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서.믿음과 은총' 만이 교회의 참 정신을 죽였다?

진성조 | 2011.05.29 00:47 | 조회 6287
[‘유럽 종교개혁 현장’ 연재를 마치고]김경재-이정배 교수 좌담
종교개혁 성서적 맥 되찾았지만 인문학적 요소 잃어
자본주의에 먹히고 성직자 중심 된 기독교 개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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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후스, 루터, 칼뱅 등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연재를 마치며, 종교개혁의 현장인 유럽에서 신학을 연구했던 한국 신학계의 두 거장을 만났다. 김경재(71) 한신대 명예교수와 이정배(56) 감신대 교수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과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배운 김 교수는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을 지냈고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크리스찬 대학교수들의 모임인 한국기독교자수협의회회장이다. 김 교수는 네덜란드 위트레이트대학에서, 이 교수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각각 신학을 공부하며 유럽의 종교개혁 현장을 체험했다. 지난 23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3가 환희당에서 두 교수는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을 여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계몽주의보다 근본적으로 앞서 근대 여명 열어
 

-중세 가톨릭교회를 깨고 500년 전 종교개혁을 통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등장한 것이 정신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김경재 “좋게는 중세기 1천 년을 끝내고, 그리스도교회가 전통이라는 묵은 벽에 갇혀있는 것을 헐어내고, 그 속에 있는 본래의 생명의 새순을 찾아내려는 개혁운동이었지만, 좁은 의미에서 기독교 안에서의 종교개혁의 의미보다는 사실 유럽 전체 내지 세계 문명사에서 근대정신의 여명기에 호흡을 같이한 인류의 정신운동이었다.


소위 중세라는 전체 이름으로 개인의 개체성이나 인격, 자유가 망실되던 시대 속에서 16세기라는 근세가 동트는 여러 가지 조짐 중에서 가장 두꺼운 종교라는 외피를 뚫고 나온 것이다. 근세의 재발견에 있어서 인간의 개개인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기 발견의 의미가 더 컸다.”


이정배 “동감이다. 에른스트 트렐치도 명백히 종교개혁은 계몽주의보다 근본적으로 앞서서 근대의 여명을 열었다고 했다. 인간 개체성의 발견을 도운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종교를 넘어서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민족의식의 발현과 함께 일어났다. 지금으로서는 민족의식이라는 게 부정적인 것도 많지만, 당시는 한 민족이 민족 주체성을 발현했던 시기다. 구텐베르그의 활자 매체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성서가 번역이 안 됐으면 종교개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성서가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서가 모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는 어떤 측면에선 암흑이었지만 위대한 종합의 시대


김경재 “사상사적으로 좁게 구체적으로 의미를 언급한다면 흔히 서구라파의 2천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크게 서구문명 자체가 그리스 아테네로 상징되는 그리스의 철학적 사유체계와 이스라엘 히브리민족의 독특한 종교적 파토스가 두 개의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엎치락뒤치락 자라난 쌍둥이인데, 두 사상이 종합이 됐다가 분리됐다가 하는 역사의 반복인 것 같다, 중세기는 스콜라신학으로 대변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기에 이른 것처럼 주로 플라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성서적 사유체계의 웅대한 종합이었다. 그 중세기를 욕을 많이 하고, 어떤 측면에선 암흑이었지만, 그만한 종합이 다시 쉽게 오기 어려을 정도로 종합의 시대였다.


종합이 이루어지자마자 곧바로 해체 지점이라는, 종합은 또 양쪽 위대한 특유성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지금 보면 루터나 칼뱅의 초기 개혁자들은 종합을 통해서 잃어버린 본래 성서적 히브리적 정신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좋은 점이면서도 지금 보면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돌아보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50이었다면 잃은 것도 50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서적 맥을 되찾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 철학적, 존재론적, 넓은 의미로선 인문학적 요소들이 성서적으로 독이라도 되는 양 배타하고 경원시하고 버림으로서 개신교가 천박하고 좁아진 측면이 있다.”
 

지성이 없이, 원초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부흥회적인 기독교로
 

-루터는 성서로, 믿음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14세기 유럽사회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인구의 3분의1이 죽은 흑사병의 창궐로 인간들은 죄의식에 스스를 가두고, 중세교회가 이를 악용했던 때 종교개혁가들이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소식을 주기도 한 반면 오직 믿음만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나 결과를 도외시하면서 성화(聖化), 즉 수련을 통해 단련되고, 정결되는 길을 도외시하는 등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이정배 “종교개혁의 긍정적인 면을 좀 더 짚어보면 12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히브리와 헬라를 통합하는 활동을 했다. 그 당시엔 교회가 권위가 있어서 12세기에 아랍문명이 들어와 그때 아리스토텔레스를 발전시켜 유럽문명이 발전했다. 모든 과학문명도 거기로부터 들어왔다. 아랍지역과 활발하게 일하던 상인계급들이 거기서 돈을 벌어와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을 했다. 그래도 교회는 권위가 있어서, ‘시간은 하느님의 것인데, 시간을 담보로 돈을 번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그렇게 고리대금업자들을 교회에 발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랬기에 고리대금업자들은 돈은 있는데,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고 교회가 건축을 하면서 상인 계급의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결국 그 돈을 받아들이며 면죄부를 팔았다. 상인들이 돈으로 영혼도 구원을 받게된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이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돈의 힘이 셌다. 종교 개혁이 그런 가치관을 역전 시켰다. 그게 문명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자본주의에 먹힌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로 취급해야 한다. 요즘은 성직주의나 루터가 공헌한 것은 만인제사장주의다. 일상의 모든 직업이 귀하고, 모든 게 하나님과 통한다는 것이니, 성직 구조도 깬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함석헌 선생이 한탄한 것이 왜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가 성직자 중심의 기독교가 되어 버렸냐는 것이었다. 오늘 이런 문제도 짚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돈의 힘이 센 가치관 역전 시켜


종교개혁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면을 보면 만약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다면 오직 믿음으로만이란 말을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루터의 개혁도 천년의 가톨릭 상황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다. 믿음은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있겠느냐. 지금은 행위를 더 강조하지 않았겠느냐.


두 가지 종교개혁의 한계 중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이 한 공통적인 것은 신학에서 아리스토렐레스적인 것을 제거한 것이다. 자연이 가진 능동성. 즉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있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 길에 대해선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중세기의 유기체적인 세계관, 즉 자연의 능동성을 다 부정해버린 것이다. 종교개혁이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만나서 상당히 근대 과학 혁명을 일으키는 힘은 됐지만 오늘날 보면 자연의 능등성과, 인간의 가능성과 다른 종교의 가능성을 다 부인해버리는 원초적인 모티브를 제공했다.


또 하나는 모든 아이콘 성상을 다 파괴해버린 것이다. 성상 자체가 우상도 아닌데, 성상을 파괴한 것은 개신교가 씻지 못할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감수성과 영적 감수성의 가능성을 부인해버린 것이다. 구텐베르그의 활자로 개혁이 성공했는데, 활자에 갇히는 모순을 낳았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 문자주의로 갇히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이나 시적인 감각을 닫고, 너무 좁은 기독교의 모습을 낳았다. 종교개혁이 자유로울 수 없다. 루터가 개혁했다면 오늘엔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김경재 “같은 얘기인데, 종교개혁의 원리, 모토라고 하는 것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혜’만이다. ‘오직’이라는 단어를 루터나 칼뱅 등 16세기 개혁자들이 썼을 때 의미와 현재 한국의 보수화한 개신교가 쓰는 것은 다르다. 17세기 이후로 변질해간 개신교의 좁아진 종파종교로서의 흐름은 당시와 큰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지금 현재 말한 것처럼 ‘오직 성서’만 했을 때 성서 이외의 가치를 부인하고 문자적 의미로서, 그것을 절대화할만큼 책종교, 경전 종교를 만들려고 했겠느냐. 그렇지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생들, 루터나 칼뱅, 멜랑히톤의 가슴에 울렁거렸던, 생동하는 지성이 죽어버렸다. 17세기부터, 급전직하로 굳어져버렸다. 위대한 선생들의 뒷정리를 하면서 17세기부터 문제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경건주의운동도 있지만 루터 칼뱅 등 자신의 신앙과 21세기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행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오직 성서와 믿음과 은총 세 가지가 개신교 특징이라지만 그 독 때문에 교회가 죽어버렸다. 성서라는 것이 성서주의라는 책종교가 되어버렸고, 자기 수행과 성화와 책임에 대한 열정이 죽어버렸고, 은총 강조가 인간 가능성에 대한 일체의 노력을 터부시하고 정죄하는 단계로 가버렸다.


지성이 없이, 원초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부흥회적인 기독교로 변질


내가 깨닫고 보니, 초기 개혁자들은 위대했지만, 그 뒤로 그 정신을 이어가지 못했다. 계몽주의가 17~18세기 200년간 꽃피웠지만, 초기 계몽주의와 손을 맞잡고 더 창조적인 세계로 끌고나가야 하는데, 마치 계몽주의의 적대자처럼 되어버렸다. 계몽주의를 정면 돌파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독단으로 치닫고, 진화론이나 과학사상에 대해 17세기에 교리적 기독교로 굳어져 버렸다. 평신도들은 그래도 청교도운동, 인간의 내면적인 영성을 지켜가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교리주의와 접맥되었다.


그 이후엔 인간의 지성에 반감을 가져, 지성이 없이, 원초적인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부흥회적인 기독교로 변질해버렸다. 늘 그것이 아쉽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배경은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불길이 한국의 개화기와 맞닿아 창조적인 역할도 했지만, 그 시대를 문명사적으로 끌고가는 거대한 과학사상이나 인문주의, 철학사상과 깊은 심층적 대화를 하면서 그리스도 진리를 천명하는데 실패하고, 그리스도교라는 좁은 게토 속에 갇혀버렸다. 특수한 종파 내지 종단의 종교가 되어버렸지 세계사 안에서 자기를 재해석해내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특별히 아쉬운 것은 루터 칼뱅의 글들을 읽어보면 내적인 성화, 수행, 요새 말로는 영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지막엔 순수한 인문주의 자유주의와 견해를 달리하지만, 일단 인문주의를 익히고 성서를 파고들어간 사람들이다. 아예 인문주의 교육 자체를 무시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문주의 자체가 그리스도 신앙의 독이 되고 해가 되는 것처럼 해석해버린 종파적 교리적 종단이 되어버리지 않았느냐.”
 

교회가 좋은 일 하는 시민단체에 십일조 내 돈을 분산시켜라
 

-기독교가 3~4세기 공인을 받으면서 세계 종교의 토대가 닦였지만 박해받던 초기의 생명력을 잃어 버렸는데, 천년의 어둠을 깨고 개신교를 제도적으로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루터도 정치권력의 도움을 받고, 농노들의 등을 돌리고 제후편을 든다든가, 칼뱅도 교권으로 타인을 사형시키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를 제도로 정착을 시켰지만, 권력의 도움을 받고 출발한 것이 개신교의 한계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이정배 “그 점도 지적해야 한다. 루터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제후의 도움을 받아 농민들을 억압해서 그에 대한 반발로 재세례파가 등장했다. 그로부터 국가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첨예하게 되어가고 있지 않느냐. 진보파에겐 정치 참여하지 말라고 하던 보수 개신교인들이 요즘은 이명박 정부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정치와 종교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루터가 두 왕국설 얘기하면서 정치적인 입장에선 보수성을 띄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닌데, 분리하는 구조로 갔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그렇지 않은 면도 있긴 하지만 고루한 정통주의로 가버렸다. 분리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교회 안에선 경건주의, 밖에선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법으로 하고, 세상일은 세상의 법으로 해야 한다는 루터의 두 왕국설은 보수성을 띄었지만, 칼뱅은 그렇지 않았다. 칼뱅은 세속정치와 종교가 나뉠 수 없다는 입장으로 갔다.”


김경재 “그런 주제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장공 김재준은 래디칼한 사람은 아니다. 87세까지 살면서 신학교 학장도 하고, 말년에 민주화운동도 했지만, 일생을 살아보고 개신교 전체를 총체적으로 볼 때 결국 개신교는 루터 칼뱅 이후 시대적 상황에서 근세적 중산계층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돼, 사회계층적으로 보자면 본래 성서가 늘 관심을 가진 가난한 바닥의 춥고 배고프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보다도 중산계층에 뿌리내리고 안주해버렸다.


강남으로 갈수록 자기 이익의 확장과 정당화에 대한 이념적 역할


최고급의 귀족은 아닐지라도 중산계층이 되다보니, 봉건주의를 뒤집고 나온 부르주아가, 초창기엔 사회 변혁 계층이었지만 그들이 지배적 부르주와가 되어 좌파운동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들이 그런 소리에 잠을 깬 것이 20세기 들어서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흑인신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니었다. 루터는 근세적 사람이면서 중세적 사람이었다. 민중신학자인 서남동이나 안병무가 아닌 김재준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수야 계층적 차별을 한 분은 아니지만,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가 살아있을 때 관심을 가진, 너희들이 춥고 배고픈 떠돌이었으므로 사회 공동체에서 그처럼 소외된 자들의 인권과 존엄을 배려해라는, 성서를 꿰뚫는 그런 진리를 소홀히해왔다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중산계층들이 보다 더 높은 경제적, 사회적 부를 창출하려는, 계급 상생적 운동 속에 있는 거대한 흐름 속에 개신교가 매몰돼 버렸다. 장공 자신이 반성을 한다. 정말 예수가 말하고, 구약 예언자들이 말하고, 모세 율법이 말한 하비루들이 하나님 형상을 한 동일한 인간인데,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인간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배려와 정의를 위해서 너희들이 얼마나 일을 했느냐, 신학이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 비판은 21세기 들어와서야 나왔다.


그리스도교가 가진 부란 교인들이 낸 헌금이다. 오늘날엔 경제적 활동을 통해 부를 자기가 쟁취했으니 모두 내 것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마땅히 갈 곳에 쓰여져야 하는데 기독교 자체의 확장에만 쓰여지고 실제적으로는 구제에 3% 미만밖에 쓰여지지 않는다는 통계 자체가 근본 성서가 말하는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를 잃지 말라는 일차적 당부를 잃어버린 것이다. 개신교가 만인을 위한 복음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남으로 갈수록 자기 이익의 확장과 정당화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은 늘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


이정배 “종교개혁은 어떤 기념일을 정해 제사처럼 숭배하는 게 아니고, 종교개혁을 계속해야 한다는 당위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본 회퍼(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다가 사형 당한 독일의 목사) 말을 기억하고 싶다. 본 회퍼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들과 더불어 늘 함께 있던 분이다. 이 일을 위해선 정치와 종교가 나눠질 수 없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늘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이다. 기독교가 어떤 자리에 서있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오늘날 기독교가 중산층으로 있다보니, 보수적인 쪽에 머물려 하고, 이를 위해 자체 논리를 늘 만들어왔다. 종교개혁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서와 맞대어가는 그런 이야기를 준다.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면 오늘날 교회가 (사람이나 돈 등을) 모으기는 잘하는데, 쓰지를 못한다. 반면 좋은 일을 하는 시민단체들이 있다. 교회가 시민단체에 십일조를 내 돈을 분산시켜라.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 요구하고 싶다. 종교개혁은 계속되는 것이다. 메모리얼 데이처럼 지키는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김경재 “최근 깨어있는 기독교의 지성들은 성서 안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다고 한다. 성서 안의 두 개의 큰 수맥 중 하나는 ‘계약 전통’이고 하나는 ‘창조 전통’이다. 계약 전통의 전승은 가난한 자의 해방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고, 창조 전통의 전승은 자연이란 생태계에 임재한 신을 훼손하지 말고 찬양하고 노래하라는 것이다. 그런 한에선 물질적인 가난보다는 축복과 건강이 좋지만, 둘이 분리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오늘날 개신교가 가져야 할 것은 계약 전통 못지않게 창조 전통에 입각해서 피조물의 신음에 대해 예민한 감성을 회복하고, 종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자기 절제, 비움, 고통받는 생명에 대한 연대적 의식을 강화하고, 자기 본래성을 회복해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우상화해버리는 책종교의 정신은 개혁자의 근본 자리에서 보면 배신이다. 오늘 특히 한국 개신교의 개혁은 우상화한 성경을 인류를 위한 책으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속에 하나님과 메시아와 진리를 가둬놓고, 우리가 관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정배 “지금 사순절 기간이다. 이 기간에 가장 많이 보는 영화가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다. ‘패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가 달라진다. 지금은 패션 하면 ‘그리스도의 수난’, ‘고통’,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한’ 등과 같은 개념들로 해석한다.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열정으로 얘기하는 게 옳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왜 죽었느냐? 하나님 나라의 열정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후대에 들어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대속론으로 바뀌었다. 그 열정엔 이웃 종교의 배타성은 자리하지 않는다. 우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열정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열정으로 돌아가면 모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성직자 예언자 등으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면서 수행은 없다
 

-한국 교회는 75%가 장로교다. 칼뱅이 ‘장로교의 아버지’이고 교회 제도를 정비하고, 제네바 시민들도 경건하게 삶 속에서 살도록 했는데, 한국이 칼뱅의 경건주의를 본받으면서 술 담배도 안하면서 형식적인 경건주의는 취했지만 내용면에선 속으로 썩어가고, 경건으로 억압된 감성이 부흥회와 요란한 예배 등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김경재 “칼뱅주의적임을 주장하는 한국교회가 반칼뱅적이다. 칼뱅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 본래적인 의미에서 경건한 영성이 살아있었고, 신앙 생명이 있었다. 칼뱅의 신학은 달리 말하면 성화 신학이다. 겉의 종교적 계율이 아니고, 인간이 본성 자체가 거듭나 사람의 본래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끊임 없는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의롭다함을 믿음으로 인정 받는다 하더라도 내면적인 성화(수련)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다.


한국교회는 내면적 성화가 안 보이고, 교묘하게 은폐된 공로신앙이 지배하고 있다. 큰 교회당을 많이 짓고,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교인수를 불리는 그런 ‘행위’를 함으로서 복 받는다는 식이다. 그런 시도를 중단하라는 것이 종교개혁들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말은 은총을 강조하지만 공로와 행위를 통해 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불신앙적인 태도가 영성을 대신해버렸다. 한국교회 초창기엔 있었지만 지금은 칼뱅의 영성이 없다.


이정배 “(한국교회엔) 성직자 예언자 선포자 등으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있는데, 수행은 없다. 종교개혁이 칭의, 즉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쪽으로 너무 갔기에 그에 대한 반기로 경건주의가 나왔다. 감리교의 요한 웨슬리라는 신학자는 ‘중생(거듭남)이 되어야만 한다. 그게 진짜다. 의롭게 되었다는 믿음만 가지는 것은 가짜다’고 했다.


그렇게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감리교가 나왔다. 사람은 살아 생전에 성화되어야 한다. 그런 말을 했다. 우리식으로 하면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의식 차원에서만 구원인데, 우리의 무의식 차원까지 구원되지 않으면 요원하다. 작게는 우리의 무의식이 치유되어야 한다. 더 크게는 개체와 전체가 분리된 게 아니기에,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므로 거시적인 차원의 구원도 얘기하고, 내 안의 더 큰 나의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 안의 구원관은 너무 협소하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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