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거룩한 은혜 


태모 고수부님은 여자 하나님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님은 여자 하나님이요, 어머니 하느님이시다. 또한 만유 생명의 아버지이신 상제님과 합덕(合德)하시어 정음정양의 후천 오만년 조화선경을 열어 주신 크고 거룩하신 생명의 어머니이시다. 


태모 고수부님은 상제님과 함께 만유생명의 어버이가 되시어 천하창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는"수부 대우를 잘하면 수명도 연장될 수 있느니라."하셨다. 


태모님은 상제님으로부터 종통대권을 전수하시고 대도통을 하신 후 천지 조화권을 자유로 쓰신 분이다. 


단명할 사람들에게는 수명줄을 이어 주시고, 자손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자손줄을 내려 주셨다. 또 병마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치병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악척(惡隻)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척을 끌러 주셨다. 


나아가 온 인류의 원과 한을 풀어 주시고 죄업과 고통을 대속하시며 후천 새 생명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 



태모님의 탄강과 유소 시절


태모 고수부님은 1880(경진)년 음력 3월 26일,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成道里)에서 탄강하셨다. 


태모님의 존성은 고(高)씨요, 본관은 장택(長澤)이요, 성휘는 판(判) 자 례(禮)자이시다. 


태모님은 여섯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외외가 송(宋)씨의 승문(僧門)에 가서 생활하셨다. 


아홉 살 때에는 다시 정읍 대흥리(大興里)에 사는 이모부 차치구(車致九: 차경석 성도의 부친)의 집으로 이사하셨다. 이 때 동학을 믿는 이모부를 좇아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읽으셨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모의 중매로 같은 마을에 사는 신여옥(申汝玉)과 혼인하여 딸 태종(太宗)을 낳고, 28세 때인 1907년에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 되셨다. 


이렇듯 태모님의 삶은 어리실 때부터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셨다. 만유 생명의 어머니로서 억조창생의 고통과 어려움을 대속하시기 위해 일찍부터 만고풍상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수부 책봉 공사와 종통대권 전수


1907년 10월, 상제님께서 차경석(車京石) 성도에게 "내 일은 수부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수부를 천거하라."고 하시자 차경석 성도가 홀로 계신 이종누님을 수부로 천거하였다. 


11월 3일에 상제님께서 태모님을 맞아 '수부 책봉예식'을 거행하실 때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 동안 정력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하셨다. 


이어 태모님으로부터 천지대업에 불변하실 것을 다짐 받으시고 상제님께서는 종통대권(宗統大權)을 전수하실 것을 굳게 서약하셨다. 


공사를 마치신 후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천지대도의 수부 공사(首婦公事)니라. 만백성의 부모가 되려면 이렇게 공사를 맡아야 하느니라."하셨다. 


이로부터 태모님께 수부의 법도를 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서신(西神)이니라. 서신이 용사(用事)는 하나 수부가 불응(不應)하면 서신도 임의로 못 하느니라."하시며 여러 가지 공사를 처결하실 때 태모님께 일일이 물으신 뒤에 행하셨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그대와 나의 합덕(合德)으로 천지를 개조하느니라."하신 대로 태모님과 하나 되시어 정음정양의 천지이법에 따라 공사를 집행하신 것이다. 



상제님의 어천과 '옥황상제'명정


1908년 12월에 상제님께서 태모님을 천하의 일등(一等)으로 내세우시는 공사를 행하시고, 이듬해인 1909년 6월 24일에 김형렬 성도의 사랑방에서 어천하셨다. 


태모님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시다가 상제님께서 여러 차례 성령으로 나타나 일러 주시고, 또 수행중에 영안이 열려 비로소 모든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신 태모님은 이튿날 구릿골에 모신 상제님 초빈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일찍이 상제님께서'잘 간직해 두라'하시며'옥황상제'라고 써 주신 명정(銘旌)을 상제님 가슴에 덮어드리셨다. 


이날 태모님께서 행하신 '옥황상제'명정 의식은, 상제님의 반려자 수부(首婦)로서 '증산 상제님이 곧 옥황상제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셨다는 증표요, 만유생명의 어머니 하느님으로서 억조창생들에 대해 '옥황상제이신 증산 상제님을 제대로 신앙하라'는 준엄하신 천명인 것이다. 

 


대도통과 도운의 종통맥 선언


태모님께서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1911년 4월, 상제님께서 천지대신문을 열고 도통하신 모악산 대원사(大願寺)에 가시어 상제님 성령과 혼례식을 올리신 후, 칠성각에서 49일 동안 진법주(眞法呪)수련을 하셨다. 


이어 신경수 성도의 집에 가시어, 일전에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며 '도술'이란 글을 써 붙이신 윗방에서 100일 동안 수련하시고 활연대각(豁然大覺)을 하셨다. 


이해 9월 19일, 태모님은 처음으로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태모님께서 천지조화성령을 받으시고 대도통(大道通)을 하셨다. 이어 태모님께서 상제님의 음성으로 차경석 성도에게 도운의 종통맥(宗統脈)과 추수할 인사 대권자에 대해 선언하셨다.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11:19:10) 


이로부터 태모님은 성령에 감응 되시어 신권과 화권을 자유로 쓰시고, 신이한 기적과 명철한 지혜를 나타내시며, 천하창생의 태모로서 상제님 대도의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였다. 

 


대흥리 도장과 포정소 도수


9월 29일, 태모님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약장(藥欌)을 가져오신 후, 10월에는 상제님 성도들을 불러 모아 포정소(布政所) 문을 열고 도장개창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것으로써 포교 방법을 정하고 조직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3년 만에 서남해의 모든 섬에 태을주가 울려 퍼지는 포교의 대세가 굽이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질정해 놓으신 천하파종(天下播種) 공사와 포정소 도수가 발현되었으며, 태모님께서 선언하신 도운의 낙종 도수가 시작되었다. 



성도들의 분파와 송산리 이거(移去)


대흥리 도장 중반기에 이르러 차경석 성도는 교세를 움켜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를 간파한 성도들은 모두 분개하여 도문을 떠나거나 따로 문호(門戶)를 열었다. 


1916년 동지절에 차경석 성도는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하고 연원체계로 24방주(方主)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어 태모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예문(禮門)'이라 하여 신도들의 출입을 통제시킨 후, 모든 교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켜 나갔다. 


태모님께서는 수개월 동안 신도들을 상대하지 못하시고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더 이상 대흥리에 머물러 계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18년 9월 21일 새벽, 태모님은 무작정 대흥리를 떠나셨다. 정읍역에서 기차를 타시고 부용역에 내리신 후, 김제 송산리(松山里)에 사는 천종서(千宗瑞) 성도의 집으로 가셨다. 



조종리 도장과 무오년 옥화(獄禍)


얼마 후 조종리(祖宗里) 강(姜)씨 신도들이 태모님께 찾아와 조종리로 가실 것을 간청 드렸다. 이때 태모님께서"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 하나 보고 가노라"하시며 허락하시고 조종리로 가셨다. 


조종리는 진주 강씨들이 150호 정도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그중에 대여섯 명이 신도였다. 


처음에는 중조 마을에 있는 두 칸짜리 작은 오두막 집에 계시다가, 한 달 뒤 11월 중순에는 하조 마을 강응칠 성도의 집으로 옮겨 가셨다. 


그 즈음 대흥리 교단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 신도 문인택(文仁宅)이 성금 10만여 원을 대흥리 본소로 이송하기 위해 들어오다가 목포항에서 발각된 것이다. 차윤칠 성도를 비롯한 방주 18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자 교단에서는 모든 책임을 태모님께 떠넘겨 버렸다. 


11월 25일 정오쯤 되었을 때, 순사들이 태모님을 체포하기 위해 조종리로 들이닥쳤다. 강응칠 성도가 급히 달려와 피신하시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모님은 "내가 이미 알고 있노라. 그러나 이번에 내가 순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지니 피하는 것이 불가하니라."하셨다. 


그리고 즉시 소멸음해부(消滅陰害符)에 해마주(解魔呪)를 적어 불사르신 후 순사들을 불러오게 하시어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셨다. 


태모님은 정읍 경찰서에서 하루를 지내시고 이어 목포 경찰서로 가셔서 모진 심문을 받으시며 옥고를 치르신 후 38일 만인 1919년 1월 3일에 석방되셨다. 만유 생명의 어머니로서 장차 성도들이 받을 고초를 대속하시기 위해 형극의 옥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태모님께서 옥화(獄禍)를 치르신 이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본 경찰은 대경실색하여 이 사건을 더 확대하지 않고 5월 5일에 모두 불기소로 석방하였다. 



도장 건립과 주문 수행


1919년 윤7월 18일, 성도 12명의 의연(義捐)으로 여섯 칸 겹집 전퇴의 도장이 건립되었다. 태모님께서는 도장에 계시면서 농사나 감독하시고 한가로이 수행만하셨다. 


얼마 후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태모님께서 포교 운동을 크게 일으키시기를 청했다. 그러나 천지도수를 집행하시는 태모님께서는 그 시기가 아직 이르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일이 정한 도수가 있느니라.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 마땅히 농업에 힘쓸 것이요,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좇아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 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11:47:5~6) 


1920년 8월에는 고찬홍(高贊弘) 성도가 태모님을 찾아와 인망을 얻는 방법을 여쭈었다. 태모님께서 "서쪽으로 가면 알 일이 있으리라"하시고 그에게 포교 기운을 붙여 옥구(군산)로 보내셨다. 


옥구로 간 고찬홍 성도는 산북동에서 박종오(朴鍾五) 성도를 만나 함께 포교에 종사했다. 마침내 그 지방에 포교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도세가 성장하면서 신도들의 수가 늘어나자 전준엽(田俊燁) 성도는 태모님께 청하여 도장 유지의 원칙을 세우고 1년에 열네 번씩 올리는 치성을 열다섯 구역이 분담하기로 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상제님 성탄치성부터 시행하였다. 


 

태모님의 10년 천지공사


수년이 지난 1926년 3월 5일, 태모님께서 성도들을 도장에 불러 모으시고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셨다. 


"이제부터는 천지가 다 알게 내치는 도수인 고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행하겠노라. ... 건(乾) 십수(十數)의 증산 상제님께서는 9년 공사요, 곤(坤) 구수(九數)의 나는 10년 공사이니 내가 너희 아버지보다 한 도수가 더 있느니라."(11:76:2~4)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낳는 일이요, 나의 천지공사는 키우는 일이니라."하셨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탁태하여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품어 기르는 이치와 같이 태모님은 만유생명을 품어 기르시는 어머니 하느님이시다. 


태모님은 1926년에 천지공사를 시작하시어 선화하신 1935년 10월까지 10년 동안 집행하셨다. 태모님의 천지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6년에 수석성도 고민환(高旻煥)을 대리(代理)로 내세우시어 집행하신 칠성용정 공사(七星用政公事)부터다. 


"칠성 공사는 후천 인간을 내는 공사요, 낳아서 키우는 공사니라. 후천 기운은 사람을 키우는 칠성 도수(七星度數)이니, 앞 세상은 칠성으로 돌아가느니라." (11:99:1~2) 


이 공사를 시작으로 태모님께서 조종리에서 집행하신 주요 공사는, 여자 신도들이 늘어나 도장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조왕(??王) 공사, 태모님을 온 인류의 어머니로 부르도록 하신 공사, 12제국의 운도를 뽑아 하나로 통일하는 공사, 억조창생의 죄업을 빌고 천지에 기도하시며 대속하신 공사, 의통성업의 육임 구호대도체 조직 공사, 상제님 어진(御眞) 봉안 공사, 추수 도운의 인사 대권자를 내는 남조선 배 공사, 인마(人馬)공사, 태자(太子) 도수, 숙구지(宿狗地) 도수 등이다. 



열 항목의 계율과 조직 개편


1928년 5월에 이르러 성도들의 신앙심이 점차 사욕과 감투욕에 젖어 도장 기운이 묵어가자 이를 안타까워하신 태모님께서 열 항목의 계율을 내려 주시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게 하셨다. 


그러나 개심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간부 조직을 새롭게 개편하셨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 중 강운서(姜雲瑞)와 강원섭(姜元??) 성도만이 4정방에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칠성용정 공사 때부터 불만을 품기 시작한 조종리 강씨 신도 몇 명이 노골적으로 태모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도장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이후로 그들의 모략과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왕래하던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대부분 끊어졌다. 



왕심리 도장과 보천교 신도 구휼


1929년 8월 15일, 태모님께서 한가위치성을 올리신후에 정읍 왕심리(旺尋里)에 집 한 채를 사 놓게 하시고 이사할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9월 18, 9일 경에 이르러 "인간의 원한이나 신명의 원한이 동일하니 할 수 없는 일이로다."하시고 정읍으로 이사하실 뜻을 밝히셨다. 


9월 21일, 태모님께서 강휘만(姜彙萬) 성도에게 도장을 물려주시고 김제역을 통해 왕심리로 이거하셨다. 정읍 왕심리는 대흥리와 이웃한 마을로 순흥 안(安)씨 집성촌이다. 태모님께서 이곳에 2년 6개월 동안 계시면서 집행하신 공사는 모든 원혼신 해원 공사, 후천창생 갱소년 공사, 인간 세상의 선악 판별 공사 등이다. 


태모님께서 머무르시는 동안 많은 보천교 신도들이 찾아와 굶주림을 호소하였다. 만유생명의 어머니이신 태모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제하셨다. 그리고 순교한 보천교 신도들의 해원치성을 올려 영혼을 위로해 주시는 등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다 바치셨다. 



용화동 도장과 세 살림 종결


1930년에 이르러 금구 용화동(龍華洞)의 이상호(李祥昊) 교단에서 태모님께 수차례 사람을 보내 용화동으로 가실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때마다 태모님께서는"금구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지리라."하신 상제님말씀을 들어 거절하셨다. 


1931년 7월 29일에는 용화동 교단의 이상호가 조학구(趙鶴九)와 함께 직접 태모님을 찾아와 용화동으로 본소를 옮기실 것을 간청하였다. 이 때 고민환 성도는 도국변천(道局變遷; 삼변성도)의 일이라 생각하고 태모님께 용화동으로 가실 것을 청하였다. 


그해 9월,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행차하시어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하시고 돌아오셨다. 그리고 11월에 다시 가시어 동지치성을 봉행하신 후 도장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여 선포하셨다. 바야흐로 태모님의 용화동 도장이 출범한 것이다. 


태모님은 왕심리로 다시 돌아오셔서 도장 일을 모두 정리하시고 이듬해인 1932년 3월 20일에 비로소 용화동 도장으로 가셨다. 



용봉(龍鳳) 종통맥 공사


태모님께서 용화동 도장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려 자주 용봉(龍鳳)을 그리시고 그것을 깃대에 달아 꽂아 놓으셨다. 그리고 이상호에게 당부하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 해야 하느니라"하셨다. 이것은 곧 제3변 추수 도운의 지도자에 대한 용봉 종통맥 공사의 말씀이다. 


이 밖에 용화동에서 집행하신 주요 공사는 도전(道典) 성편 공사, 후천 대불(大佛) 도수와 선천 불교 막장공사 등이다.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오신 지 얼마 후, 일찍이 대흥리와 조종리 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태모님은 또다시 퇴색·변질되어 가는 신도들의 믿음에 안타까워하셔야 했다. 


고민환 성도가 탄식한 대로, 태모님의 신도(神道)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신도들이 허례를 일삼고 생명을 다루는 도업을 앞에 두고 장난삼아 망동했던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 천지일심으로 상제님과 태모님의 뜻을 받들어 신앙하는 일꾼이 너무도 드물었다. 


태모님은 다시 도(道) 살림을 옮기셔야 했다. 일찍이 거미의 이치를 들어 오성산으로 가실 뜻을 밝히신 적이 있었다.


태모님께서 고민환에게 "너의 집 근처에 오성산이있느냐? ... 거미가 집을 지을 때는 이십사방(二十四方)으로 줄을 늘여서 짓고, 다 지은 뒤에는 남이 알지 못하게 한편 구석에 숨어 있는 법이니 너는 그곳을 떠나지 말라."하시니라. (11:119:1~2) 


1932년에 옥구 신도 문명수(文明洙)와 이중진(李仲振) 성도가 태모님께 문안차 찾아왔다. 이날 태모님께서 두 사람에게 '동지치성을 오성산에 가서 봉행할 뜻'을 말씀하시고 '오성산 도장을 속히 완공하라'고 재촉하셨다. 



오성산 도장과 은거(隱居) 생활


1933년 11월 5일 동지 하루 전, 태모님은 세 살림 도운의 파란곡절을 뒤로하시고 용화동을 떠나 오성산(五聖山) 도장으로 옮겨가셨다.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신 태모님께서는 건강이 너무도 쇠약해지셔서 오성산 도장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한 성도의 등에 업혀서 올라가셨다. 


태모님께서 이곳에 은거(隱居)하시면서 보신 공사는 '개벽기에 억조창생을 살려 내는 공사'와 '전선필(田先必) 성도에게 붙이신 말씀 증언 사명 도수'등이있다. 


태모님께서 오성산에 오신 이후로 익산, 전주, 임피, 옥구 등지의 신도들이 종종 찾아와 문후를 드렸다. 그런데 도장 살림이 매우 어려워서 어떤 때는 고춘자(高春子) 성도가 아랫마을에서 음식을 구해 태모님을 봉양하기도 하였다. 

 


태모님의 선화(仙化)


태모님께서 오성산에 오신 지 2년이 지난 1935년에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빨리 가야 너희들이 잘될 것이라."하셨다. 또 2년 전부터 종종 '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고 하시면서 장차 선화(仙化)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10월 5일 저녁, 태모님께서 목욕물을 데우게 하여 친히 목욕을 하신 후에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자리에 누우셨다. 두어 시간이 지나 6일 축(丑)시가 되자 상제님의 어진을 향해 손을 흔드시더니 "너희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하고 세 번 거듭 말씀하신 후에 조용히 선화하셨다. 


그 동안 태모님께서는 창생들의 원한과 죄업을 대속하시고 액(厄)과 척을 끌러 주시며 대개벽기에 처한 인류를 하나라도 더 건져서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넘겨주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생명까지 다 불사르셨다. 


만유 생명의 어머니 하나님으로서 베풀어 주신 태모 고수부님의 무한한 사랑과 거룩한 은혜는 이 우주가 다하도록 영원할 것이다. 



증산도 종통 도맥   (진리기본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