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니체철학] 강의 중 - "신의 죽음과 진리"

진성조 | 2011.04.24 22:39 | 조회 8588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 아트걸
원문 http://blog.naver.com/artnstudy/110010085359

제 4 강 신의 죽음과 진리

◆ 신의 죽음을 통한 진리의 접근

※ 학습목표

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통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를 알아본다.


▲ 우리는 신의 죽음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행동을 부여하는 자에게 달려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신을 죽였는데 위대한 일이 아닌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행동에 대한 진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가 강자이다.

성직자들은 신의 죽음을 활용해서 권력을 장악한다. 신의 비극적 죽음을 그들은 강조한다. 그래서 부활, 죽음 등을 잘 이용해먹는다.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사람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그들의 키다.
니체는 그들이 돌팔이 의사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시달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너무 잘나가면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죄의식을 심어주는 기술은 아주 놀라운 기술이다. 니체는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은 똑같은 기술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 국가 덕택에 있다는 생각을 심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들에게 채무 의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국가 유지자들이 하는 역할들이다.

▲성직자들에게 필요했던 신의 죽음

성직자들에게 신을 죽을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예수의 삶을 주목해야하는데 그의 죽음에 주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왜 죽었는지 무엇 때문에 누가 죽였는지에만 관심이 많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행동을 했냐는 것보다 앞서서 심판 개념을 앞세운다.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럴 때 부정적인 용법이 된다.

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 이들에게만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말에 의하면 그 의미를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방황하고 있다.

신의 죽음은 와 있으나 이미 부정적인 용법으로 확산 양산 조작되고 있다.
신의 죽음은 와 있으나 이해되지 않고 있고, 행위를 한자가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조금 구별되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진리를 알기에 앞서서 알아야 할 힘의 논리

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사실은 없다. 신의 죽음은 누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니체는 진리 자체보다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것을 알아야 진리의 권력게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어떤 추장이 힘을 가졌을 때, 그가 하는 말들은 진리로 불린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을 알아야 한다. 힘의 논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많은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박 불가능한 것이요, 진리가 아니라 반박할 수 없음이라는 것을 드러낼 때가 많다. 이때 우리의 무능력이 증명된다.
신의 죽음이 무엇일까에 대해 나의 해석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나의 권력이 되는 것이고 나의 니체가 되는 것이다.

신의 죽음은 위버 멘시가 살아야한다는 짜라투스투라의 선언과 통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신을 죽이는 것, 위대한 자가 살게 하는 것이 위버 멘시다. 이럴 때 신의 죽음이 훌륭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인간이 신을 죽였다.

<반 그리스도> 책을 놓고 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왜 신은 죽었는가?
첫째,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이라는 책을 보면 이 세계를 구원하러 온 자를 이 세계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렸다고 봤다. 이 세계가 얼마나 악으로 가득한 세계인지, 신의 죽음 하나만으로도 세계는 평가절하 할만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폐해

인간은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기 보다는 아무 것도 없는 무라도 의지하려고 한다. 이것이 권력에 대한 폐해이다. 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화된 것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동조자를 구하려는 의지이다. 무는 없지만 무를 어떻게 하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래서 세상은 참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사람들은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세상이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헛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없을 때조차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 무신론이라도 섬기려고 한다.


* 참고자료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

▲ 니체가 바라본 신의 죽음들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는 정치적인 운동 같지만 종교적운동이고 종교개혁은 종교적 운동 같지만 정치적 운동이다. 신이 등장하고 숭배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작동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신앙은 뿌리 깊다. 신앙은 우리에게 존재 자체인지도 모른다.

자기들 때문에 신이 죽었는데 그것도 모르는 게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신을 숭배하는 태도 속에는 원한과 분노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무한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기술이 아니다. 힘들고 더러운 세상을 위해서 신은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신은 죽음은 그것을 보여준 셈이다. 신은 이 세계가 썩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신은 죽어서 더 업 그레이드 되어 출현하기 위해 죽었다.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의 신이었는데 세계 모두의 신이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다.

<도덕의 계보>를 보면 이스라엘의 적대자이자 해체자인 구세주로써 예수를 말한다.
예수는 사실 유대인들 해체하는 것, 이스라엘에 반기를 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신은 세계의 신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세계 전체에 대한 복수의 도구를 십자가에서 찾았던 것이 아닌가.
세계는 바보처럼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결국 그 신을 보편화 시켜 버렸다.


▲ 신의 죽음을 통한 보편의 신


강자는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반대로 노예는 우린 다 똑같다고 말한다.
강자는 모든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인간과 신의 거리, 그 사이를 무화시킬 정도로 긴 거리를 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신을 만들었다.
유대인들만의 신이 아닌, 신의 죽음은 더 신을 키우는 효과를 가지고 왔다.
야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편의 신이 될 수 있었다. 그 신의 죽음을 통해서 보편의 신이 될 수 있었다.


▲ 그리스도 죽음에 대한 오독을 지적

예전의 신은 민족의 신이었다. 민족과 그 민족의 신은 전쟁 나갈 때도 함께 나가고 정벌할 때도 같이 나가고 위대한 사회동포주의자 신이었다.
예전의 유대인들은 자기 신을 자기와 분리하는 전략도 택했다. 그가 나를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신은 인간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죽어야 했다는 면이 있다. 이 안에는 성직자들의 놀라운 테크닉이 담겨있다. 니체는 그래서 바울의 천재적 해석에 놀라워하면서 비난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그의 행적을 독점할 수 있었는가. 이것이 바울의 놀라운 점이다.

예수는 복음을 가지고 왔다. 좋은 뉴스를 가지고 찾아왔다. 너희는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들고서 말이다. 그런데 사도들 예수의 사도들은 복음 앞에 다른 무엇을 더 넣어버렸다. 화를 부르는 베드 뉴스이다. 묵시적인 이 사이에 끼여 들어가 다른 것을 넣어버렸다.
해석을 바꾸기 시작했다. 예수의 말, 행동을 축소한다.

예수가 던진 죽음에 대한 메시지가 컸어야 했다. 그런데 결국 위험한 질문이 던져지고 말았다.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 여기서 던져지고 만다. 바로 누가 죽였냐는 것이다.
이 질문이 던져지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질문이 되어버린다.


▲ 삶을 강조한 그리스도를 왜곡함


밖으로 표출되어 나가야 할 것이 안으로 박힐 때 느끼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어쨌든 이 의문부호 하나로 인류 최대의 심판대가 마련되었다.
법정은 최후의 날에 올 것이다. 신이 재림을 해서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다 죄인이 되었다. 회개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것이다.

보아라, 이게 무슨 복음인가 말이다. 형벌이 아주 끔찍하지 않느냐?
사실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인물이다. 성경에 지독하게 심취했던 인물이었다. 니체는 별명도 목사였다. 니체가 기독교를 그냥 비판하는 게 아니다. 모르고 하는 비판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정말 중요한데 이것들이 왜 공포를 조장하면서 묵시록 형태로 전해지는 바에 니체는 분개했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것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보여줬지 어떻게 죽었는가를 보여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사랑은 조건이나 수단이 아닌 그 자체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시체가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조건이나 수단이 아닌 사랑 자체가 되라고 말한 것이다.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내가 바로 천국이라고 느낄 만큼 좋은 일을 했을 때 느끼는 것이다.

마테복음 5장 46절을 보면 ‘ 너희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는가. 너희가 형제에게만 친절하다면 남보다 뭐가 나을 게 있겠는가.’

그것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것은 보상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구나.’
예수가 가르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보상이란 그것을 잘했다고 주는 게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다른 이를 비난했을 때 비난 그 자체가 벌이라는 것이다.
행동 자체로 천국을 보라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심판대를 만들어 놓고 누가 죽였냐고 묻는다.

신은 누가 죽인건가. 성직자들의 신의 죽음은 이런 해석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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