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려야 할 선진국의 모습

대선 | 2024.03.04 05:52 | 조회 357

                  

                                 한국이 그려야 할 선진국의 모습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겨울의 끝자락이던 2월 말, 두 뉴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세계 최저 출산율 한국, 다시 최저 기록을 경신하다.” 또 하나는 “일본 쿠슈의 구마모토에 대만의 세계 최고 파운드리 TSMC가 공장을 완공했다.”

소재 부품 강국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데 만족하던 일본은 왜 엄청난 보조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TSMC의 제조 공장을 유치했을까. 제조업 기반을 확보해야만 본격화하는 미·중 신(新)냉전 시대에 국가 안보가 강화된다는 전략적 인식 때문이다. 구마모토의 TSMC 공장은 곧 두 번째 공장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호전적인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경제안보를 지켜야 하는 대만은 TSMC의 일본·미국·유럽 등 가치공유국가로 투자 확대를 독려하고 있다. 경쟁상대인 TSMC가 이럴진대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어떠할 것인가. 2년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체제 경쟁은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로 활용해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다. 단기 손실과 비용 상승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

신냉전과 저출산·고령화 가속화
선진국 진입한 한국 사회에 충격

극심한 갈등·분열로 쪼개진 사회
상생 위한 경제 성장은 필수 과제

산업 현장 로봇 투입 1위인 한국
기술 활용해 생산성 상승 꾀해야

신냉전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이라면 저출산 가속화는 오롯이 한국 자신이 만들어 낸 충격이다. 한국의 기록적인 선진국 따라잡기 속도만큼이나 한국의 저출산·고령화 속도도 기록적이다. 현재 인구 5000만 명 시대는 정점을 찍고 하강하면서 50년 뒤 3000만 명 시대로의 추락이 예고돼 있다. 경제성장의 시동을 걸던 1970년대의 인구 규모로 백 년 만에 다시 돌아가는 셈이다.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과거 3000만 명은 연령별 피라미드형 연령 구조였지만, 한국이 다시 마주할 3000만 명은 절반이 노인(65세 이상)인 역피라미드형이 될 것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초고령 사회가 될 전망이다.

                                        인구보너스, 인구오너스로 반전

한국을 지금의 자리로 끌어 올렸던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보너스(bonus)는 사라지고 인구오너스(onus·부담)로 반전되고 있다. 저출산 추세가 본격화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난 20년간 역대 정부의 저출산 극복 정책은 돈만 쏟아붓고 저출산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파격적인 규모의 이민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50년 뒤 대한민국 인구 3000만 시대는 예정된 미래다. 경제활동인구는 급감할 것이다. 제조업 강국의 위상이 위협받고, 생산 활동 세대가 감당해야 할 은퇴 세대의 재정 부담은 급증하면서 세대 간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나라는 누가 지킬 것인가 하는 논쟁도 가열될 것이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세계 역사에 경제 기적의 역사를 쓰면서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 추격과 추월의 시간은 끝나고 이젠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대한민국. 그 앞엔 또 다른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 인구 절벽과 신냉전이 촉발한 글로벌 공급망 분절화에 세계를 무대로 뛰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대한민국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심한 갈등과 분열로 갈기갈기 쪼개져 있다. 사회 통합의 덧셈 정치는 실종되고 상대방 깎아내리기의 뺄셈 정치가 승리의 공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 제조업 강국이자 역동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지만, 지금 미래의 비전은 실종됐다.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엔 선진국 그다음의 미래는 없는 듯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여기가 끝일 수 있다. ‘코리아 피크(Korea Peak)’가 현실화하면, 한국은 ‘한때 선진국이었던 국가’로 기억될 위기로 내몰린다.

                                      아르헨티나·이탈리아·일본 교훈 살펴야

한국은 어떤 선진국이 되려는가. 몇 갈래 길이 앞에 놓여 있다. 첫 번째는 ‘아르헨티나로의 길’이다. 대항해의 시대가 신대륙 개척으로 이어지던 시절, 축복의 땅은 지금의 승자인 북미 대륙이 아닌 남미 대륙이었다. 그중에서도 드넓은 초원과 풍부한 자원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신대륙에서 찾아낸 또 다른 유럽이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였다. 사람이 몰리고 돈이 몰리고 축제는 밤을 잊은 채 벌어졌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것이 정점이었다. 20세기 역사는 아르헨티나의 추락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극도의 경제 혼란,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 정치적 불안정 속에 국가 부도는 일상화됐다. 극도의 포퓰리즘(populism)이 난무하는 속에 경제는 파산하고, 중산층은 붕괴하고, 국가는 분열됐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한때 남부럽지 않던 선진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대상에 가장 자주 오르는 나라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두 번째는 ‘이탈리아로의 길’이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지만, 전쟁의 상처를 딛고 패션·자동차 산업의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한 이탈리아. 그러나 빠른 경제성장에도 성장의 과실은 특정 지역에만 편중됐다. 정치는 부유한 북부 지역과 낙후된 남부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는 데 무기력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구축한 복지 체제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판명 났지만, 누구도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선진 시장경제국가 클럽인 주요 7개국(G7) 국가이지만 주요 기간 시설의 운영을 중국 자본에 넘길 정도로 국가 재정은 취약해졌다. 만연한 부패는 법치 위에 군림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몰려드는 난민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고조되고 있다.

세 번째는 ‘일본으로의 길’이다. 1980년대 미국의 경제 대국 지위를 위협하던 일본. 욱일승천 기세가 세상을 덮을 때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떠돌 만큼 재력을 자랑했다. 미국의 견제가 시작되고 버블이 꺼지면서, 1990년대부터 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성장의 시계가 아예 멈춘 ‘잃어버린 20년’의 긴 겨울로 이어졌다. 세계 역사상 경험하지 못했던 속도의 고령화·저출산은 일본을 인구 절벽으로 몰고 갔다. 나라는 활력을 잃어갔다. 급기야 ‘인구 1억 지키기’를 국가 목표로 내세울 만큼 상황은 다급해졌다.

                                       성장 멈추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아르헨티나로의 길은 소멸의 길이다. 한때 선진국이었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길이다. 이탈리아로의 길은 추락의 길이다. 이탈리아는 위대한 조상이 남겨 둔 역사적 유물 덕분에 추락해도 날개가 있다. 일본으로의 길은 인내와 버팀의 길이다. 참지 못하고 ‘빨리빨리’로 디지털 강국을 만들어 낸 대한민국과는 문화 코드가 다르다.

이념, 계층, 지역, 성별로 나뉘어지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갈등의 단층선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길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극심한 갈등에도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분히 희망적 관측이 운 좋게 맞는다면, 이탈리아로의 길이 예정돼 있다. 둘 다 우울한 미래다.  또 다른 미래는 없을까.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선진국이 된 한국인만큼 이제는 성장이 아닌 성숙 사회로 가야 한다는 논리에 힘을 싣는 사람들이 있다. 잠재성장률이 2% 아래로 내려간 한국에서 성장의 시대는 끝났고 환경 친화, 약자 보호 등 사회 정책적 목표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것인데 절반만 맞는 주장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된 계층·지역의 행복추구권을 더 확대하는 것은 제대로 된 국가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바람직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 재원은 어디서 나오나. 성장이 멈춘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돌변한다. 분배의 정치 소용돌이에 나라가 떠내려간다. 상생하는 공화국을 꿈꾼다면 경제 성장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예정된 미래에서 성장률 하락 추세를 지연시키고 나아가 역전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은 혁신 외는 없다. 대규모의 지속적인 이민 정책도 하락 추세 지연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부족한 국내 노동력을 저개발국의 해외 노동으로 대체하겠다는 발상으로는 가뜩이나 분열된 사회에 단층선을 하나 더 만드는 소탐대실의 패착임을 다른 국가의 사례가 극명히 보여준다.

                                     한국이 부족한 것은 혁신하려는 자세

한국이 가야 할 길은 혁신이 지배하는 ‘캘리포니아로의 길’이다. 혁신의 단초는 한국이 이미 세계적인 혁신 국가라는 현재에서 찾아진다. 한국은 세계에서 산업용 로봇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다. 경쟁 상대인 제조업 대국 일본과 독일보다 두배 이상 더 많이 현장에 투입하고 있다. 노동자 1만명당 로봇보급대수는 한국 1000, 일본 399, 독일 397, 중국 322다.(월드 로보틱스 2022) 인공지능(AI)과 인간의 협업으로 산업 현장과 사회 전반의 혁신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경제활동인구의 감소 추세를 상쇄하는 생산성 상승을 가져올 수 있다.

한국에는 추월의 기억이 있다. 20세기 마지막 십년 ‘산업화엔 늦었지만 정보화엔 앞서가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역량을 결집해 순식간에  IT강국으로 부상했던 한국이다. 일본의 IT를 추월하던 순간이었다. 시장에서 살 수 있었던 GSM 표준을 마다하고, 실험실에 머물러 있는 CDMA 디지털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켰던 대한민국이다. 추월의 열기로 가득한 사회, 악착스러움과 집요함이 당연한 직업 정신이었던 시절. 지금 우리에겐 부족한 것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하려는 자세일지 모른다. 한국인 특유의 ‘국란 극복 DNA’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더 나은 미래를 꿈꿀만 하지 않는가.                                                                                                                               <참고문헌>                                                       1. 최병일, "혁신이 지배하는 ‘캘리포니아 모델’로 가야", 중앙일보, 2024.3.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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