전 한국의 모습을 추적,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사진연구가 정성길 씨가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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