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경영한 인물의표상 강태공

2011.09.17 | 조회 12076

박수영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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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요 국란(國亂)에 사양상(思良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세계는 국가간에 경제력을 중심으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인재를 꾸준히 기르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척하는 나라는 국민을 배불리 먹이며 일등국이 되지만, 인재를 기르지 못하고 국가 경영에 실패한 나라는 국민을 고생시키며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만물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 역사의 인물을 조명해 봄으로써 정말로 능력있는 한 사람의 힘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나아가 천하만민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주인공은 우리 한민족의 선조 가운데 한분이셨던 강태공입니다. 강태공하면 흔히들 낚시꾼의 대명사로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삶을 알게 되면 과연 천하를 경영했던 위대한 CEO였음을 알게 됩니다. 아울러 그의 인간경영, 국가경영의 가르침은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난세에 세상을 낚는 낚시꾼…
오늘날 낚시꾼의 대명사가 된 강태공. 본명은 강상(姜尙)이며, 여망(呂望) 혹은 태공망(太公望) 등으로 불리웁니다. 강태공은 기원전 1,100년 전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의 인물입니다. 주(周)나라 초의 정치가로서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모두 모신 인물입니다.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나며, 넓은 식견과 지혜로 문왕의 스승이 됩니다. 문왕이 죽은 후에 뒤를 이은 무왕을 도와, 폭군인 주왕(紂王)에 의해 혼란한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켰습니다. 그가 문왕을 만나기 위해 10년 동안 위수가에서 낚시를 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강태공이라고 불러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태공은 낚시를 한 것이 아니라 세월을 보내며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지요. 강태공의 낚시 바늘은 굽은 것이 아니라 일자였다 합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낚시를 한 것입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강태공이 죽고나서 그를 장사지내려 하자 시체가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 영구(營丘, 강태공이 다스린 제나라의 수도 유적지)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태공망의 묘는 섬서성 함양시 주능향 문왕능 우측에 있으며, 의관총(衣冠塚)은 고향 영구(지금의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 영류향)에 있고 상당도 같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육도삼략』이라는 유명한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겼습니다.



주나라 문왕과의 첫 만남


강태공과 주나라 문왕의 첫 만남은 은나라의 주(紂)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 갖은 폭정을 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결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의하여 타도되었는데 이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사냥을 가려다가 귀갑(龜甲)으로 점을 쳐보니 이번 사냥에서는 짐승 대신 훌륭한 인재를 얻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범도 아닙니다. 얻는 것은 왕을 보좌할 인물입니다.”


“장차 임금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거나 제후가 될 그 인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폐하께 스승을 보내시어 국사를 보좌토록 하신 것이니, 이 나라를 3대에 걸쳐 돕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관인 편(編)이라는 자가 문왕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왕은 내심 기뻐하며 이리저리 달리며 사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따라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레는 어느새 위수(중국 황하강의 가장 큰 지류) 가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한 노인이 홀로 강가에 앉아서 낚싯줄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낚시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왕은 첫눈에 노인이 비범한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노인이 바로 여상 강태공이었습니다.


문왕은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곁에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놀랍게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낚시를 즐겨하시는가 봅니다.”


이것이 태공과 문왕과의 첫 대화였습니다. 그러자 강태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군자는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즐기지만 소인배는 일의 결과에 어떤 이익이 생기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데 저는 지금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것인지 좀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강태공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서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祿)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먹이라야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인재에게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크기에 따라 요리법이 다른데, 이는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면서 강태공은, 낚시질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이처럼 심오한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낚시하는 자체로 천하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뜻이 깊으면, 물고기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더욱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침내 이 말에 감탄한 문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낚시 비법에 숨은 이치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강태공이 대답했습니다.


“샘은 근원이 깊을수록 물이 많이 쉼없이 흐르는 법이고, 또 물이 많이 쉼없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늘 물고기가 사는 법입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크게 성장하고, 결과적으로 열매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습니다.


낚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작으면 작은 물고기가 잡힐 것이요, 낚시줄이 중간 정도이고 미끼도 그러하다면 중간 정도의 물고기가 걸릴 것이요, 만일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다면 당연히 큰 물고기가 걸릴 것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도 봉록에 따라 대우를 잘하면 전국의 인재가 모여들게 됩니다. 대장부 대우로 인재를 구하면 ‘한 나라’를 얻게 될것이요 제후의 예로 인재를 구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모여든 인재를 소홀히 대하면 곧 인재들이 떠나버립니다. 이는 물이 더러우면 물고기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듯 자연스런 이치지요.”


강태공의 말이 끝나자 문왕은 ‘점괘에서 만나리라고 한 인물이 이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을 숨기고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하 백성의 민심을 얻을 수 있겠소이까.”


강태공이 일사천리로 한점 의혹도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천하는 군주의 것이 아니라 만백성의 것입니다. 만백성과 같이 천하의 이익을 나누는 군주는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고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음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늘에 사계가 있고 땅에 만물을 키워내는 힘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은혜를 천하 만민과 같이 나누어 가지는 군주야말로 진실로 인(仁)을 몸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인(仁)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지요. 어진 사람이 정치를 하면 그 덕이 저절로 나타나며 어렵지 않게 민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생(生)에 대해 애착이 있으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는 것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德)이라는 것입니다.”


강태공이 이 말을 마치자 문왕이 일어나 그에게 경의의 뜻으로 두 번 절을 한 뒤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늘의 이치라 할 수 있군요. 당신은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분이니 어찌 하늘의 명을 거역하겠소이까.”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핵심을 묻고 핵심을 답한 현문현답(賢問賢答)이었습니다. 문왕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나의 조부인 고공단보(주나라 왕실의 뿌리, 후에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존)께서는 세상을 뜨기 전,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도와 주족(周族)을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삼가 가르침을받고자 합니다.”


그때 문왕이 이렇게 말했다 하여 이로부터 강태공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문왕은 강태공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 태사(太師)가 되었고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현 국무총리)를 겸임하게 됩니다.


강태공은 좋은 정책을 아뢰었고, 주나라는 은나라를 3분의2까지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또한 은의 제후들이 주나라를 따르게 하고 풍읍에 도읍을 건설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지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왕이 그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전쟁 중에 죽자 아들 희발(姬發)이 왕위를 계승하여 무왕에 올랐으며 강태공을 상부(尙父)와 태사(太師)로 모시게 됩니다.



강태공,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다
주 무왕 때에 강태공을 주축으로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 융거(戎車) 300대와 800제후들의 지원 하에 목야(牧野: 하남성 급현 조가진)에서 주신(紂辛)군 70만을 궤멸시키고 조가(朝歌: 지금 하북성 기현)를 함락하였습니다. 폭군 주신(紂辛)은 달아나 스스로 분신(焚身)하였으며 은왕조는 마침내 멸망을 하였습니다.


대승을 거둔 무왕은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하늘에 보고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았던 은나라의 보화와 곡식을 모조리 내어다가 백성에게 내려줌으로써 다시 한번 백성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로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여 제후로 봉합니다. 그때 공(公), 후(候)는 사방 100리, 백(伯)은 사방 70리, 자(子), 남(男)은 사방 50리의 땅을 받았다 합니다. 강태공도 BC1,122년 천하통일 및 천자국 주(周)나라의 개국 일등공신으로 제(齊) 땅 사방 100리를 받아 제왕(齊王)이 되었습니다.


그후 태공은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며 예법을 간소화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나가고 어업 외에 제염업 등 상공업을 진작하고 수산을 장려함으로써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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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의 다음인 성왕(成王) 때에 무왕의 아우들(관숙과 채숙)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성왕은 사자를 보내 태공에게 동쪽은 해안선까지 서쪽은 황하, 남쪽은 삼릉, 북쪽은 무체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제후를 임의로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합니다. 이로써 태공은 천자에 속하는 대권의 3분의 1을 위임받게 됩니다. 그후 봉토가 점점 확대되어 처음 받았던 100리가 5,000리가 되었고 그 후손인 환공이 뒷날 밝은 정치를 펴 제후들을 통수하게 되기까지 토대를 놓았습니다.


강태공이 지휘한 목야대전(牧野大戰)과 강태공의 병법 모두 세계 최초의 역사기록 사건입니다. 따라서 강태공은 병법과 군사의 시조입니다. 역대 황제들이 강태공을 무성(武聖)으로 봉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무성왕(武聖王)으로, 송나라 때에는 조열무성왕(照烈武聖王)으로 봉해졌습니다. 원나라 때부터 민간에서는 강태공이 신화와 전설로 발전하였고, 명나라 때는 허중림(許仲琳)이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을 창조하여 마침내 강태공이 신선으로 변모하였으며 민간에서 강태공을 신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학에 바탕한 창업 및 경영 정신
강태공은 오늘날로 말하면 위대한 CEO입니다. 사람을 다룰줄 알았습니다. 나라의 부국강병을 도모할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책 속에 집약돼 있습니다. 강태공이 지은 『육도삼략』은 강태공과 문왕, 무왕의 일문일답을 엮은 책입니다.


『육도삼략』은 단순한 병법서(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을 하는 방법이 실린 책)가 아닙니다. 병서(兵書)이면서 동시에 정전(政戰) 및 치세(治世)의 대도를 논한 책입니다. 오늘날의 인간학 및 조직학에 관심을 갖고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눈여겨 봐야 할 책입니다. 이 책은 모든 병법의 시초이며 역대 전략사 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후대의 손자(孫子), 오자(吳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다스릴 도를 터득하게되었다고 했습니다.


육도(六韜)라 이름한 것은 그 속에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의 여섯 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략(三略)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숨어사는 군자가 이고( )라는 곳에서 장량(張良)에게 전해준 태공망의 병서라고 전해져 옵니다. 이 책을 삼략이라고 한 것은 상략, 중략, 하략의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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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기원전 1,100년 전후)은 누구?


199강태공은 염제 신농의 후손입니다(염제 신농은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농사짓는 법과 의술을 인류에게 전한 위대한 선조입니다). 성은 강(姜)씨이고 이름은 아(牙)인데 그를 존칭하여 자아(子牙)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治水事業, 하천과 호수의 범람을 막는 일)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후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해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지명을 따라 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습니다(보통 태공이나 태공망(太公望)으로 부를 때는 강씨를 많이 쓰고 상(尙)이란 이름을 쓸 때는 여(呂)씨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기』에는 동쪽 해안지방 사람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다른 기록에는 중국의 동쪽 산동성 일조(日照) 시(市)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혹은 지금의 산동성 제주(齊州) 출신일 것이라는 설도 있음). 강태공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태공이 주나라의 문왕, 무왕의 스승이 되어 천하를 통일한 것에는 모두 일치합니다. 강태공은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태공은 문왕의 조부(태왕=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이라고 불려졌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이라고 불렀습니다.



200강태공에서 뻗어나간 많은 성씨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상으로부터 자손이 생기고 그 자손의 몸에는 선조의 피(혈통)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피는 같은 성(姓)이지요.


인류 최초의 성씨가 발원한 곳은 중국 서부 황토고원 섬서성 보계시 무공현 강수(姜水) 지역입니다.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천황 때 소전이라는 분이 이곳 강수에 군병감독관으로 왔는데 그의 아들 염제신농 씨가 지명을 따서 강씨성이 생겨났습니다.


강태공은 창성시조이신 신농황제의 16세손인 백이씨시조의 35세손입니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 곧 태사(太師)가 되어 부국강병을 하였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 공으로 제나라 왕에 봉해졌습니다. 제나라의 수도는 영구(營丘: 현 산동성 치박시임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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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나라는 강태공의 후손들에 의해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습니다.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이었다고 합니다.


강태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 오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高), 여(呂), 허(許), 노(盧), 구(丘,邱), 강(强),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 등 수많은 성씨들이 강태공의 자손들로부터 갈라져 나갔습니다. 지금도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들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들이 대거 참례를 온다고 합니다. 오늘날 강태공의 자손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70여개 이상의 성씨가 분파되었다고 합니다.


[강태공과 마부인 이야기]
강태공이 부인을 위해 세운 서낭당


주나라가 세워진 후 강태공이 제나라(지금의 산동지방) 땅의 제후가 되었습니다. 강태공이 부임할 때 주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 사람들 무리 중에 초라하고 늙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강태공이 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마씨 부인이었습니다. 강태공은 시종을 시켜 그 여인을 수레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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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제후로 부임하는 휘황찬란한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여인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아내로 맞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강태공은 시종을 시켜 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한 후 그릇의 땅바닥에 물을 쏟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이 다시 그릇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가 없는 법이오.”


강태공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여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엎질러진 물이다’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그후 강태공은 지난날 자신으로 인해 고생한 마씨 부인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 서낭신을 만들었다합니다. 살아서 못다한 영광을 죽어서 수 천년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대접받도록하여 마씨 부인에게 은공을 갚았다는 것입니다.


서낭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입니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나 장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귀신도 마음대로 부린 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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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1후는 5일)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부리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 옵니다. 『봉신연의』(삼국지, 수호지, 서유기와 더불어 중국 4대 소설중 하나)에 보면, 곤륜산에서 40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곤륜산(도교의 성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주왕의 애첩 달기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또 정산지방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습니다. 이에 강태공이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산에는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미리 재앙을 막음)의 한 풍속이 있습니다. 디딜방아 몸체에는 반드시, 강태공이 태어났다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이라고 씁니다. 이를 ‘방아 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서, 방아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하무적, 천하를 통일한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의 해악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흥망의 열쇠는 사람에게 있다

무릇 병사를 쓰는 요체는
예를 숭상하고 녹을 중히 여김에 있나니
예를 숭상하면 지사(智士)가 모여들고
녹을 중히 여기면 의사(義士)가 죽음도 불사하나니
그러므로 현자(賢者)에게 녹을 주되 재물을 아끼지 않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줌에 때를 넘기지 않으면
장교와 사병이 다 함께 적을 무찌르느니라. (출처: 삼략의 한권인 「상략」)

무왕이 태공에게 물었다. “장수에 대하여 논하면 그 도는 어떻습니까.”
태공이 대답하였다. “장수에게는 다섯 가지 재간과 열 가지 허물이 있습니다.”
무왕이 물었다. “그 조목을 듣고 싶습니다.”
태공이 대답하였다.

“이른바 다섯 가지 재간이라 하는 것은 용(勇),지(智),인(仁),신(信),충(忠)입니다.
용맹스러우면 범치 못하며, 지혜로우면 어지럽히지 못하며, 인덕이 있으면 사람을 사랑하고, 신의가 있으면 속이지 않으며, 충성심이 있으면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른바 열 가지 허물이라는 것은 용감하여 죽음을 가벼이 하는 자 있으며, 성급하여 마음이 조급한 자 있으며, 탐이 많아 이익을 좋아하는 자 있으며, 어질어 인정에 약한 자 있으며, 지혜로우나 마음에 겁이 많은 자 있으며, 신의 있으나 사람을 쉽게 믿는 자 있으며, 청렴결백하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 있으며, 지능이 있으나 마음이 태만한 자 있으며, 굳세고 씩씩하여 자기 고집을 쓰는 자 있으며, 나약하여 사람에게 맡기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처: 육도 중 한권인 「용도(龍韜)」)



난세에는 전쟁이 있으니, 전쟁은 나라의 대사이며 존망이 달린 일입니다. 이럴 때에 국가의 운명은 장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일찍부터 간파했던 강태공은 무왕에게 장수를 잘펴서 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전쟁에서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의 흥망성쇄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나 크고 작은 조직에 속한 개인들이 스스로 돌아볼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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