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열전]-의로움의 상징 관운장(關雲長)

2011.06.03 | 조회 8681



관운장



의로움의 상징 관운장(關雲長)

박수영 / 객원기자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 왔다가는,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살다가는 저 세상으로 갑니다. 사람 가운데는 역사 위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도 하는 반면 추한 이름을 남기기도 합니다. 유방백세(流芳百世)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유방백세는 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말이요, 유취만년은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오래도록 남긴다는 뜻입니다.


관운장2

우리는 신묘년의 새해를 열면서 한 역사의 인물을 조명해봄으로써 우리들 각자의 고귀한 삶에 거울을 삼고자 합니다. 그 주인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삼국지의 주인공 관운장입니다. 일개 무장에 불과하였던 관운장이 어찌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아름다운 이름이 회자되며 살아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사람의 지상에서의 삶은 잠깐이지만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을 깨우치게 됩니다.


조선에 세 번 보은하는 관운장
관운장은 의리와 용맹의 표상으로 손꼽히는 성인입니다. 관운장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대인대의(大仁大義)를 기려 역대 왕조에서 관왕묘를 세워 극진히 대접을 하며 성제군(聖帝君)으로 추앙해 왔습니다.


관운장은 우리 민족과 어떤 인연이 있길래, 우리 민족이 수백년간 관운장을 경애하며 잘 받들어 주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인즉, 임진(壬辰)왜란과 정유(丁酉)왜란 때에 관운장이 영혼으로 나타나 우리나라의 국운을 도왔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었다.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하였다. 행주(幸州) 싸움에서 이길 때에도 신병이 나타났다 한다.
(《연려실기술》,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조선시대 야사의 총서. 기사본 말체로 서술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전투1593.01와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성전투1597.12를 말함)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성전투와 울산 도산성전투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과 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임진록」(壬辰錄)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나온 작자와 연대 미상의 군담소설로한글본과 한문본이 있다. 사명당, 이순신, 서산대사 등의 활약으로 적군을 물리치고,일본까지 쳐들어가 도술로써 일본 왕의 항복을 받고 개선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침략해오니 선조(1552-1608)는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명나라 신종(1563-1620)이 보낸 이여송의 구원병이 합세하니,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기 위해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왜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천의 신병이 나타나 왜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빼앗겼던 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날 밤, 신병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관운장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연은 이러합니다.


선조대왕 25년 때였습니다. 선조는 춘곤을 못이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보니, 위풍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든 채 삼각수를 휘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들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삼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여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와 동생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순국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우리 삼형제는 생애를 마치고 영혼이 되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의리를 지켜오지 않았는가.


이에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친 고로 환생이 안되고, 아우는 현재 조선의 선조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 큰 병란이 일어날 것인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세월만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곧 표독한 왜적이 조선에 쳐들어올 텐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에게 구원을 청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말고 행하게.”


선연히 사라지는 장군의 뒷모습에 깜짝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대왕이 조정의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논의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지라 힘없고 나약한 조정에서는 별다른 도리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선조 25년 4월, 15만에 달하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서울로 진격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입니다.선조는 할 수 없선조는 할 수 없이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삼천리강산은 초토화되었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습니다.


선조는 의주에서 명나라 신종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신종은 이여송을 총수로 한 5만의 군사를 파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전쟁은 가까스로 끝이 납니다. 처절했던 7년간의 오욕과 수모를 남긴 채 말입니다.


조정에서는 그 후에 관우를 기리어 관왕묘*를 건립하였으며 이에 명나라 신종이 사신을 보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합니다. 이처럼 조선에 원정 와서 왜적을 무찔렀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조선에 처음으로 관운장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관왕묘최초로 세워진 것은 1598년(선조 31)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지금의 남대문) 밖에 건립된 남관왕묘입니다. 남관왕묘는 명나라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요청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서울에 건립된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공사 끝에 1602년 봄에 준공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도 1598년을 전후하여 강진·안동·성주·남원 등4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뒤 고종 때에 와서 다시서울에 북묘·서묘를,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세웠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과 중구 장충동에 남아 있는 관성묘가 각각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호와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관운장이 조선에 세 번 보답을 한다는 뜻으로 삼보조선(三保朝鮮)이라는 말이 「춘산채지가」에도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옵니다.


도원결의 하실적에 만고대의 누구신고
황금갑옷 떨쳐입고 적토마상 비껴앉아
봉의 눈을 부릅뜨고 삼각수를 거사리고

청룡도를 손에들고 중원회복 하려들 제
추상같이 높은의리 만고일인 이아닌가
임진출세 하실적에 삼보조선 하신다니
무섭더라 무섭더라 의리의자 무섭더라


「( 춘산채지가」(春山採芝歌) 남조선뱃노래 편, 한학의 4대가 중 한명으로 조선 순
조 때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남긴 비결서.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함께 우리 민족의 비서(秘書)로 꼽힌다.)


정의의 화신 관운장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정의로운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유비와 장비가 소패에서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비성에서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보호하고 있던 관운장도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었지요. 조조의 공격을 피해유비의 두 아내와 도망을 가던 관운장은 조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게 되면서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조조의 부하장수이면서 관운장과 친했던 장요가 찾아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관운장의 자결을 막습니다.“첫째는 도원결의에서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는데 여기서 자결하면 그 결의를 져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유비가 두 형수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당신에게 의탁시켰는데 자결을 하면 두 사람은 누구에게 의지를 하겠는가. 셋째는 지금 자결하는 것은 한(漢) 왕실을 받들어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겠다는 대망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며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자 관운장도 세 가지의 조건을 내걸며 투항을 하였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漢)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이다. 둘째 두 형수님의 생명을 보존해줘야 하며, 마지막으로 형님이신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 면 언제든지 떠날 것이다. 그것을 허락한다면 항복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투항을 하자, 조조는 자기 밑에 관운장을 데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3일, 5일마다 연회를 베풀어주고, 벼슬도 주고,적토마도 주고, 금은보화도 주면서 마음을 뺏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조조의 뜻은잘 알겠으나,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었으며,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을 져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수훈을 세워 은혜를 갚고 떠날 것이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리고 유비가 원소 밑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유비의 두 부인과함께 적토마를 타고 떠나게 됩니다.


그 밖에 관운장이 의리를 지킨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투항 당시 관운장은 무명으로 만든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조조가 비단으로 만든 새 옷을 줍니다. 그러자 관운장은 새 옷을 안에 입고, 유비에게 받은 낡은 옷을 다시 겉에 입으면서 유비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적토마를 줍니다. 그런데 옷을 줬을 때는 시큰둥하던 관운장이 적토마를 받고서는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왜 절을 하느냐?’하고 물으니‘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니 적토마를 타면 형님이 어디에 계시든 하루 만에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유비의 편지를 받고나서 유비한테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조가 관운장이 도착하기 전에 유비가 죽었으면 어떻게 할꺼냐고 물으며 남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관운장은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 봉해서 두고, 오직 적토마만 타고 두 형수를 호위해서 다섯 관문, 오관을 돌파해서 유비를 찾아갑니다.


뒷날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도망을 갑니다. 그때 관운장은 자신이 조조를 잡겠다며 제갈공명에게 자기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조조를 살려주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명세를 하고 조조를 잡으려 갑니다. 하지만 관운장은 과거에 조조에게서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결국 조조를 살려주게 됩니다. 결국 관운장은 손권에게 잡혀 목이 잘리게 됩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옥은 깨어져도 그 빛은 변하지 않는다.’내가 죽더라도 나의 의로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운장은 왜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까?


삼국지를 읽어보면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제갈공명을 비롯하여 싸움을 잘한 기라성같은많은 장수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는 관운장보다 더 용맹했던 장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치고 관운장은 역사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에의해 칭송받으며 나아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관운장은 비록 100년도 안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또한 그의 최후는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는 슬픈 과정 속에 끝났지만, 그는 죽음과 함께 부활하여 역사 속에 영원히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과연 그의 어떠한 행동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의로운 행동때문입니다. 만일 관운장이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조조의 회유책에 마음을 뺏겨, 조조에게 충성을 받치고 도원결의를 변절하였다면 그는 훨씬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쁜 여자들에 의해 둘러싸이고, 좀더 좋은 집에서 살며,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운장은 현실의 눈앞에 보이는 영화를 구하지않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바로 관운장을 역사에 부활시킨 것은 그 의로움, 의리였습니다.이제 음력도 설이 지나 본격적인 신묘년 토끼의 해를 맞았습니다. 독자여러분도 올 한 해 의를 저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한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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