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2009.10.19 | 조회 4644
우암 송시열의 생애
우암 송시열. 그는 선조 40년(1607),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九龍里)에서 송갑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암의 어머니 곽(郭)씨 부인이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얻어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우암이 태어나기 전날 밤에는 그의 아버지 송갑조가 마침 종가에 제사를 모시러 청산(靑山)땅에 머물고 있었다.
 
한밤중에 홀연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옥동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집에 온 그는 ‘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아들이다.’ 하여 성뢰(聖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남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성장 과정 동안 만났던 스승들(송이창, 김장생/김집) 또한 조선 최고의 지성들이었다. 특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父子)는 율곡 이이 학통의 적통이었으며 관념적인 성리학을 현실적인 예학(禮學)으로 발전시킨 업적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예학을 실제 정치 현실에 적용시킨 용공부(用工夫)의 결론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후(死後)에 그는 유가의 성인에게 붙이는 자(子)가 붙여져 송자(宋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조선 문명에 지대한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쟁을 조장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를 이야기할 때 ‘소인배에게 보내는 공허한 찬사’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것이 역사적 인물 송시열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송우암은 1635년에 봉림대군(뒤에 효종)의 스승인 사부(師傅)관직으로 출발하여 이율곡의 계열인 서인의 영수로서 한평생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 반대파들로부터 사상을 지키는 완고한 인생을 살다갔다.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83세(숙종15년)에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인생을 끝마친다.
 
 
논쟁과 창조
이 세상에 허다한 주의(主義)로 허다한 단체가 모임은 가을에 오곡을 거두어 결속(結束)하는 것과 같으니라.(道典 5:200:5)
 
선천 상극역사의 본질을 ‘전쟁’ 혹은 ‘창조의 경쟁’이라고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듯이 16,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조선사회는 성리학 이념을 정치로 이화시키고자 뭉친 붕당들의 격전장 또는 창조의 경쟁터가 되었다(뒤의 도표 참고). 그런 정치 구도의 성립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가들의 대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타개하고 조선 백성에게 새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대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런 면에서 이 시기는 19세기말과 더불어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대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의견 개진과 첨예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송우암, 전환시대의 중심 인물
그 당시 전환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우암 송시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00년 이상 지속된 긴 대립의 양상 속에서 가장 오랜 정치 생명을 유지했으며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의 몸에 충만한 천지의 정기로 인해 그가 거처한 지붕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녹았다는 이야기가 도전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道典 9:5)을 보면, 그는 분명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고된 양란의 시기를 몸소 체험한 인물이며,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태조 앞에서 항복의 뜻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다. 그 후유증으로 관직에 오랫동안 나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거나, 잠시 등용되었다가 병을 이유로 수 차례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효종 대에 이르러 그의 정치적 뜻을 펴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면, 한 나라의 선비로서 이 나라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명나라를 문명의 종주국으로 높이면서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론을 효종과 도모하였고, 성리학 전통을 다시 세우는 동시에 기울어져 가는 나라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각종 특권 혁파, 부세 제도 개혁 등 다양한 현실적 문제를 개혁적으로 대처하였다.
 
하지만 실제 궁궐에 있었던 기간에 비해 은둔하면서 후학을 가르친 기간이 더 길다. 그가 가르친 제자만도 900여 명에 이르고 그중 약 60명이 고급 벼슬을 한 사실만 봐도 정계에서 그의 입지를 짐작할 만하다.
 
 
황극신 공사와 만동묘(萬東廟)의 인연
무신년 10월에 고부 와룡리 문공신의 집에 머무르시며 대공사를 행하실 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하의 난국을 당하여 장차 만세(萬世)의 대도정사(大道政事)를 세우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하리니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되어 있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 … 이제 황극신의 길을 틔웠노라.” 하시고 문득 “상씨름이 넘어간다!” 하고 외치시니 이 때 청국 광서제가 죽으니라. 이로써 세계일가(世界一家) 통일정권(統一政權) 공사를 행하시니…(道典 5:325:1∼10)
 
상제님 말씀처럼, 이 만동묘는 청나라 광서제에 응기되어 있던 황극신이 조선으로 옮겨오는 신도(神道)적 디딤돌이 된다. 이 성구를 통해, 송우암의 소중화 사상*의 상징체인 만동묘가 한민족이 인류구원의 종주민족(세계일가통일 정권의 주체)으로 거듭나는 남조선 도수의 이음새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물론 명나라를 중시한 우암의 행적이 사대주의의 발로라는 비판을 받는 면도 있지만, 우암의 유지에 따라 세워진 만동묘는 후천의 군사부 문화를 여는 천지공사 현장의 한복판에 자리해 있다.
 (*중국에서 한국 민족의 문화를 평가하여 자신들의 중화(中華)에 버금간다고 한 말. 후에 중화인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의 맥이 끊어졌고, 조선만이 유일한 화(華)라고 하는 논리로 발전했다.)
 
▼ 송우암 수명유허비(위) 송시열은 1689년 유배후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나 6년후에 무고함이 밝혀져 사원을 짓고, 사약을 받은 자리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만동묘(아래)

 
본래 만동묘는 조선 숙종 29년(1703)에 우암 송시열의 유지로 그의 제자들이 지은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지금의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세워졌다. 만동묘에서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약자로 ‘만번을 굽이치고 꺽어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는 성언호간(成言乎艮)의 간(艮)도수가 실현되는 한반도의 새 역사 정신을 상징한다. (도전 724쪽 참고)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문구는 원래 선조가 ‘명나라의 황하는 반드시 동쪽의 황해로 흘러 들어가 조선을 감싼다’라는 대중화에 대한 보은의 글귀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김일부(一夫) 대성사가 선포한 정역에서도 ‘천일임수혜(天一壬水兮)여, 만절필동(萬折必東)이로다. 하늘의 1태극 임수여 만 번 꺾어지고 꺾어지고 하면서 그 기운이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구나’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만동의 ‘동東’이라는 글자에서도 개벽기 인류를 살리는 3·8木의 새 생명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이 만동묘가 천지공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상제님께서 도통하시고 처음 가신 곳이 만동묘이고, 태모님도 대흥리에서 첫째 살림을 개창하신 후 차경석 성도를 데리고 만동묘로 가셨다는 사실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송시열과 허미수의 예송(禮訟) 논쟁
송우암에 얽힌 대표적인 사건은 예송(禮訟)논쟁이라 불리우는 궁중의례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왕(효종)을 서자로 보느냐, 아니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특별히 장자로 대우하느냐의 선택을 두고(그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르다) 남인과 서인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효종이 세상을 떴을 때 벌어졌던 1차예송 때(서기 1659년) 송우암이 제시한 서자론을 반박한 인물이 바로 남인의 영수인 허미수(許眉受)이다. 1차 예송 논쟁 후, 15년 뒤에 효종의 비(인선왕후)의 국상(國喪)을 치룰 때에야 비로소 이 논쟁이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미수야, 우암을 잡아 오너라!”
도전에서 구릿골에 사는 김사명(金士明)의 아이가 급증으로 죽게 되자 상제님께서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道典 4:124) 소리치시며 아이를 살려 주시는 구절이 나온다.
 
야사에 따르면 우암은 아이의 오줌을 마시며 건강을 유지한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그런데 우암의 노년에 그 오줌의 지꺼기들이 장에 쌓여서 몸져 눕게 되었는데 아무런 치료 방법이 없게 되자, 그의 아들을 시켜 반대당인 남인의 허미수에게 처방을 부탁하였다. 이 때 미수는 비상(砒霜)이라는 극약을 처방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암은 미수를 믿고 그의 처방에 따랐는데, 그 비상이 오줌 찌꺼기를 제거해 주어서 치료가 되었다고 한다.
 
우암의 남다른 건강유지 비법 덕택인지는 몰라도, 우암은 정읍에서 사약을 마셨으나 듣지 않아, 입천장을 긁고 사약을 3잔이나 마신 후에야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스승을 배반한 윤증이 아니냐?”
앞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인은 우암의 노론과 윤증(호 명재)의 소론으로 나누어지는데, 재미있는 것은 소론의 영수인 윤증의 스승이 바로 우암이었다는 것이다.
 
윤증이 자신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묘비명을 우암에게 부탁했는데, 우암이 윤선거를 칭송하는 문구를 넣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암과 윤증의 사제관계는 끊어지고 분당으로 이어졌다. 또한 윤증은 스승 유계가 유언으로 부탁한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고의로 간행하지 않아 배사론의 비난을 받았다.(도전 5:107:1 측주)
 
상제님께서 “忘其師之尹拯乎아. 스승을 배반한 윤증이 아니냐” (道典 5:107)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송우암, 그를 둘러싼 선천 조직사회의 빛과 그늘
우리 일꾼들은 송우암의 삶에서 주의 깊게 돌아볼 점이 하나 있다. 당쟁가, 사대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소중화라는 유교의 묵은 틀을 지어내었지만, 송우암은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불굴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우암이 83세의 나이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될 때까지 언제나 많은 정적들에 싸여 있었다. 83세의 노인을 끝내 죽이고서야 만족할 수 있었던 원한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상극의 역사가 빚어내는 씁쓸한 그늘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또한 그 상극의 그늘이 가리고 있는 빛의 정체를 좇아 보면 우리는 상극을 통해 상생을 마름질 하는 상제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송시열 관련 기록이 3000건이나 되는 것만 봐도, 송우암이 얼마나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송우암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인생은 정적들로부터 그의 사상(주자 절대주의, 소중화 사상)을 지켜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직도 송우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송우암을 성인의 반열에 놓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C급 정치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어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우리 일꾼들에게는 음양적 입체사고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보는 성숙된 안목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신도사관(神道史觀)으로까지 확대하면, 송우암의 일생과 만동묘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와 일심으로 하나되는 일꾼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삼통(三桶)에 싸이지 말라. 오직 일심(一心)으로 심통(心通)하라.” 하시고 “삼통에 휘말리면 살아날 길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11:70)
 
태모님의 이 말씀처럼, 혹 도문에서 명리를 구하고 사사로운 정분으로 뭉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살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뭉침은 진리로써 하나됨을 뜻하는 것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심을 가짐으로써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뭉침은 깨달음을 전제로 하는 하나됨이요, 봉사에 최상의 가치를 두는 하나됨을 의미한다.
 
진리와 일심을 통한 상생의 마음으로 우리들이 완전히 한마음이 될 때, 비로소 온 인류를 한 품에 크게 안고 크게 살릴 수 있으리라.
 

▼ 남간정사(南澗精舍).1683(숙종 9)년에 송시열이 지은 서당건물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의 학문을 완성시켰다. 주자의 시‘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남쪽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시내를 뜻하는‘남간’이란 말을 빌어와 지은 것인데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참고자료
 이성무 <조선시대의 당쟁사>
 이덕일 <송시열, 그들의 나라>
 임선영 정성식 황광욱 <한국 철학을 말한다>
 고영진 <송시열의 사회개혁 사상> -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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