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공사 집행 당시의 조선 군대

2009.10.16 | 조회 3378

 
상제님께서 한많은 간방의 땅 한반도에 오시어 개벽공사를 집행하신 지 100년, 증산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실 당시 조선군대의 모습과 상황을 간단히 소개한다.

 
 
*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시고 성도들에게 군대에서 쓰는 물건을 준비하게 하시고 열(列)을 지어서 진군(進軍)하도록 명하시니라.
  군량과 그릇을 메고 뛰어가는 소리를 질러 위세를 떨치고 행군 구령소리를 내어 장령(將令)의 기강을 세우고 장령을 복창하여 군율(軍律)을 집행하니 행진하는 모습이 지엄하여 한밤중이 소란하니라. … 행군을 마치신 후에 준비하신 돈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오늘 밤에 행군을 잘하였도다.” 하시니라. (道典 5:250:1∼8)
 
증산 상제님께서는 무신(1908)년에 천하사 군령(軍令)을 바로잡는 대공사를 집행하셨다.
 
이 공사를 보시기 1년 전인 1907년, 당시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자주적인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 때 대한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군대는 병적(兵籍)에 기록된 수가 15,000여명에 불과했다. 한국병합 음모를 착착 진행해오던 일제는 수도권 궁궐을 지키고 있던 2,000여명의 무장병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8월 1일 마침내 전격적인 무장해제와 동시에 군대해산을 명했다.
 
강제해산된 한국군의 분노가 폭발했고 1대대장 박승환이 이에 항거하여 자결하였으며, 군졸들은 무기를 탈취해가지고 영외로 나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제3차 의병전쟁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9월에는 육군무관학교마저 폐교함으로써, 한국의 자주적인 무관양성의 길이 원천봉쇄 당하고 만다.
 
 
한국군은 외세 간섭의 와중에서 대한제국이 주권국가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최후의 보루였다. 따라서 한국군 강제해산 사건은 한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장해제 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진을 통해, 서세동점의 시기에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구한국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1]은 개항 이후 달라진 군인의 모습이라지만,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사진2]는 러시아 일본 등 외국인 교관이 들어와 신식 군대훈련을 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의관을 갖추고 사열을 하는 현대식 군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제님의 공사가 시작된 1901년 전후의 모습이 이들 사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상제님 9년 천지공사의 후기로 들어가는 1907년 전후의 시대상황은 참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1909년에는 일제가 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에 들어가, 당시까지 의병으로 피살된 조선인의 수가 수만명에 달하고, 부상당하거나 포로된 수도 수천명에 달했다 하니, 구한말 격동의 현장에서 몸부림쳤던 선조들의 의기가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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