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산 3일에 천하의 모든 일을 알게 된 정북창

2010.02.22 | 조회 6602


조선시대 도가(道家) 내단(內丹)사상, 즉 단학(丹學)의 비조(鼻祖)이며,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리는 북창 정렴. 그는 상제님께서“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산에 도 닦으러 가서 3일 만에 천하의 모든 일을 알게 됐다고 평하실 만큼 뛰어난 도인(道人)이다. 유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금기시 되던 조선시대에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신선술(神仙術) 수련법을 담은『용호비결』을 저술했으며,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도 불렸다. 북창 정렴,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심법세계를 알아보자.
 
 
배우지 않아도 하늘 아래 모르는 것이 없어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의 본관은 온양으로 조선조 중종 즉위년(1506년)에 정순붕(1484~1548)과 완산 이씨 사이에 6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기반 삼아 우의정까지 출세했던‘을사 삼간(三奸)’중 한 명이고, 모친은 세종의 장형(長兄)인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다.
 
정북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아주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음률, 의약, 수학, 한문, 복서(卜筮) 등 배우지 않아도 어릴 적부터 하늘아래 있는 온갖 학문에 뛰어났으며,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장유의「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中에서 ).
 
또한 그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 말도 배우지 않고도 듣는 대로 통했다. 14세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중국어와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대만) 언어를 구사하여 그곳에 온 외국사절에게『주역』,『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등 어려운 경전(經典)들을 쉽게 가르쳐주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이 해(1520년)에 부친 정순붕은‘전주 부윤’에 있다가 면직되는데, 이듬해에는‘종놈처럼 아첨한다’고 하여 관작까지 삭탈 당한다.
 
1520년부터 1537년까지 17년간, 정북창의 집안은 부친의 면직과 관작 삭탈로 의식이 궁색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진다. 이때가 정북창의 나이 15세에서 32세에 해당되는데, 그는 이 기간에 과거시험 공부를 단념하고 유학사회에선 잡학으로 치부하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등의 학문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부친이 복직된 1537년에 그는 사마시(생원, 진사시험)에 급제한다. 그러나 사마시는 예비시험격인 소과(小科)여서 관직을 받으려면 대과(大科)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치르지 않는다.
 
그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급제한 것은 본인의 의도보다는 부모의 강압적 권유와 관직을 얻은 비슷한 연배들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사마시 급제이후 과거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유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에 힘써서, 고관(高官) 벼슬에 나가지 말고 낮은 지위에 머물 것이다. 혼인은 고귀한 가문에 의탁하지 말 것이며, 때가 화(和)하면 벼슬을 하되, 세상이 어그러지면 임야(林野)에 물러가 힘써 땅을 갈아 자급(自給)할 것이다.”(북창 정렴의「온성세고」유훈中에서)
 
정북창의 이런 견해는 유교적 처세와도 상통하지만, 17년간의 궁핍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부귀와 물욕에 빠지지 않고 주체성을 지키려는 자세로 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조정 출사와 은퇴
정북창이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인재로 추천 발탁하여 장악원(掌樂院: 음악,무용 담당청) ‘주부’겸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책력 담당청)과 혜민서(惠民署: 의약,치료 담당청) ‘교수’직을 준다. 그는 또한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藥理)에도 정통하여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들이 북창을‘명의’라고 천거할 정도였고, 인종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가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상한 재주로 인해 당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방 병풍 위에‘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았고 3정승 중 한 명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던 인종은 안타깝게도 9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정왕후(13대 명종의 모후)에 의해 독살됨으로써정북창은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없어진다.
 
조정 관직을 역임하고 포천 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정북창은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掛蘿里, 현재의 양주시 산북동 일대)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그토록 재주가 뛰어났던 그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명종실록』,『 조선고금 명현전』,『 용주선생유고』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 정순붕은 17년간의 경제적, 정신적 고초를 벗어나고자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운다.
 
1545년(명종1년),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작당하여 당시 권력의 횡포를 휘두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 세력에 붙어 대윤(大尹;인종 외척)과 청렴한 사림파 인물을 모함 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때 정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 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정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한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인『용주선생유고』에는“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무함(誣陷)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부친은 비록 불의했으나, 정북창의 효심어린 처신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정북창은 동네에 애경상문(哀慶喪問)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불의에 대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북창은 학식도 많고 명성이 있었기에 자신이 앉아있으면 부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으니,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했다.
 
을사사화의 다음 해(1546년) 정북창은 산속으로 은둔하는데, 출세욕에 빠진 부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 천륜파괴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북창은 산속에서 도학, 역학, 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고 신선술을 연마하며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그는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만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라는 별호도 이때 생긴 것이라 한다.
 
 
도를 닦으며 은둔생활
정북창은 풍채가 학과 같았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품 또한 맑고 깨끗했으며, 친구를사귈 때에도 인정(人情)과 도(道)에 바탕을 둔 도반(道伴)으로서 깊이 있는 벗을 사귀었다.
 
그는 선도(仙道)에 함께 몰두하며 뜻이 통했던 동생 정작과 박지화 그리고 불승(佛僧)들과 만나서 산수를 즐기며, 유(儒), 불(佛), 선(仙)에 대해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이들과 정북창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고, 상대방의 사상을 인정해 주었던 진정한 도반(道伴)들이었다. 박지화(1513~1592)는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인데 후에 정작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정북창은 시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정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도인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긴다. 화담 서경덕은 어릴 적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 천(天)’자에 문득 크게 깨우치고는‘천(天)’자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글자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소강절의『황극경세서』에 나오는‘우주일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도인이었다.
 
선도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 병은 특별한 증세없이 심신이 고달플 때 생긴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울화병’으로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의『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대하고, 코로는배꼽둘레를대하고숨을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神氣)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하는데, 그것이 현빈일규(玄牝一竅)이며, 그 다음에 태식(胎息)이 되고, 태식에서 주천화후(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결태(結胎)가된다.”([용호비결] 中에서)
 
 
조선시대 단학의 중시조(中始祖)
정북창의 학문은 처음에는 유학으로 출발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천문, 지리, 의학 등 잡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말년에 은둔하면서는 도학, 수학, 역학 등과 신선수련법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스승 없이 모든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고, 제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 또한 손자 대에 가서 대(代)가 끊기어 양자를 받아들인다.
 
그는 유(儒),불(佛),선(仙) 3교에 두루 통했는데, 삼교(三敎)를 평하기를“유학은 인륜, 불·선은 견성(見性)과 명심(明心)을 주로 하여 셋은 다르지만 불·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허목의「북창선생행적」中에서)고 했다.
 
정북창에게 스승이 없었다는 기록은 조선의 도가열전(道家列傳)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조금 달라진다. 이 책에는 그가 말년에‘승(僧) 대주(大珠)’에게 도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의 선맥(仙脈)을 살펴보면, 조선조에 와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도가의 맥(脈)이 김시습에 의해 다시 계승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졌던‘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진면 모는 오히려‘도인(道人)’과‘생불(生佛)’에 가깝다. 이율곡이 쓴『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이 죽은 지 3년 후 절 옆에 묻힌 그의 시신 관 뚜껑을 열어보고 불승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시신이 썩지 않았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생불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김시습을 시조로 조선의 선도(仙道)는‘김시습→정희량→대주(승려)→정북창, 정작’으로 이어지는데, 정북창은 조선시대 선도에서‘단학의 중시조(中始祖)’또는‘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정북창의 도력과 기국
정북창은 앞일을 예견했고, 역술(易術)과 수학에 능통하여 사후 수십년 후까지도 궁중에서 그의 천재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1595년, 선조와 이항복, 정경세 등이 별전(別殿)에서『주역』‘건괘(乾卦)’를 강론한 자리에서“북창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 타인의 마음을 읽는 도술)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거론되었다. 그리고 1601년에도 궁중 별전에서『주역』을 강론하다가‘수학에 정통한 인물’로 화제가 미치자, “북창은 서경덕에 못지않게 수학에 뛰어났으며, 모든 일에 있어 앞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거론되었다.
 
그는 1659년 노봉서원에 봉안되었다.
 
정북창은 정통유학자라기보다는 신선수련법을 행했던 도가적 인물에 가까웠기에, 그에 관해 신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총명함이 남달랐던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신명(神明)과도 통할 수 있었다. 가까이는 다른 집의 방안에서부터 멀리는 이민족의 풍속과 기질까지 다 알았으며, 개 짖는 소리며 백로 울음소리 등도 귀신처럼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가 산속에서 살 적에 새와 짐승소리를 모두 알아듣고는“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정북창의 이러한 모습은『증산도 도전』에 어린 소녀 김호연 성도가 신안이 열려 사물의 모습을 훤히 꿰뚫어 보고 짐승의 소리를 모두 알아듣는 광경과 유사하다.
 
“호연이 수도 공부를 하매 신안(神眼)이 열려서 보니 다른 집의 방 안 광경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제사 지내는 모습, 청소하는 모습, 내외가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 등이 마치 곁에서 보는 듯 세세하게 보이더라.
 
또 구릿골에 사람이 오면 주머니에 돈이 얼마 든 것, ‘내놓을까 말까.’하며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이 다 보이고 까치, 까마귀 등 새가 날아와‘내 일 어디서 누가 오는데 이러저러하다.’고 일러 주는 것을 다 알아들으니 모르는 것이 없더라. (道典3:150:1∼4)

 
또 한 번은 정북창의 절친한 친구가 중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부친이 와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정북창은 친구의 천명이 다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3대 독자인 아들을 꼭 살려달라고 하소연하자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아무 날 저녁에 아무 산에 올라가면 산 위에서 푸른 도포와 노란 도포를 입은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을 테니, 바둑이 끝날 무렵에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지성으로 권하며 사연을 고하면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이리하여 정북창은 노인들을 통해 자신의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친구의 수명을 이어주었다는 신비한 일화도 전해진다.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하면 3일 만에 생각한 것을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아맞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예견했던, 그야말로 뛰어난 도인이었던 용호대사 정북창! 산속에서 도반들과 함께 산과 호수, 계곡을 거닐며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신선술을 연마했던 정북창은‘자만(自挽)’이란 시(詩)를 남기며 4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一生讀破萬卷書, 일생동안만권의책을독파하고
 一日飮盡天鍾酒. 하루에천잔 술을마시었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이전일을고고하게담론하고
 
 俗說往來不掛口. 속설은입에도담지않았네.
 顔子三十稱亞聖, 안자는 삼십을 살아도 아성이라 불리
 었는데,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나이는어찌그리길더뇨?

 
상제님께서는“천지의 조화로도 풍우(風雨)를 지으려면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공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였느니라.”(道典2:34:2∼3)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천지에 정성을 들여야만 도통할 수 있다는 뜻을 말씀하심과 함께 정북창의 천재성을 칭찬하신 것이라 생각해 볼수 있다.
 
또 상제님께서는 만국대장 박공우 성도의 기국을 시험하시면서“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道典4:88:12)고 하신다.
 
천하의 정북창도 박공우 성도에 비하면 오히려 기운이 작다는 말씀이시다. 상제님께서는 박공우 성도를 지구촌의 인종씨를 추리는 가을개벽의 대병겁기에 신명계의 심판대장으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상제님을 대행하는 일꾼에 의해 인사로 성사된다.(道典5:256:5 참조)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장차 가을개벽의 의통성업을 집행할 우리 일꾼들의 기국과 도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그 경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정북창과 박공우 성도를 통해 우리 일꾼들에게 천지의 무한한 기운을 내려받을 수 있는 심법세계를 열어주고 계신 것이리라.
 
 
궁을가(弓乙歌)
미래의 일도 훤히 예견했던 정북창은 장차 인류에게 닥칠 천지 변국의 대환란인 개벽에 대해 가사형식의 비결인‘궁을가’를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 가사에는 개벽시대에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개벽 이후 새로운 도통 문명시대가 열리게 됨을 전해주고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이다.
 
“애고 애고 저 백성아. 간단 말이 어인 말고. 고국본토 다 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 부모처자 다 버리고 길지(吉地)찾는 저 백성아. 자고(自古) 창생 피난하여 기만명(其萬名)이 살았던가. … 남천북천(南遷北遷) 어인 일고. … 차시지화(此時之禍) 궁궁을을 용화(龍華)로다. …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 사명당(四明堂)이 갱생하니 승평(乘平)시대 불원이라. … 창생도탄 없어진다. 포덕포화(布德布化)하는 때라. … 대성지화(大聖之化) 돌아오니 궁을노래 불러보자. … 태극(太極)궁을 신명(神明)이라. 궁을궁을 성도(成道)로다. …”
 
앞으로 지구의 남북극이 이동하는(남천북천) 천지대개벽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는 조국을 떠나 피난할 생각을 하지 말고 도통군자가 다시 나와서 창생의 도탄이 없어지는 인류낙원의 태평시대가 오는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인‘궁을(=태극신명)’의 도(道)를 쫓아야만 자기생명을 구원받고 도통할 수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궁을’은 우주 절대자 하나님의 의통성업(醫統聖業)을 인사(人事)로서 매듭짓는‘천하의 주인[진주眞主]’을말한다.
 
 
<참고문헌>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한국도교사상연구회, 아세아 문화사『이야기 인물 한국사 2』이이화 저, 한길사『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강효석 편저, 화산문화『한국인의 과학정신』박성래 저, 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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