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절을 확립한 유가의 창시자 공자

2010.02.22 | 조회 4461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道典 2:40:6)
 
 태고에 한 분의 하나님이신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들며 뭇 신명들과 교감하던 신교의 시대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상제님의 천명을 그대로 집행하던 도정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상제님께서는 각 문화권에 신교의 맥을 이을 성자들을 내려 보내셨다.
 
 그 중 2500년 전에 태어나 동양 인문정신의 푯대를 세워 만세에 공덕을 끼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유가의 창시자 공자(BCE551∼BCE479)다.
 
 공자가 태어난 때는 난세의 춘추시대였다. 당시는 ‘보천지하(普天之下)에 막비왕토(莫非王土)’, 넓은 하늘아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다는 이 말은 이미 옛 말이 되었고, 제후들끼리 혹은 그 아래 대부와 가신들까지 참여해 땅따먹기 전쟁을 벌이느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까지 생겨난 때였다.
 
 『사기』는 춘추시대 242년 동안 망한 나라가 52개국, 시해된 군주가 36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의 삶이야 오죽했으랴. 『시경』에는 백성들은 하루빨리 난리가 나서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내용과, 천하가 무도함에 하늘(상제님)을 원망하는 노래가 많이 나온다.
 
 춘추시대는 고대로부터 하-은-주 삼대가 내려오면서 문명의 바탕을 세운 이래 가장 혼란했던 시대, 질서가 해체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당대 지식인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다.
 
 
 배우고 익힘을 즐거워한 공자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듯, 명나라 주장춘이 쓴 <진인도통연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산의 근원은 곤륜산이니, 곤륜산의 제 1맥이 동해 쪽으로 뻗어나가 유발산을 일으키고 유발산이 니구산을 낳아 72봉을 맺으니라. 공자가 니구산 정기를 타고 태어나 72봉의 기운으로 그의 제자 72현이 배출되니라.”
 
 공자의 선조는 원래 동이계열 은나라 귀족이었다. 그런데 은이 주(周)에 망하면서 가세가 몰락하여 그 후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 와서 살고 있었다. 공자의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한데다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는 나이 차가 많아 과연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니구산에 올라 훌륭한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지성을 드렸는데, 그 기도가 응감되었는지 안징재는 곧 임신을 했다. 후에 아이를 낳고 보니 두상이 꼭 니구산을 닮아 있어 이에 아기의 이름을 ‘구(丘)’라 짓고, 자는 니구(尼丘)의 니를 따서 ‘중니(仲尼)’라 했다고 전한다.
 
 공자는 어린 시절 가난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논어』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자.
 
 _ 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도 좋다.
 
 _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또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_ 吾嘗終日不食 終夜不侵 以思無益 不如學也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생각해본 일이 있으나,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였다.
 
 이 때 공자가 주로 배웠던 것은 고대로부터 주나라에 전해진 예(禮)에 대한 것이다. 고대의 ‘예’는 도가 드러나는 모든 양식을 말한다. 작게는 일상생활의 규범에서부터 크게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이르기까지 예가 아닌 것이 없었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공이 무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세운 나라로서 주례의 전통이 비교적 잘 남아있던 곳이었다. 어릴 적 공자는 소꿉놀이 하듯 제기(祭器)를 가지고 곧잘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자는 음악에 대한 식견 또한 대단히 높았다. 거문고를 배울 땐 가르치던 사람이 공자의 정성과 자질에 감탄할 정도였고, 음악에 깃든 작자의 심성을 파악할 정도로 섬세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시에서 흥하고 예에 서고 악에서 완성한다’ 는 말처럼 공자는 음악에 높은 가치를 두었고, 문(文)을 숭상했다.
 
 30대에 이르러, 공자의 학식이 점차 높아지자 그에게 의례를 배우고자 하는 문하생이 많아졌다. 그때부터 공자는 행단강학을 열어 스승이 되었다. 공자가 50세에 이르기까지 행단강학을 통해 가르쳤던 제자는 3천여 명, 그 중 육례에 통한 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공자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 완숙해져 갔는데, 그에 비하면 관직운은 별로 없었다. 20대 초반에 가축을 기르는 승전, 창고의 출납을 맡는 위리에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51세에 관직에 진출하여 빠른 승진을 거듭해 6년 뒤엔 노나라의 대사구(법무부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공자가 재상이 된 지 석 달이 지나자,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고기 속에 다른 물건을 섞지 않았고, 남녀가 길을 갈 때는 각자가 다른 길로 다녔으며, 거리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직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노나라의 힘이 커지는 데 불안을 느낀 이웃 제나라가 미녀와 마차를 보내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놓자, 임금은 선물을 받고는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이들과는 큰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공자는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주유에 나서게 된다.
 
 
 지천명(知天命)과 철환천하(轍環天下)
 
 이때 공자의 나이 56세.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발심이 가능했던 것은, 그 전에 ‘지천명(知天命)’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50세에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확신했다. 그것은 고대 성왕들의 도로써 무도한 세상을 교화하여 소강사회(小康社會,온 백성이 편안하고 배부르게 잘 사는 사회)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공자가 주유천하의 행장을 꾸릴 때, 그를 따라나선 제자는 안연, 자로, 자공, 염구였다. 백성들조차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갈 때, 공자는 세상사 한복판으로 들어갔으니 그들이 오른 주유천하의 14년 길은 고행의 길이요 파란만장한 개척자의 길이었다.
 
 공자 일행이 철환천하(轍環天下)하며 겪었던 수난을 살펴보면, 첫째는 위정자들의 냉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과 당시 군주들이 구상하고 있던 정치논리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다. 위정자들이 부국강병으로 중원의 패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공자는 덕으로써 세상이 통일되는 것을 꿈꿨다.
 
 그리하여 『대학(大學)』에는 ‘욕명명덕어천하자(欲明明德於天下者), 밝은 덕으로써 천하를 밝히는 자’라고 치세의 도와 심법을 박아놓은 것이다. 이런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땐, 영공이 ‘웬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하고 멀리 허공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지지 않고, 방석은 따뜻해질 틈이 없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공자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주유천하 하는 동안 공자 일행에게는 굶주림,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들, 은자들의 조소가 따라다녔다. 특히 위험에 처한 일들이 수차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송나라에 갔을 때였다.
 
 송나라는 공자의 조상이 개국한 나라로 선조의 묘소가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묘소에 제사지내고, 먼 친척뻘 되는 제후를 찾아가서 예를 표했다. 그즈음 송나라 사마(대장군) 관직에 있던 환퇴는 공자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유인즉, 환퇴는 예전에 자기가 죽으면 쓰려고 화려한 돌관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돌관은 3년이 지나도 다 만들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다. 그것을 본 공자가 ‘그처럼 낭비하다니, 죽으면 빨리 썩는 게 낫다’고 하여 척 아닌 척을 지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 게다가 송나라에서 공자의 세력이 커지는 데 위협을 느낀 환퇴는 공자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공자가 큰 나무 밑에서 제자들과 예법을 실습하고 있는데, 환퇴가 그 나무를 뽑아서 위협하였다. 이에 공자와 제자들은 환퇴의 무리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공자가 가까스로 정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도망하느라 차림새가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신원도 확실하지 않아 문지기는 공자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하릴없이 성 밖에 앉아있는 공자를 보고 어떤 사람이 꼭 ‘상갓집 개’같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시 만난 제자들에게서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한바탕 소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주유천하 하는 동안 천명 이외의 것들은 이미 하늘에 맡긴 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누가 알아줄 리 없는 백절불굴의 고고(孤苦)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남쪽 초나라를 지날 때였다. 밭을 갈고 있던 은자가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천하가 온통 어지러운데, 그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소?” 라며 공자를 따르지 말고 자신들과 같이 농사나 짓고 사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자로에게서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사람은 새 짐승과 더불어 무리지어 살 수 없다.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애쓰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자의 말처럼, 당시 중원은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이에 공자는 세상에서 도를 펴는 것에 너무도 어려움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동방의 군자국, 구이(중국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가리켜 동이(東夷), 구이(九夷), 구환(九桓) 등으로 불러왔다)에 가서 살고 싶다’ 라고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던 중 공자는 예순이 되었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이제 나는 남의 말을 들으면 그 본뜻을 알 수 있다.” 이는 공자가 세상 속에서 수많은 좌절과 성공, 득의와 실의를 경험한 뒤 마침내 인간사에 대한 각별한 통찰력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공자는 열국을 주유하는 동안 한 번도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후에 ‘무관의 왕’, ‘소왕’이라 불리며 왕으로 받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실패로 보이는 이 14년 동안의 천하유력이 후에 유교라는 거대한 문명권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공자는 일흔이 다 되어 주유천하에 마침표를 찍고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71세 때 기린(성스러운 동물)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도가 현세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탄식을 했다.
 
 “성인의 도가 이루어졌던 태평성대에는 황하에서 용마가 도판을 메고 나타났고, 낙수에서는 거북이 서판을 지고 나타났다. 이제 기린이 나왔는데 그만 인간에게 잡혀버렸으니 때를 잘못 타고 나온 것이다. 내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고대 문화의 집대성
 
 기린의 상(象)을 보고 공자는 후대를 위해 저술에 몰두한다. 그가 주역을 탐독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공자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나올 정도로 『주역』을 뚫어지게 보고 마침내 통투했다. 그리하여 태호 복희의 팔괘 - 문왕의 괘사 - 주공의 효사에 이은 십익을 덧붙여서 주역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넓혀놓았다.
 
 이 주역에는 선천의 원리뿐 아니라 선후천이 개벽하는 정역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공자는 주역을 연구하기 위해 몇년만 더 수명이 연장되었으면 할 정도로 주역을 아꼈다.
 
 그리고 『춘추』를 저술하였는데, ‘후대에 나를 평가한다면 모두 이 춘추로 인함일 것이다’라고 할 만큼 『춘추』에 그의 연륜 모두를 불어넣었다. 더불어 고대의 시를 모은 『시경』, 통치자의 심법을 전수한 『서경』, 『예기』, 『악경』을 저술함으로써 고대의 문물을 집대성하여 후대에 전수했다.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도와 정사가 합일했던 시대의 이야기를 후대의 우리가 알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말년에 공자는 아들 공리와 애제자 안연, 자로가 먼저 죽은 것을 슬퍼한 나머지 몹시 쇠약해졌다. 죽기 일주일 전, 공자는 문병 온 자공에게
 
  “태산이 무너지는가 /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 성인이 ** 가는가.”
 
 라고 노래하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자는 73세의 일기로 작고하였다.
 
 
 공자의 공덕과 그가 남긴 오점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학파는 세상을 다스리는 ‘유(儒)’라는 계급이 되었다. 유는 지식을 관장하는 동시에 사회를 다스리는 관료층이다. 이 때 다스리는 사람은 곧 덕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선비에게는 늘 일상적인 자기수양이 요구되었다.
 
 백성보다는 임금을 모시는 신하가, 신하보다는 임금이 모범이 되는 사회, 이렇게 동양 유교사회에서는 대대로 문치주의·왕도정치가 숭상되었다.
 
 공자가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다스리되 경제로 움직이거나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대접하며 덕으로써 교화하는 이념이 마침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유학이 국가통치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외의 문화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띄었다. 특히 우리나라에 전래되어서는 유불도가 조화된 신교의 전통을 흐림으로써 도리어 유교의 본래 이념을 잘 수행하지 못했던 폐단이 벌어졌다. 또한 사대주의로 변질되어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경세적인 측면에서는, 상제님을 경외하며 깨어있는 마음으로 수기치인 하던 심법이 타성에 젖어버려 사리사욕 채우기에만 급급한 부유(腐儒)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유학이 비판받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된다.
 
 혁신을 거부하고 탁상공론에만 빠져 민생을 잘 돌보지 않았고, 예법이 지나치게 지엽적인데 치우쳐 허례허식이 많았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또 학파와 당적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기도 했고, 자기중심적으로 공론을 조성한 것 등이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런 유교의 폐단에 대해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께서 유교의 종장인 공자를 불러 준엄하게 심판하신 장면이 『도전』에 나온다. 어천하시기 이틀 전인 기유년 6월 22일 오후였다.
 
 상제님께서는 “꼼짝 마라. 오늘은 참 성인을 판단하리라.” 고 하시며, 구릿골 약방 마당에 멍석을 펴 놓고, 공자의 신명을 부르신다.
 
 “공자야, 네가 소정묘를 죽였으니 어찌 인(仁)을 행했다 하며, 삼대 출처(三代 黜妻)를 하였으니 어찌 제가하였다 하리오. 또한 내 도를 펴라고 내려 보냈거늘 어찌 제자들을 도적질 해먹게 가르쳤느냐. 그 중생의 원억을 어찌할까. 그러고도 성인이라 할 수 있느냐!” (道典 10:40)
 
 공자가 소정묘를 주살하고, 공자가문 삼대가 출처한 것에 대해 후대 학자들은 기록을 아끼고 있으나, 몇몇 기록을 참고하여 당시의 정황을 더듬어 보자.
 
 먼저 소정묘는 누구인가? 소정묘는 패도를 지향한 노나라의 대부요, 권력가였다.
 
 정치를 크게 왕도와 패도로 나누는데, 패도란 술수를 부리거나 무력으로 상대를 쳐서 이익을 꾀하는 방법으로 당시의 약육강식의 세태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패도에 기울어 있었다.
 
 한 때 공자의 문하생들도 안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정묘의 사학으로 옮겨가기도 했을 정도로 소정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반면 철저하게 왕도주의를 고수했던 공자는, 대사구에 오른 지 일주일 만에 다섯 가지 항목을 들어 소정묘의 목을 한마디로 베고 사흘 동안 매달아 놓았다.
 
 그 다섯 가지 항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정묘는 군자의 도를 버리고, 국부와 이익을 좇는 패도를 세우려고 한 소인파의 두목’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패도로 인해 고통 받을 민생을 생각하여 그런 조처를 취한 것이겠지만, 이런 행적은 인(仁)을 주장했던 공자의 사상과는 명백히 대치가 된다. 상제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덕치를 숭상하는 공자라면 더 적절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불어 공자의 가문은 공자, 아들 공리, 손자 공급까지 삼대를 내려오면서 모두 아내를 내쫓았다는 기록이 『예기』에 나온다.
 
 쫓겨난 어미가 일찍 죽자, 공리와 공급은 상을 지내며 슬퍼하였는데 ‘쫓겨난 부인은 내 부인도, 네 엄마도 아니다’라고 공자가 야박하게 말했다고 한다.
 
 선천에 평탄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사람이 어찌 공자 한 사람뿐이겠는가마는, 특히나 공자의 도는 ‘가족’에 뿌리를 두고 인(仁)이라는 사랑의 동심원이 사회와 전 우주에까지 확장되는 것이기에 상제님께서 호통치신 것이라 판단된다.
 
 상제님께서는 공자의 이런 잘못을 꾸짖으시는 한편, ‘인간으로서는 상대우 받을 만하다’며 공자가 세운 유교의 범절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해주신다.
 
 더불어 선천 유·불·선의 진액을 뽑아 후천문명의 바탕을 정한다는 말씀에서,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공덕에 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발로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지식으로는 학문의 정상에 올랐던 공자. 한 문명권의 시조로서 난세에 개척자의 삶을 살았던 공자의 삶을 되새기며 글을 맺는다. _ 안수민(서울 광화문)
 

 
 <참고자료>
 『증산도 도전』, 『논어』, 『사기 공자세가』,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 (기세춘 저,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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