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화교류에 큰 기여를 한 마테오리치

대한의혼 | 2010.03.31 14:32 | 조회 8884

마테오리치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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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이마두(마테오 리치)는 천문성상(天文星象)과 산수역법(算數曆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다. 그 근본을 연구하고 증거를 밝혀 억지스러운 말이 없으니 천고에 기이한 재주다. 그는 자기의 학문을 중국에 전했다. 그가 죽은 후 그 나라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와서 동서남북 네 천주당에 살고 있는데, 서천주당이 가장 유명하다.’ (1765년 베이징을 다녀 온 조선의 홍대용의 기록 중에서)

중국 선교를 위한 준비와 정착, 마테오 리치에서 이마두(利瑪竇)로

 

1552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중국 선교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광둥성 앞 바다 상촨도(上川島)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6일 이탈리아 중부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다. 리치는 고향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하고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571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이듬해부터 1577년까지 예수회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리치는 철학과 신학은 물론, 그레고리력 제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신부에게 수학, 천문학, 역법, 시계, 지구의, 천체관측기구 제작법도 배웠다.

리치는 1577년 로마를 떠나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 머물다가 이듬해 3월 루제리 등 13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여 9월 인도 서부 고아에 도착했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했고 1583년 9월 10일부터 루제리와 함께 광둥 중부 자오칭(肇慶)에 머물기 시작하여 중국 본토 선교의 첫 발을 내딛었다. 자오칭에 머문 6년간 리치는 중국어, 한문, 중국 문화와 풍속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


 

 

그러는 사이 루제리와 함께 포르투갈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루제리가 번역한 십계명 중국어판 [조전천주십계](祖傳天主十戒)를 인쇄했으며, 광둥과 광시를 총괄하는 총독 왕반(王泮)의 요청에 응해 세계지도인 ‘여지산해전도’(與地山海全圖)를 제작했다. (‘산해여지전도’는 1600년) 그러나 1589년 자오칭에서 추방당해 북쪽의 샤오저우(韶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리치는 리치의 첫 발음과 마테오를 음역하여 리마더우, 즉 이마두(利瑪竇)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황제의 후대 속에 선교와 저술 활동을 펼쳐

 

리치는 1595년, 마카오 도착 13년 만에 중국 내륙 북쪽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1598년 9월 8일 처음으로 베이징에 들어갔지만 거주 허가를 얻지 못했고, 1601년 1월 다시 베이징에 입성했다. 만력제가 자명종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 계기였다. 드디어 1601년 5월 거주 허가를 받고 거처와 식량과 생활비를 제공받게 되었다.

자명종을 비롯한 진상품이 만력제의 마음에 꼭 들었고 만력제와 고관들이 리치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인정하여 ‘서양에서 온 선비’로 여겼으며, 과학기술 전문가로서의 활용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리치는 황제의 후대 속에 베이징에서 점차 세례교인을 늘려나갔다. 1580년대 중반 20여 명 정도였던 중국의 가톨릭 신자는 1605년경 1천여 명에 이르렀다(리치 사후인 1636년경에 4만 명, 1644년에는 15만 명에 가까워졌다).

리치는 1595년 우정에 관한 에세이이자 격언집인 [교우론]을 펴냈고,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하는 [서국기법](1596)도 펴냈다. 베이징에서 [천주실의](1603), 고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잠언집 편역서 [이십오언](1605), 유클리드 번역서 [기하원본](1607), 인생, 죽음, 양심 등 다양한 주제에 가톨릭 교리와 엮어가며 쓴 [기인(畸人)십편](1608) 등을 펴냈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1602)를 제작했다. [교우론]과 [기인십편]은 제법 큰 인기를 모았다. 그밖에도 한자의 알파벳 표기법을 시도한 [서자기적], 이지조가 필록한 서양 산술 도서 번역서 [동문산지]와 천문학 도서 [혼개통헌도설], 서광계가 필록한 측량술 도서 [측량법의] 등이 있다.

 

마테오 리치가 교유(交遊)한 중국인들

 

리치가 처음으로 깊이 사귄 중국인은 1589년에 만난 구태소(瞿太素)였다. 구태소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적 호기심이 강한 명문가 자제였다. 그는 연금술을 배우려고 리치를 찾아왔지만 리치에게서 서양식 계산법, 기하학, 측량술, 시계와 천문기구 제작법 등을 배웠다. 그는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매료되어 늘 리치를 칭송했고, 이것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리치의 평판이 높아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치는 예부시랑 섭향고(葉向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리치와 그의 후배 선교사들을 적극 도왔다. 리치는 기성 유교 질서에 반항한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와도 만났다. 이탁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명석하고 온화하다. 많은 사람들과 토론을 해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늘 초연한 태도를 지키며 토론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단연 인상적인 인물이다.”

리치와 가장 친밀했던 인물은 세례교인이기도 한 관리 서광계(徐光啓)와 이지조(李之藻)였다. 이지조는 선교사들의 구술을 필사하고 많은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다. 그는 특히 가톨릭 선교사들의 한문 저작을 모은 [천학초함]을 편찬했다. 서광계는 리치에게 천문, 역법, 지리, 수학, 수리(水利) 등을 배우고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 기하학 번역서 [기하원본]을 펴냈다. ‘기하학’이라는 말의 연원이 이 문헌이다. 그는 고향 상하이에 천주교당을 설립했다. 리치는 황족인 건안왕(建安王)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리치를 ‘사부’(師傅)로 칭하며 후대했고, 리치는 그에게 [교우론]을 헌정했다. 리치는 그밖에도 많은 중국인 관료,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그들은 ‘서양에서 온 유사(儒士)’로 리치를 대했다.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마테오 리치에 매료된 이유


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먼 외국에서 온 인물이 중국어와 한문과 중국 문화를 깊이 알고 무엇보다도 유교를 안다는 것 때문이다. 유교 경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그를 ‘유학자’에 가깝게 받아들였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그런 리치는 중국 문화와 유교에 대한 자부심을 충족시켜주는 ‘기특한’ 존재이기도 했다. 둘째, 리치가 놀라운 기억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통해 위치 공간과 이미지를 설정하여 많은 것을 단번에 기억하는 그의 기억술은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셋째, 리치가 전한 서양의 과학기술 때문이다. 천문학, 역법, 수학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리치가 구사하는 논증과 논리의 섬세함과 엄밀함에 많은 중국인들이 감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리치의 성품과 태도였다. “대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존경하여 그와 교제하였다.” ([명사](明史) 326권 중에서) “그는 행동거지에 늘 다정함과 온화함이 넘치며 누구에게도 늘 친절하다.” (예수회 동료의 말) 선교를 위한 인내심,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력과 개방성, 다방면에 걸친 학식에서 우러나오는 교양,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성품 등이 그를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테오 리치가 아닌 이마두로 만들어 주었다.

마테오 리치의 선교 전략,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킨다”


마테오 리치는 처음에 불교 승려 복장을 했으나 불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사회 지배층인 유교 지식인, 관료 계층에 접근하기 위해 유사(儒士)의 복장을 갖췄다. 중국에서 선교하려면 유교와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융화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 논리를 펼쳤지만, 유교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리와의 유사성 및 일치점을 찾고자 했다. 리치는 ‘가톨릭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내비치는 것도 삼갔다.

그는 1594년 사서(四書) 라틴어 번역을 마치고 나서야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간행) 집필에 본격 착수했다. [천주실의]는 루제리가 1584년 자오칭에서 펴낸 [천주실록] 개정판에 가깝다. 리치가 루제리의 [천주실록] 집필 작업을 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리치는 [천주실록]의 불교 위주 내용을 [천주실의]에서 유교 위주로 바꾸었다. 조선의 천주교회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는 가톨릭 교리 및 중세철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비교 고찰함으로써 동서 사상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자리 잡았다.

리치는 하느님, 즉 천주를 유교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리치의 이런 방식은 풍응경(馮應京)이 쓴 [천주실의] 서문에 나오는 대로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키는’(以中化中) 방식, 즉 유교와 가톨릭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여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리치는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도 용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리치의 사후, 리치의 방식을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이른바 전례(典禮)문제가 일어났다. 예수회보다 뒤늦게 중국 선교에 나선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를 비난했고, 오랜 논쟁과 갈등 끝에 청나라 건륭제 시대인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반포한 교서에 따라 예수회의 방식이 최종 금지되었다. 그러나 1939년부터 교황청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 전례에 교인이 참여하는 것을 용인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때 세계 각지의 전통 의례를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베이징에 묻힌 마테오 리치, ‘성인!, 진정한 성인!’


과로 탓에 극도로 병약해진 마테오 리치는 1610년 5월 11일 저녁 7시경 베이징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 예배당에 안치됐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곁에 있던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선교사들이 상소를 올리자 만력제는 부성문(阜城門) 밖 샨란에 묘지를 조성하도록 했고, 이듬해 11월 리치의 유해는 샨란 묘지에 안장됐다. 오늘날 베이징 지하철 처공좡(車公庄)역에서 서쪽으로 처공좡대가를 따라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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