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의 새벽을 연 한민족의 시조, 태호복희

2009.10.16 | 조회 7616


 


 


 
복희씨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인가
 
지난 4월 29일, 북경에 도착했다. 해외촬영이라는 설렘도 잠시, 곧바로 촬영스케줄로 돌입하면서 우리의 빡빡한 일정이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많은 복희묘와 복희씨의 사당이 있다.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가장 큰 규모의 하남성 회양현 복희묘, 가장 최초로 세워진 신락시 인조묘, 『환단고기』에 나온 산동성 미산현 복희묘, 그 외에도 하남성 맹진현의 용마부도사, 감숙성 천수시의 복희묘, 괘태산 복희대, 서화현 구지애가 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 전부터 몇 가지 의문점을 안고 출발했다. 첫 번째는 왜 이렇게 복희묘와 사당이 여러 곳에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료조사 중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 신시에서 태어나 송화강(추정)에서 팔괘를 그으시고 산동성 어대현(현재 미산현)에 묻히셨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중국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그와 반대로 중국대륙 서쪽 깊숙한 곳(현재 감숙성 천수시)에서 태어나 하남성 회양현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본다. 

 
하남성 회양현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산동성 미산현이 있다. 즉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왔는데, 산동성까지는 뻗어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명확히 엇갈리는 두 가지 이동경로,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든지, 아니면 둘 다 지어낸 이야기?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복희씨에 대한 문헌기록은 「제왕세기」이다. 거기에 따르면, 복희씨는 ‘구이에서 태어나 성기(成紀)에서 자라고 어대현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성기(成紀)라는 지명을 중국대륙 서쪽에서 찾다보니 현재 감숙성 천수시 주변의 ‘성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구이에서 태어났다는 대목은 구이족(九夷族, 동이족의 다른 말)이 아닌 구지산(仇地山)에서 태어난 것으로 끼워 맞추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복희씨를 동방 동이족이 아닌 서방 중국인의 조상이며, 동방으로 문물을 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관점이 정해졌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졌다. 현지 답사 중 알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왕고리(羲王古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던 것이다.
 
중국 전역에 펼쳐진 수많은 복희묘와 복희사당은 문화혁명(1966∼1976) 때 파손되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런데 강택민 주석이 글을 쓴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묘와 사당이 새로이 복원, 보수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배달국 영역에는 ‘성기’라는 지명이 없을까. 안타깝게도 『환단고기』에는 거기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어쩌면 본래 있었던 성기라는 지명을 중국 정부에서 바꾸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산동성 미산현의 복희묘는 현재 중국 복희묘 중 규모가 가장 작으며, 더욱이 사당 내부는 사당을 보수하는 인부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산동성의 복희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몇 가지 단서만 찾아낸다면 한민족의 조상인 복희씨의 역사, 나아가 배달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을 듯했다.
 


이미 중국사가 되어버린 태호 복희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희망은 하북성 신락시의 ‘복희제의’라는 축제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절실히 실감했다.
 
하북성 신락시는 소림사가 있는 석가장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다. 그 신락시에 제곡고신께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복희묘인 ‘인조묘(人祖墓)’가 있다. 그곳에서 지난 5월 2일부터 5일까지 제3회 ‘복희제의’가 벌어졌다.
 
원래 그 축제기간 동안 신락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행사 참가는 물론 촬영도 불가한 지역이다.
 
그런데 북경에서부터 안면을 튼 복희문화연구소 소장, 신락시 시장, 축제관계자 등의 인맥을 통해 운 좋게도(?) 신락시 행사관계자의 자격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이번 행사 관람인원이 약 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규모를 실감케 했던 큰 행사였다. 또한 그곳에 200명 가량의 복희 전문가들이 모였다.
 
국내에서 복희씨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복희씨에 대한 자료의 빈곤함, 강단사학계과 재야사학계의 견해차 등으로 인한 어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복희씨 연구와 관련해서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작은 도시 신락에서 만난 복희 관련 전문가들은 수십 개 단체, 수백의 인원이었고, 또한 그들은 매년 이러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욱이 축제에 참가한 20만 명의 중국인들 대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터지만, 복희씨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인 복희씨를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 사이, 이곳에선 복희씨에 대한 제사는 이미 그들의 생활 일부였고, 인류의 시원문화가 복희씨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 힘으로 자기네들이 세계를 통일 지배할 수 있다는 역사적 우월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는 행사가 열리면 100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저력을 무시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사를 밝혀 세계무대에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은 ‘태호 복희씨는 동이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동이족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한족에 흡수된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문화의 태일신(泰一神), 태호 복희 

이렇게 태호 복희씨를 추앙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아이러니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당과 무덤에 수많은 팔괘와 육십사괘가 그려져 있지만 제대로 그려진 팔괘는 단 한 곳(하남성 천하제일묘)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실소하기도 했다.
 
태호 복희씨의 사당에 가보면 웬만한 곳에는 일획개천(一劃開天)이란 글귀가 써 있고 용마상이 있으며 복희씨의 업적도가 그려져 있다(하지만 미산현에는 없다). 업적도를 한 장씩 사진으로 담으면서 지금까지 글로써만 읽어왔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태호 복희씨의 업적을 마음속에 새겨볼 수 있었다.
 
복희씨께서는 인류문화의 모태라고 하는 팔괘와 하도를 지어 후세에 전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문자를 만들고, 인류의 최초의 성씨를 열었으며, 결혼제도를 세우고, 가축사육법을 개발하는 등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류문화의 근간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는 이러한 복희씨에 대해 “태호 복희(太昊伏犧)는 인류문화(人類文化)의 태일신(泰一神)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감숙성 천수시에서 복희씨의 업적도를 보며 『도전(道典)』 말씀을 떠올렸다. 진정 인류문화의 시조이신 태호 복희씨, 가슴속에서 그 분이 큰 태양처럼 밝아오는 것 같았다.
 
황사의 발원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 아래의 천수시 복희묘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용마를 만날 수 있었다(참고로, 용마라고 하면 중국에서도 대부분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가진 괴수를 생각한다.
 
그런데 용마란 본래 8척(2.4m) 이상의 아주 큰 말, 혹은 물에서 나왔으므로 비늘이 있는 말을 뜻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문질러서 콧등이 반질반질해진, 비늘까지 달려있는, 실제와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되는 용마였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눈빛에 사로잡혀 사진 한 장을 남기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
 
 
‘물속에서 말이 나와서 선천문화가 열리게 되었다!’ 이 얼마나 멋진 상징인가!
 


상생방송의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하루 3∼5시간의 수면, 길게는 10시간씩 좁은 승합차로 장소를 옮겨가며 중국 전역을 누볐다. 때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위험한 빗속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중국 공안의 횡포에 촬영한 테잎을 지우고, 그러면서 다시 또 몰래 촬영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간절함이 뚝배기에 국 넘치듯 끓어올랐던 보름간의 치열했던 일정들. 짧은 지면으로 미처 다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은 곧 제작될 다큐멘터리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상생방송(STB)은 태호 복희씨 뿐 아니라 많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정신을 바로 세워나가고자 한다.
 
세계무대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방송국이자 가장 세계적인 방송국으로 우뚝 설 STB의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며, 도전의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일곱 글자에서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 사학계와 방송계에 던질 파문을 생각해 본다. _ 이창욱/STV 상생방송 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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