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의 시작은 ‘無名’, 만물의 어머니는 ‘有名’… 無卽有

환단스토리 | 2016.07.20 15:58 | 조회 6645

천지의 시작은 ‘無名’, 만물의 어머니는 ‘有名’… 無卽有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⑭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경복궁 정문 이름은 광화문, 창덕궁 정문 이름은 돈화문, 창경궁 정문 이름은 홍화문, 경희궁 정문 이름은 흥화문이다. 광화는 왕의 교지가 문을 나서는 순간 빛이 되어(光化) 만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라는 의미이다. 돈화는 두텁게 되어(敦化) 오래도록 이어지고, 홍화는 넓게 되어(弘化)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지라는 의미이다. 돈화가 시간적 차원이라면 홍화는 공간적 차원이다. 또 흥화는 백성들이 기뻐하도록(興化) 전달하라는 의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정문 이름에 화(化)가 공통적으로 자리하는데 이 단어가 동아시아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화(化)는 영어로 becoming이다. becoming은 ‘∼으로 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이것의 반대 개념은 ‘고정된다’는 의미를 지닌 being이다. 서구사상은 기본적으로 being에 기초한다. 서양철학이 존재론(存在論·ontology)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동아시아에선 becoming 개념이 오랫동안 뿌리 내려왔다. 목·화·토·금·수에 기초한 오행설이 단적인 예다. 물(水)이 나무(木)를 자라게 하는 반면, 불(火)은 나무(木)를 태운다는 게 화(化)에 입각한 설명이다. 오행설은 전자를 상생(相生)의 관계로, 후자를 상극(相剋)의 관계로 규정한다. 이런 관계론 입장은 서양 존재론과 대비된다.


목·화·토·금·수에 기반을 둔 오행의 관계는 노자 사상에선 유(有)·무(無)의 관계로 바뀐다. 잘 알다시피 노자 ‘도덕경’ 첫 장은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道可道非常道),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로 시작한다. 이어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無名天地之始),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有名萬物之母)’라는 글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름 없음, 무명(無名)이 왜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 유명(有名)이 왜 만물의 어머니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동아시아 전통적 세계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전통적 세계관은 혼돈(混沌)에서 시작한다. 서양은 혼돈 대신 카오스(chaos)란 말을 사용한다. 혼돈이든 카오스든 여기엔 모든 생물체의 가능태(可能態)가 모여 혼재돼 있다. 가능태로 있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만 인간, 침팬지, 원숭이 등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그러나 혼돈 상태에선 모든 게 혼재되어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노자가 천지의 시작을 무명(無名)이라 규정한 건 이 때문이다. 또 온갖 생명체들이 가능태로 있어 묘(妙)할 뿐이다. 그러니 어떤 모습을 갖고 등장할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노자는 하고자 함이 없음(無欲)을 통해 만물의 묘함을 본다고 말한다. 


이제 오랜 시간이 흘러 생명 분화가 시작되면 혼재된 상태에서 먼저 동물과 식물이 구분된다. 또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동물은 포유류와 비포유류로, 포유류는 뭍에 사는 것과 물에 사는 것으로 구분된다. 600만 년 전 암컷 유인원이 낳은 딸 둘 중 하나가 침팬지의 조상이 되고, 다른 하나가 인간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의 인간도 분화하면 몇백만 년 후엔 서로 다른 동물로 만날 것이다. 이런 생명 분화로 인해 지구상의 생명체는 계속해서 그 종류가 늘어날 것이다. 자연스럽게 만물의 어머니가 된다. 물론 새로 생겨나는 생명체마다 이름이 붙여지기에 노자가 말하는 유명(有名)도 이렇게 이루어진다. 


노자는 하고자 함(有欲)을 통해 만물의 요(요)함을 본다고 말한다. 요함에 대해선 설명이 좀 필요하다. 사전을 보면 요는 ‘가장자리’이다. 만물의 어머니를 왜 가장자리라 하는 걸까? 이를 위해 가운데 한 점을 중심으로 생겨난 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운데 한 점은 모든 생물의 가능태들이 모여 혼재된 곳이다. 시간이 흐르면 이 점은 원이 되고, 시간이 더 흐르면 보다 큰 원으로 변한다. 이것이 생명 분화의 과정이다. 600만 년 전 유인원이 인간과 침팬지로 구분된 것도 원이 커진 결과이다. 그런데 가운데 점에서 볼 때 그려진 원은 가장자리이다. 이 가장자리에선 모든 생명체가 가능태에서 벗어나 구체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우주 자연의 원리, 즉 천도(天道)이다. 


따라서 우주 자연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름 없음(無名)과 이름 있음(有名)의 관점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즉 이름 없음에선 천지의 시작을, 이름 있음에선 만물의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고자 함이 없음(無欲)에선 만물의 묘함을, 하고자 함이 있음(有欲)에선 만물의 요함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유와 무는 이름만 달리 할 뿐 같은 데서 나왔다(此兩者同出而異名)”고 말한다. 즉 유·무는 이름이 있고 없음의 여부, 즉 인식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지 실제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즉 작아지면 한 점이고, 커지면 원이다. 노자는 이를 현(玄)이란 단어로 수식한다. 현이란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로 구분과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상태이다.(현에 대한 설명은 2015년 9월 2일자 참조) 


여기가 동아시아 전통사상과 서구사상이 근본적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서구사상이 유·무를 실제의 차이, 즉 존재론적 차이로 파악하는 데 반해 동아시아 사상은 유·무의 실제 차이는 없고, 단지 인식론적 차이만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게다가 서구사상은 무(無)를 부정적 의미로, 유(有)를 긍정적 의미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무명 또는 무욕에 해당하는 카오스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유명 또는 유욕에 해당하는 코스모스(cosmos)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서구는 코스모스를 ‘질서 있는’ 상태로, 혼돈을 ‘질서 없는’ 상태로 파악해서이다. 그래서 서구의 역사관 내지 문명관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  


또 서구사상은 유와 무를 연결이 아닌 분리로 파악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0/1’의 디지털 조합도 유/무를 분리한 결과이다. 즉 ‘0’은 무로, ‘1’은 유로 보아서이다. 서양적 논리가 기본적으로 ‘네/아니요’로 구성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유/무의 분리는 의미의 객관화와 명료화에 쉽게 또 빨리 도달하는 길이다. 그래서 유·무가 혼재된 한 점에서 ‘0’과 ‘1’이 분리되고, 1은 ‘01’과 ‘10’으로, ‘01’은 ‘0010’과 ‘0001’ 등으로 분리된다. 이런 분리가 끝없이 계속된 결과가 ‘001010010’인데 이것이 가장자리를 구성한다. 그 결과 0·1이 혼재된 한 점과 가장자리 사이의 간격이 커짐으로써 그 연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서구사상은 연결을 위해 통섭(通攝)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노자는 현(玄)이란 수식어로만 부족하다고 보았는지 문(門)이란 개념을 마지막으로 동원한다. ‘도덕경’ 1장은 “현하고 또 현하니 모든 묘함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로 끝난다. 왜 문이란 표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의 반대 개념인 벽(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벽은 이쪽과 저쪽으로 경계를 짓는다. 그래서 벽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유·무는 연결된 게 아니라 구분된다. 그렇지만 그 구분조차 없애는 게 문이다. 문은 이쪽과 저쪽을 통하게 해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을 지닐 때 비로소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란 명제가 성립한다. 여기에서의 방점은 ‘늘 그렇지 않다(非常)’이다. ‘늘 그렇지 않다’는 건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머릿속 의미인 기의(sd: signified)와 이를 표현하는 언어라는 기표(sr: signifier)로 설명하면 ‘기의≠기표’가 아니라 ‘기의≒기표’이다. 예를 들어 비상구(非常口)는 ‘출입문이 아니다(기의≠기표)’가 아니라 ‘출입문이지만 늘 사용하는 문이 아니다(기의≒기표)’일 뿐이다.


몇 해 전 광주에서 열린 디자인비엔날레의 표어가 ‘디자인을 디자인이라 하면 디자인이 아니다(圖可圖非常圖)’였다. ‘도(道)’를 ‘도(圖)’로 바꾼 재미난 표어인데 ‘디자인이 아니다(기의≠기표)’라는 해석은 잘못됐다. 마땅히 ‘디자인을 디자인이라 하면 늘 그러한 디자인이 아니다(기의≒기표)’로 했어야 했다. 디자인(design)이 해체한다는 ‘de’와 기호란 ‘sign’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므로 기존 기호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디자인비엔날레의 표어는 ‘늘 그러한 디자인이 아니다’로 하는 게 취지에도 맞다. 


머릿속 의미인 기의와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기표 간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기의=기표’이다. 이는 내 머릿속 의미를 언어가 완전히 재현할 때 가능하다. 둘째, ‘기의≠기표’이다. 이는 내 머릿속 의미와 이를 표현하는 언어 사이에 어떤 일치도 이뤄지지 않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셋째, ‘기의≒기표’이다. 내 머릿속 의미와 언어가 일치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경우이다. 사실 우리는 ‘기의=기표’를 지향하지만 결과는 ‘기의≒기표’로 귀결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세상에 어떤 언어도 내 머릿속 생각을 명료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해서이다.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은 바로 이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서양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도 이 문제를 두고 평생을 씨름했다. 그의 첫 번째 논문은 ‘기의=기표’에 손을 들어 주었다. ‘언어의 그림론’, 또는 재현론이 그것이다. 그는 “서구 형이상학의 제 문제는 모두 끝났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며 은퇴의 길을 선택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결국 ‘기의≒기표’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언어의 용도론’이다. 이처럼 언어문제는 서양 현대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노자는 2500년 전에 이미 이 문제를 두고 크게 고민했으니…. 


(문화일보 5월 25일자 25면 13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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