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의 일심

2009.10.19 | 조회 6318

 
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동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앞을 다투어 밀려왔다. 이러한 위난을 맞아 조선의 수많은 지사들은 국권을 수호하고자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충의로 분연히 일어났다. 이들 중 특히 화서 이항로의 문하생으로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충의의 표상으로 일심의 표본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역사의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륜을 해한 댓가로 **서까지 그 죄업을 치러야 했다. 최익현을 통해 일꾼의 심법세계와 진리의 근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최익현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유학자로서의 완고한 일성이다. 겉으로 보자면 이는 너무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적인 이미지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해, 특히 제국주의 상품시장경제의 논리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익현은 일찍이 1873(계유)년, 동부승지로 제수되었고 곧이어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8년에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어 국은(國恩)을 입었다. 또한 을사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선 안 된다는 그의 굳은 신념은, 급기야 죽음으로써 국난에 보답하고자 하는 비장한 의병투쟁으로 나아갔다.
 
 
고종부자의 천륜을 끊게 만든 계유상소

최익현이 41세 되는 계유년, 그는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린다. 만동묘의 훼철, 서원의 혁파, 국적(國賊)에 대한 신원, 호전(胡錢, 청전)의 사용을 크게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대원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국정에 간여하는 자는 단지 그 지위와 녹만을 받들어 중하게 여긴 것이다.”라고 말하며 대원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마침 호전(胡錢)의 사용과 더불어 ‘메이지 일본’과의 국교수립문제에 있어 아버지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고종은, 결국 이 상소를 계기로 하여 친정을 선언한다. 상제님은 최익현의 이와 같은 행위가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게 만들었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어 그 대죄(大罪)가 그의 몸에 붙어 있노라. (道典 5:137:4)
 
계유상소 이후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어서 권신들의 반발과 탄핵 속에서, 그는 민비 일족을 비판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린다. 하지만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방자하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그는 3년간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민비 일파의 탄핵에 시달리던 중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조정에 올린다.
 
“이 몸이 나이 41(1873년, 계유년)에 일찍부터 국은을 입어 사적(仕籍)에 올랐으나, 온몸이 모두 나라의 큰 은덕인데, 조금도 갚지 못하고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 마침 성상께서 치세(治世)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 천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시고 파격적인 은전(恩典)을 내리시니, 이른바 ‘미묘한 도심(道心)의 본체와 발현하는 천리의 묘용(妙用)’이라는 것으로 옛날에 찾아보아도 견줄 만한 이가 드물었습니다. … 그런데 간혹 과격한 발언과 불경한 언사는 바로 옛글만 읽어 변통할 줄 모르고, 시골뜨기의 문견이 상소 격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소치이지 무슨 별반 뜻이 있어서 그러겠습니까? 이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상제(上帝)가 위에서 질정(質正)하고 귀신이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밖에는 아뢸 만한 사연이 없습니다. 황공하게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에서, 그는 먼저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변론하면서 상제님께서 ‘근본에서부터 바로잡아 주시리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최익현의 ‘상제의식’에 대해 보답이라도 하듯 상제님께서는 그의 역사적 삶을 천지공사로서 심판하셨다.
 
 
최익현, 1906(병오)년 의병을 일으키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가자, 그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한편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을 고종에게 간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병오년 윤4월에 전라북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의 거병을 신도(神道)신도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주셨다.
 
이번에 최익현의 동함으로 인하여 천지신명이 크게 동(動)하였나니 이는 그 혈성에 감동된 까닭이니라. (道典 5:138:2)
 
그는 분명 죽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고자 하는, 일심 어린 사생관(死生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어떤 이가 그에게 이 거사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양사(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내 나이 80에 가까우니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치고자 했던 그의 충의에 사민(士民) 모두가 뜨겁게 호응하였다.
 
독립협회 회원이자 애국계몽가인 정교(鄭喬, 1856∼1925)는 “최익현이 옥과(玉果) 지역으로 물러나 머물렀으며,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달했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북도 백성들은 모두 기뻐 들떴으며 앞 다투어 합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라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상제님은, 그가 “재질이 부족하여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요, 일찍 진정시키지 않으면 온 나라가 참화를 입어 무고한 창생만 사멸에 빠뜨릴 따름이라.”(道典 5:138:4)고 말씀하셨다.
 
 
재질이 부족하여 대사를 감당치 못하다

당시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한 사민(士民)이 대략 900명이다. 상제님은 한 목숨 바쳐 나라를 위하고자 한 그의 절개를 높게 평가하셨지만, 그로 인해 민중들이 정부군과 한해(旱害)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의병기운을 거두시는 공사를 보신다.
 
이때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늘 때마침 날까지 가물어 인심이 흉흉하여 의병에 가입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매 그 군세를 크게 떨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수일 동안 만경에 머무르며 말씀하시기를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어 그 대죄(大罪)가 그의 몸에 붙어 있노라. 장차 백성들이 어육지경이 되리니 이는 한갓 민생을 해칠 따름이니라.”하시니라.
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비가 쏟아져 여러 날 계속되니 의병의 기세가 크게 약해지니라.
(道典 5:137:4∼6)

 
 
구한말의 ‘양심적 지성’인 황현(黃玹, 1855∼1910)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오랫동안 일기가 가물다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뇌성이 치더니 비가 쏟아져 양대(兩隊)가 모두 병력을 수습하였다.” 또한 “최익현이 군사훈련을 해보지 않은 데다 나이도 많아 기발한 책략과 일정한 계산이 없었으며, 또 수백 명의 오합지중(烏合之衆)이 아무 기휼도 없어 유생으로 종군한 사람들은 큰 관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다녀 흡사 과거시험을 보러간 것 같았으며 총과 탄환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는 시정의 한량배들을 대오(隊伍)에 채워 넣고 다녔다고 한다.”
 
비록 최익현의 절개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현실역사에서 보자면, 그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당시의 정황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익현의 죄와 벌, 그리고 ‘천륜’

최익현은 비록 충성스러운 신하이긴 했지만, 고종 부자의 천륜을 해한 의롭지 못한 큰 죄를 짓고 의거(義擧)를 일으키는 자기모순을 저지른다. 또한 신하된 도리로 한 목숨 바치고자 했지만 그 방법에 있어 백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기에, 상제님은 결국 그의 기운을 공사로서 거두어들이셨다.
그리고 최익현은 ‘천륜’을 끊게 만든 죄업으로 큰 벌을 받게 된다.
 
“저 구렁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이토록 애원하니 그 죄를 풀어 구하여 주소서.” 하니 …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죄는 제 스스로 짓고 내가 구해 주어야 하니 괴로운 일이로구나. 남의 천륜을 상하게 하는 일이 가장 큰 죄니라.” 하시거늘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 구렁이가 기운을 얻은 듯이 즐거운 빛을 띠고 사라지더라.
… “죄는 남의 천륜(天倫)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느니라.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해하였으므로 **서 죄가 되어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
(道典 9:102:5∼6, 103:1∼2)

 
이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가족이 인류사·우주사의 근본 바탕조직이라는 것이다. 상제님은 “인륜(人倫)보다 천륜(天倫)이 크니 천륜으로 우주일가(宇宙一家)”(道典 4:29:1)라고 말씀하셨다. 그 만큼 우주역사를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 혈통을 바탕으로 한 가족이 뿌리, 근간이 됨을 밝혀주고 계신다.
 
 
최익현에게 만장(輓章)을 내리시다

최익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일심세계다.
 
병오(丙午:1906년)년에 하루는 최익현이 순창에서 잡히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우(彈雨) 속에서 정시해는 죽었으되 최익현은 살았으니 이는 일심의 힘으로 인하여 탄환이 범치 못함이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 능히 만리 밖에 있는 군함을 깨뜨리느니라.”하시니라. (道典 8:53:2)
 
『도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상제님께서 밝혀주신 충의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큰 힘과 용기가 솟구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분들의 심법의 경계를 체득하는 문제로 돌아오면 당혹감을 느낄 때도 무척 많다. 정부군의 사격에 맞서, 74세의 최익현을 제자들이 보호하려고 했을 때, 그는 조금도 미동치 않고 정렬할 것을 명했다. ‘일심의 힘으로 인하여 탄환이 범치 못했다’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의 심법세계와 일심에 대해 공경심과 더불어 인간 마음의 위대성을 새삼 절감한다.
 
상제님은 무엇보다도 최익현의 나라에 대한 충절을 높게 기리어 그의 만장을 다음과 같이 지어주셨다.
“이는 최익현의 만장(輓章)이니라.” 하시며 글을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
 
  讀書崔益鉉義氣束劍戟이라
  독서최익현 의기속검극
  十月對馬島曳曳山河?
  시월대마도 예예산하교
 
  글을 읽던 최익현이 의기로써 창검을 잡았도다.
  시월이면 대마도에서 고국 산하로
  썰매 자국 길게 뻗치리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최익현이 죽은 뒤에 옳은 귀신(鬼神)이 되게 함이라.” 하시고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마도로 끌려가 절사하게 하시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최익현이 굶어죽었다 하나 뒷골방 죽 그릇이 웬 말이냐!”하시니라. (道典 5:139:7∼11)
 
1906년 7월, 최익현은 일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때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갓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서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어찌 감히 거역하는가”라는 경비대 대장(隊長)의 말에 그는 크나큰 분노와 모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보병대 대장(大將)이 와서 사과하며 “삭발하고 변복한다는 것은 그른 소문이고,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한국정부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들은 감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안심하고 식사하여서 국가를 위하여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라는 변명에 마음이 좀 수그러들었다.
 
최익현은 “다만 군들을 위하여 다시 먹고 다음 기회를 보겠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무엇보다도 젊은 제자들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될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74세의 최익현은, 고령인데다 타국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이 깊어져 결국 대마도에서 절사(節死)하고 만다.
 
상제님이 내려주신 최익현의 만장에는 “시월이면 대마도에서 고국 산하로 썰매 자국 길게 뻗치리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황현의 기록을 보면 ‘영구가 동래항에 도착하자 대낮에 갑자기 비가 오고 물가에서 쌍무지개가 일어났다.” 또한 정교는 “흰 기운이 대마도로부터 멀리 그의 집까지 뻗쳤다”고 전하며 “그것을 본 사람들은 최익현의 충의(忠義)가 두루 미친 바”라 여겼다고 한다. 충정공 민영환에게 혈죽(血竹)을 내리신 것과 같이 최익현에게도 그의 충절을 기리어 천지조화로써 그를 치하했던 것이다.
 
 
일심하는 자는 다 찾으리라

상제님께서 공판하신 ‘최익현 공사’를 보며, ‘천륜을 해하지 않는 삶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익현의 일심세계를 밝혀주신 대목에서는 인간 마음(心)의 무한한 가능성과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상제님은 “천하사를 하는 자는 먼저 망한 뒤에야 흥하고, 죽음에 들어가야 살길을 얻게 된다.”(道典 8:22:1)고 말씀하셨다. “대장부 일을 도모함에 마땅히 마음을 크고 정대히 가져 ‘내가 **도 한번 해 보리라’하고 목숨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道典 8:22:2∼3)는 천지와 같은 말씀에 이르러서는, 상제님의 천지사업을 현실역사에 구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삶인가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된다.
 
상제님이 크게 칭찬하신 우주사적인 성령(聖靈)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義理)와 혈성(血誠)으로 천하 만민을 위해 자신의 한 생명을 기꺼이 바친 공도의 삶이다. 하나님의 생령을 받아 진리로써 사람 많이 살리는 가장 주요한 관건은, 오직 마음을 잘 닦아 도심주(道心柱)를 확고히 세우는 길뿐임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다.
 
 
<참고자료>
최익현 저, 민족문화추진회 역주, 『국역 면암집』, (주)민문고, 1989.
황현 저, 김준 역, 『완역 매천야록』, 교문사, 1996.
정교 저, 조광 엮음, 변주승 역주, 『대한계년사』, 소명출판, 2004.
이태진 저,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2005.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1, 자작나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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