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신종 코로나 ‘이머징 바이러스’는 자연 아닌 문명의 위협”

환단스토리 | 2020.02.12 14:56 | 조회 5000

문화일보 2020년 02월 05일

 

 

■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내 사상의 핵심은 서구의 이항대립을 아시아의 삼항순환으로 모든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었다”며 “우리도 이제 진영 논리를 벗고 정보화 시대 다음에 올 생명화 시대, 인공지능(AI) 다음에 올 직관력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대비하자”고 강조했다. 신창섭 기자



채집시절에는 없었던 재앙들, 동물 사육 시작하면서 禍 자초해
한번도 경험 못했던 일 급부상…권력·재력·국력도 그앞에선 무력

20세기 부국강병의 시대 지나 21세기 개인 생명력 의존의 시대
‘정보화 시대’ 지나고 나면 ‘생명화 시대’ 도래할 것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기 전에 생각이 많았다. 우선 병중인 어른에게 인터뷰를 제안한 자체가 부담이었다. 또 그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터뷰를 했으며, 얼마나 많고 다양한 책과 비평, 신문·잡지의 논설과 칼럼을 썼던가. 물론 그의 ‘창조 강박증’은 끊임없이 새로운 얘기를 만들어 냈다. 미디어는 인문, 예술, ‘디지로그’를 넘어 인공지능의 미래까지 그를 찾아 물으려 했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 사통팔달의 르네상스적 지식인이 가고 나면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이 있을까….

지난달 31일 평창동 댁으로 찾아뵀다. 조금 수척해졌어도 밝은 눈빛과 목소리, 또렷한 논리와 다변을 만나니 반가웠고 첫 번째 부담은 조금 덜었다.

―올해가 88세의 미수(米壽)이신데, 8의 숫자와는 인연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88 서울올림픽’ ‘8020이어령 학당’ ‘80초 메시지’ 모두가 그렇습니다.

“8자를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의 기호나 뫼비우스의 띠 모양이 되지요. 한자의 팔(八)자는 부채모양으로 열려 있어서 끝으로 갈수록 발전하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八’은 발전한다의 발(發)과 음이 비슷해서 중국에서는 8자가 붙은 전화번호나 자동차 번호판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네요. 그런 팔자가 쌍으로 겹쳐 있는 것이 88, 한자로 쌀미(米)자를 뜯어보면 ‘八十八’이 되니까 미수라고 잔치를 벌여요. 그러나 나에게는 무를 의미하는 ‘0’의 네 개로 보여요. ‘헛되고 헛되니 또한 헛되도다’, 성경 말씀에도 허(虛)자가 세 번밖에 없는데, 허허.”

―숫자 하나를 놓고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시는 그 상상력과 통찰력이 지금 가장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헛되고 헛되다’니요. 연초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던진 화두만 해도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또 한 손에 호미를 든 채집시대의 유산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한국인들이 앞으로 100년, 생명화 시대를 이끈다’고 ‘채집 문명론’을 펴시지 않았습니까.

“덕담을 잘못했나 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으로 온 국민이 설 기분을 잃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채집시대와 이 바이러스 감염증은 무관한 게 아니죠. 원래 나물 캐고 열매 따 먹고 살던 시절에는 이런 재앙이 없었지요. 하지만 동물을 가축화해 사육하기 시작한 농업문명에 들어서면서 동물을 숙주로 한 세균과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아 엄청난 재앙을 일으킨 것이지요. 내 말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한 말입니다. 인류가 1만 년 전 농업혁명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요.”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니 에볼라니 하는 이상한 신종 병이 발생해 비(非)문명적 병인 줄 알았는데 상식과는 정반대군요.

“오늘의 질병은 대부분이 문명에서 온 병이지요. 맨발로 다니는 마사이 족에게는 디스크 같은 병은 없잖아요. 이번 우한 폐렴은 자연의 위협이 아니라 문명의 위협, 인재인 겁니다. 우리가 겪었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인플루엔자(AI),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같은 것을 통틀어 이머징 바이러스(emerging virus)라고 합니다. ‘이머징’이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 갑자기 부상하는 현상을 일컫는 관형사지요. 그러니 그런 미증유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로 한 개인, 그 나라와 민족의 사활이 걸려 있는 것이지요.”

―기억납니다. 이머징 바이러스의 문제는 의료나 역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 문명론의 문제라고 하신 말씀을. 그게 메르스 사태였지요.

“맞습니다. 중동에서 몰아닥친 메르스 사태로 낙타를 타본 적도 없는 우리가 혼쭐을 빼앗겼죠. 그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 아닙니까. 2012년 유럽질병통제센터(ECDC)가 메르스 감염실태를 그린 세계 지도를 보면 그 발생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환자 수 세 자리에 사망자 수 두 자리는 한국밖에 없어요. 진원지에 바로 등을 붙이고 있는 쿠웨이트, 예멘도 두세 명이고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유독 한국만이 환자 수 185명에 사망자 36명의 부끄럽고 슬픈 기록을 남겼어요. ‘어째 이런 일이’라고 말할 땐 이미 늦은 거지요.”

―그 같은 데자뷔 현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20세기를 적혈구의 시대라고 하면 21세기는 백혈구의 시대라고 합니다. 에너지는 적혈구가 만들어 냅니다. 국가로 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이지요.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체 면역력으로 생명을 지켜가는 면역력은 백혈구가 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에볼라 바이러스 완치 간호사를 포옹하는 사진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바이러스 앞에서는 정치권력도 경제력도 국력도 무력합니다. 개인의 몸 안에 있는 면역력, 그 생명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정보화 시대 다음에는 생명화 시대가 온다는 것을 강조해 온 것이지요.”

그는 “병중이지만, 이번 달에 나올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파람북)의 첫 권을 10년 만에 발간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라며 “글 쓰는 일이 새삼스럽게 귀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무력해 보일 때 특히 그런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기자는 한국 현대문예사와 뗄 수 없는 그의 삶과 문학, 사상의 주요한 단락들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근래에 달라지고 있지만, 어느 부분 공백처럼 배제된 이어령의 문학사적, 사상적 위치지움을 당신의 입을 통해 정리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는 “멋쩍다. 새로운 거로 하자”고 선수를 쳤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나의 책이었다’는 말씀을 책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3세 이전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3세 이전은 어머니에게 들은 거지요. 또 어머니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기억해 들려줍니다. 그 첫 이야기가 돌잡이에서 붓과 천자문을 잡았다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만석꾼이 되고 권력자가 되길 바라 돈과 법봉을 잡았다고 전했다면, 내가 문학가가 됐을까요? 부모는 자식이 판단력이 없을 때 가치관에 영향을 줍니다. 내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내 옆에서 꼭 책을 읽으셨고, 문자를 몰라도 많은 책이 머릿속에 박혔어요. 그런 어머니를 통한 책의 기억이 나중에 귀환해 나의 책이 됐어요. 어머니는 나의 책이었다는 건 말 그대로예요.”

―일제강점기인 소학교 시절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책을 보셨을 텐데, 나중에는 일본어책을 여럿 내셨습니다.

“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고단샤(講談社)에서 나왔어요.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내 책을 찍습니다. ‘가위바위보 문명론’은 신초샤(新潮社)에서 나왔지요. 신초샤 세계문학전집을 소학교 5학년 해방될 때까지 1권부터 36권까지 다 읽었어요. 다 읽어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결국 식민지 시절 읽은 책을 냈던 출판사의 저자가 됐어요. 내 책이 일본 시험문제에도 나오기 때문에 거의 매년 저작권 때문에 연락이 옵니다.

 

▲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달 31일 ‘현대사 70년, 미래 30년’이 꽂혀 있다는 서울 평창동 자택의 ‘백년 서재’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한쪽에 서면 편하지만… 지식인은 귀양살이하듯 혼자 생각해야”

非체제 회색지대는 창조 공간
親체제·反체제의 그림자
온전하게 볼 수 있게 돼
혼자 있는 특권 사치스러운 고통

중국과 일본만의 아시아 아닌
한·중·일 삼항순환으로 바꿔야
세 발로 서면 엄청난 힘 갖게돼
중·일 사이 ‘강력한 새우’ 돼야

6·25때 전사한 또래 있는데
난 대학서 공부 했으니 죄인
‘오늘이 사는 마지막 날이다’
매일매일을 절실하게 살아

1988년 서울올림픽 연출하고
한예종·국어연구소도 만들어
나랏돈으로 온갖 상상력 발휘
큰 호사 누려… 난 고급 기생충


그게 바로 극일(克日)입니다. 당시 내지(內地)로 불렀던 일본이 한없이 크고 우리를 압도하는 나라로 생각했는데, 그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렸어요. 식민지 교육을 받았지만, 사실 일본이 흡수한 서구문화를 배운 겁니다. 프랑스, 러시아 등의 문학을 그때부터 많이 읽었어요.”

―선생님을 ‘세계 제일의 일본 전문가’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근래 경색된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말씀을 주십시오.

“중국과 일본은 저들만의 아시아였어요. 우리의 반도를 무시하고 대륙이냐, 해양이냐를 묻고 선택을 강요했어요. 임진왜란 때부터 대륙이냐, 해양이냐의 선택 때문에 우리 국토가 저들의 전쟁터가 되는 분하고 억울한 일들을 당했어요. 그래서 한·중·일 비교문화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지만, 이항대립을 삼항순환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미 경제적으로는 그런 순환이 시작됐지요. 한·중·일이 세 발로 선다면,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거꾸로 엄청난 힘을 갖게 됩니다. 대륙과 섬 사이에 우리가 중국 편이면서 일본 편이고 두 나라의 편이 되면, 둘 사이에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쥐게 됩니다. 과거처럼 중국과 일본의 아시아로 가면 안 됩니다. 아시아란 말을 쓰지 말고 잠꼬대라도 한·중·일이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슈퍼 슈림프’(Super Shrimp), 강력한 새우가 돼야 합니다. 또 우리 힘만으로 안 됩니다. 해양 세력(Sea Power)의 미국, 대륙 세력(Land Power) 중·러 양쪽에 한반도 통일이 이롭다는 인식을 줄 때 그때 통일이 되고, 우리는 만주까지 가는 겁니다.”

―6·25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서울대 문리대(1952∼1955)를 다녔습니다. 대학의 틀도 무너졌을 시기인데, 당시 어땠습니까.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전시학생증을 받은 덕분에 우리는 살아서 전후를 이끈 지성이 될 수 있었어요. 전사한 또래들로 인해 공부했으니 우리는 죄인입니다. 말은 안 했지만, 항상 오늘이 내가 사는 마지막 날이다, 그렇게 절실하게 살았어요. 책 하나를 읽어도 사형수가 하늘을 보듯이. 우리는 ‘제로(Zero)세대’였어요. 요즘 ‘N포 세대’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 젊은이들이 힘겨운 걸 모르지 않지만, 당시에는 포기할 것조차도 없었지요. 그래도 희랍인들이 우주나 철학의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의 기쁨, ‘타우마제인’(thaumazein)의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건 최고였습니다. 지적 허영과 오만도 대단했습니다. 내가 편집장으로 있던 문리대학보는 외국어 원문을 그대로 실었어요. 대학생은 그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때 분위기는 일본을 통해서 서양을 배운 우리가 이제는 직접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문리대학보에 반영됐고, 일반 지식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지적 허영과 오만이 이후 당대 인문학의 중심인 문학에서의 탈(脫)식민지성, 탈우상, 탈권력으로 치닫는 에너지로 전환되는 게 아닐지요. 문리대학보에 실은 첫 평론 ‘이상론’(李箱論)과 졸업과 함께 한국일보에 게재한 ‘우상의 파괴’는 선생님의 문학적·사상적 단초가 아닐지요.

“이상은 외국문학에도 없는 시인이고 작가였어요. 난해하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다, 미친 짓이다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너무 감동해서 당시 ‘어느 문학 진영’도 감싸지 않은 작가인 그를 옹호하려 이상론을 썼어요. 이어서 당시 4쪽짜리 신문에 한쪽이나 실린 ‘우상의 파괴’가 나간 뒤 기성 문단을 부정하고 파괴해 유명해지려 한다고 나를 오해했지만, 파괴가 아니라 이상을 끌어내 창조한 게 먼저였어요.”

‘우상의 파괴’는 평론이라기보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우리 사회에 ‘세대교체’ ‘청년문화’ 등의 세대론이 등장했다. 그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명해졌다’고 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치권력과 궤를 같이한 김동리 등 이른바 ‘문인협회 정통파’와 벌인 ‘순수-참여문학’ 논쟁은 1950년대에 가장 큰 문화 이슈였습니다.

“순수문학이라고 내거는 사람들이 더 정치적인 시절이었잖아요. 기성 문단도 ‘도강파’다, ‘잔류파’다 갈려 있던 때였으니 문인들도 적 아니면 아군이었어요. 나는 20대로 젊었으니까, 친일할 수도 없었고 부역할 수도 없었으니까, 유일하게 청정구역에서 태어났으니까 자유로웠지요. 20대 철없는 사람이 당시 터부시됐던 우상 파괴니 혁명이니 하며 터트렸기 때문에 문학적 언술이라기보다 폭발하는 뇌관 역할을 한 거지요.”

1960년대 초반 ‘편집자’로서의 이어령의 역할에 주목하기도 한다. 1960년대 ‘세계전후문학전집’의 발간이 4·19혁명의 상징적 결과물이 아닌 4·19혁명 정신을 가능케 했던 지적·감성적 토대 중 하나였다는 시간을 거스르는 평가도 있다. 이어령은 시사잡지 ‘새벽’의 최연소 편집위원으로 최인훈의 ‘광장’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다. ‘새벽’과 ‘전후 문학작품’들은 전위적 독서주체·저항적 청년주체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4·19혁명으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됐을 때 당시 신구문화사 사장에게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전후문학전집을 내자고 했어요. 당대 한국의 정치적 혁명 속에서 자라난 세대들이 세계의 지성을 빨아들일 수 있는 흡인지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어 한국전후문제작품집을 펴냈어요. 그 당시에 신민당 집권 세력 중에서 ‘새벽’을 운영했고, 김재순 당시 국회의원이 주간을 맡다가 내게 편집권을 줬어요. 시사잡지에 무턱대고 소설 ‘광장’을 싣기는 어려웠을 수 있었어요. 그 전에 내가 정치 이슈만 넣어봐야 ‘사상계’도 있어 주목을 못 받으니 과감하게 소설을 싣자고 했어요. 그래서 잡지의 3분의 1에 파격적으로 폴란드의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등 해외 화제작들을 실어 처음으로 무크지처럼 만들었어요. ‘광장’을 실을 수 있는 바탕을 깔았지요. 그래서 내가 일생 중에서 내 문학이 아니고 문단에 한 게 뭐냐고 물으면 나는 ‘전후문제작품집’ ‘새벽’ ‘문학사상’ 세 가지로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고 꼽지요.”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논쟁도 이어령과 김수영의 이른바 ‘불온시’ 논쟁이었다. 1950년대 ‘순수에의 반역’과 ‘사회참여’를 강조하던 이어령은 1967년 김수영과의 논쟁에서 오히려 ‘역사’ 또는 ‘참여’가 결여된 문학을 대표하는 것처럼 됐다. 리얼리즘 논쟁으로도 불렸던 당시 논쟁을 다시 살펴보면, 순수와 참여의 진영 구도로 애써 끌고 간 인상이 없지 않다.

“순수-참여 논쟁이 아니었지요. 순수문학을 대변한 적이 없고, 되레 참여문학이란 무엇인가, 너희가 사회참여를 제대로 하는가를 물었을 뿐이에요. 드러내 말은 안 했지만, 학생들의 피로 이승만이 물러나니 동물원의 사자 사냥하듯 뒤늦게 나서는 게 참여인가, 문학에 이념의 색깔을 칠하고 나오는 게 참여인가를 묻는 거예요. 나는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순수문학이란 문화권력과 맞섰어요. 1967년 서슬이 퍼렇던 군부독재 때 남정현 작가의 반공법 위반(‘분지사건’) 공판에 법정 증인으로 나서서 변호했던 게 나였어요. 내가 말한 것은, 리얼리즘이 최소한의 현실성에 바탕을 두어야지, 현실성을 구현한다고 문학이 신문기사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문학의 근본인 미적 자율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다시 제기했고, 이념에 갇힌 당시 리얼리즘 방법론의 상상력 부족을 비판했던 거예요. 어느 시대든 어려워지면 문학을 도구로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추워서 얼어 죽을 정도면, 거문고를 뻐개서 장작으로 쓸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거문고를 장작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독재시대에 저항한 것은 평가받아야 하지만, 문학은 영원한 야당이 돼야 합니다. 천사의 마지막 얼굴도 벗길 수 있는 건 작가밖에 없습니다.”

상상력이 부족한 리얼리즘에 대한 이어령의 비판은 여태껏 유효하지 않을까. 1960년대 이후 문학은 민족문학론과 ‘그 외’의 문학론으로 갈리면서 이어령의 비평은 전후 비평을 대표하는 선상에서 밀려 그 문학적 위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선생님이 문단 패거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 이화여대 은퇴 강연에서 스스로 ‘비(非)체제로 살았다’고 돌아보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영 대립이 기승입니다.

“문학은 언어이고, 문학이 지시하는 손가락은 아닌 거지요. 내가 기호학과 구조주의를 공부하고 가르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친(親)체제? 반(反)체제? 나는 비체제였어요. ‘안티’(anti)가 아닌 비체제. 아무도 내 편이 없었고 또 편을 만들지 않았던 걸 외로움이나 슬픔이 아닌 자랑으로 알았어요. 진영 논리에서 지식인은 필요 없어요. 그러면 편하지. 어느 한쪽에 서면 되니까. 그러니 줄을 서지 말라고 해왔어요. 글 쓰는 사람들은 끝없는 오해 속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귀양살이하는 거와 같아요. 그렇게 안 하면 지식인의 역할은 없어요. 고통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기 힘든 세상이에요. 인간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있을 수 있다는 특권은 고통과 함께 주어진 겁니다. 굉장히 사치스러운 고통이지요.”

―이후 “비체제의 회색지대야말로 창조의 공간”이라고 말한 것처럼, 줄곧 통념을 부수는 상상력과 창조, 미래의 기술 담론과 화두를 던지는 ‘지(知)의 최전선’에 몰두해오셨습니다.

“우리 몸의 미토콘드리아도 다른 세포가 들어와 공생하는 거지요. 늑대와 토끼도 어느 한쪽만 성하면 결국 공멸하기 때문에 공생의 원리대로 맞춰갑니다. 자연도 인간도 산술적, 상식적 계산만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직관, 통념을 부수는 상상력, 무한대와 무한소 사이에 서 있는 실존을 느끼지 않고는 다 그림자요, 허망한 겁니다. 비체제라는 것은 친체제, 반체제에서 도망가라는 게 아니에요. 비체제를 해야 둘의 그림자까지 온전하게 보인다는 의미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양쪽에서 다 비난받지요.”

그는 “내 사상의 핵심은 서구의 이항대립을 아시아의 삼항순환으로 모든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노를 젓거나 힘을 줄 때 서양은 ‘어기차’라고 힘을 주고 빼기만 하지만, 동양은 ‘어기여차’로 ‘어기’와 ‘차’ 사이에 한 템포 쉬는 ‘여’가 들어갑니다. 결국 삼항순환이 오래가고 이기는 겁니다. 이항대립에서는 서양이 앞섰지만. 앞으로 인공지능(AI)이 다 해주는 시대가 올 텐데, 그다음엔 직관력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올 거예요. 어느 진영이 됐든, 이걸 명심해야 해요. 한가로운 말이 아니고 이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생을 돌아보시고 평가하신다면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알만할 때 죽는다는 게 맞아요. 피카소도 죽기 전에야 그림이 뭔지 알게 됐다고 했지요. 나는 전쟁 때 끼니가 없었어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화석이 됐어요. 살아서 서울올림픽 개·폐회식도 연출하고, 새천년준비위원회를 맡아 밀레니엄 베이비 탄생도 전 세계로 중계해보고,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드론쇼도 해봤어요. 박정희 때도 국립대학 아니면 못한다고 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도, 국어연구소도 만들었어요. 나라를 위해 그런 일을 한 게 아니라, 내 돈으로 그런 퍼포먼스를 못하니까, 나랏돈으로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며 가장 사치스러운 게임을 한 번 해본 거예요. 난 큰 호사를 누렸습니다. 예술이 이렇게 좋은 겁니다. 요새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나는 기생충이라도 고급 기생충이었어요. 허허.”

인터뷰=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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