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자여! 그대 이름은 비겁자 (한겨레 칼럼)

진성조 | 2012.04.10 13:24 | 조회 7569
[안경환 칼럼] 기권자여, 그대 이름은 비겁자!
한겨레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장폴 주아리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이렇게 썼다. 200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출판된 이 소책자는 투표율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파스칼, 데카르트, 사르트르, 기라성 같은 역대 철학자들을 양산한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대로 철학한테 정치의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주아리가 ‘사유하라, 저항하라’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 서문(2012)을 썼다. 저항을 통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한 인류의 역사를 재삼 환기시킨 경구다.

제19대 국회의원 총선이 내일로 다가왔다. 임시공휴일이다. 모든 유권자가 빠짐없이 참여할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제도적 표현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번 선거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곧 마감할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평가이기도, 12월 예정된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기도 하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힘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의식이지만 일단 뽑고 난 뒤에는 대책이 마땅치 않다.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선거는 변화무쌍한 대중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붙드는 의식이다. 일찍이 셰익스피어의 명작 <줄리어스 시저>가 정치적 선택을 구하는 군중심리를 기막히게 그린 바 있다. 시저(카이사르)의 사후에 브루터스(브루투스)와 앤서니(안토니우스)가 벌인 장례식 연설 장면이다. 시저를 죽인 브루터스에 동조하던 군중이 앤서니의 웅변에 현혹되어 순식간에 표변하여 브루터스를 역적으로 규정한다.

여야의 공천전이 시작되기 직전만 해도 야당의 압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만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내부 사정이 복잡한 야당의 연합전선에 각종 악재가 겹쳤다. 계파 간의 갈등이 고스란히 노출된 공천 잡음,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일탈, 일부 후보의 도덕적 타락과 품위 잃은 언행, 실로 산 넘어 산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반대에 총력을 투입한 것도 전략의 실패다. 지지 세력의 결집에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중간 부동층의 이탈을 자초했다. 반면 체제가 안정되고 실수가 적은 새누리당이 선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주아리의 주장을 입증하는 듯하다. ‘노회한 기득권자들은 간파하고 있다. 대중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이를 이용할 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무질서와 혼란을 막기보다는 스스로 분열로 자멸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숨은 표심은 여론조사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수도권에서 휴대전화를 통한 설문조사는 지역구를 특정해서 시행하기 어렵다. 2010년 6월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공표된 여론조사에서 한참이나 처져 있던 야당의 한명숙 후보가 개표 결과 아주 근소하게 패배한 사실에서 보듯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 되는 요건, 헌법용어로 국민의 권리·의무가 있다. 헌법은 많은 국민의 기본권 중에 투표권을 핵심적 권리로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이 권리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인민주권은 피로 쟁취한 시민혁명의 산물이다. 납세, 국방, 교육, 근로, 이른바 ‘4대 의무’를 포함한 의무도 있다. 비록 법에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투표도 주권자 국민의 의무다. 그러기에 투표에 불참하는 행위를 벌하는 나라도 있다. 높은 벌금을 매기거나 차기 선거의 투표권을 박탈하기도 한다. 선거일을 임시공휴일로 만든 취지도 그렇다. 쉽게 주장하는 권리보다 이행을 주저하는 의무를 독려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권리·의무를 떠나서 기권은 주권자 국민의 악덕이다. 꼭 마음에 드는 지역구 후보자가 없어도 지지하는 정당은 있어야 한다. 설사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을 골라야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최악 대신 차악이라도 택해야 한다. 기권하는 악덕자, 비록 법으로 처벌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덕적 비난은 가할 수 있다. ‘기권자여, 그대 이름은 비겁자이니라!’ 설마하니 깨어 있는 민주 시민을 자처하는 <한겨레> 독자 중에는 한 사람의 비겁자도 있을 리 없겠지. 간절하게 믿고 싶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겨레 인기기사>

“납치여성, 신고 직후 피살” 경찰 설명도 거짓말인가
팔당 5일연속 흙탕물…“4대강 재앙 본격화되나”
“8회초 화장실 다녀왔더니 퇴장당했더라”
똥폭탄으로 조폭도 막아낸 강마을에 불도저가…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름 가진 물고기



기사등록 : 2012-04-09 오후 07:31:20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2,396개(239/160페이지)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회원게시판 이용수칙] 관리자 51744 2023.10.05
공지 상생의 새문화를 여는 STB 상생방송을 소개합니다. 환단스토리 212133 2018.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