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북방DNA 부정하려는 중국의 음모

만국활계 | 2010.11.20 18:29 | 조회 6367

한국인의 북방 DNA 부정하려는 중국의 음모

9000년 전 시작된 한민족의 북방 역사,중국 역사로 편입 시작

박원길 한국몽골학회 부회장 altanoboo@hanmail.net | 제182호 | 20100905 입력

먼 북방의 땅에, 시간 속에 사라졌다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 기지개를 켜며 존재를 알리는 문명이 있다. BC 7000년 전의 유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내몽고(內蒙古) 자치구의 요하문화다. 그 문화의 후예들은 사서의 시대엔 ‘예·맥’이란 이름으로 북방사에 깊은 기록을 남긴다. 그들은 한반도의 선민족들이다. 요하문화는 고조선과 북방민족의 선조 문명, 한민족 북방 DNA의 원형이다. 중국이 이 역사를 자기것으로 가져가려 한다. 소위 ‘탐원(探源)공정’은 요하문화를 중국문화로 단정한다. 동북공정이 고구려·발해사를 왜곡한 정도라면 탐원공정은 한민족의 근본 조상을 중화 민족화한다. 역사를 뺏긴 민족의 정체성은 표류한다. 우리 몸에 흐르는 북방 DNA가 탐원공정을 막는 방패다. 멀리 고대에서 ‘사서에 나오는 최초의 한민족’인 맥족이 출현하는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에 흐르는 북방DNA를 알아본다.

요하 홍산문화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3500년 여신 얼굴상
“늑대는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 북방 속담이다.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뛰는 늑대는 북방 민족의 자유롭고 강인한 열정, 혼의 상징이다. “초원에선 평온함 뒤에 평온함이 없고 위험 뒤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고 한다. 신바람과 피와 눈물의 땅이다. 우리 문화의 원형은 그 땅에서 시작됐다. 잊혀졌던 그 북방 DNA의 원형을 뜻밖에 비디오아트스트 백남준(2006년 사망)이 부활시켰다. 1963년 독일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개최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보이는 자리. 그는 이 전시회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소머리를 내걸며 “짐은 곧 황색 공포(yellow peril)”라고 했다. 즉 ‘오늘날의 예술은 백남준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메시지였다. 황색 공포는 칭기즈칸을 상징했다.

백남준은 생전 “내 예술세계의 출발은 북방문화 원형”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아예 로제타-돌비석을 패러디한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95년)’에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를 좋아한다”고 새겼다. 북방문화 원형에서 출발한 그는 꾸준히 세계 통합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과 통합됐다.

백남준이 몰두한 북방 DNA는 인류사에 빛을 남긴 존귀한 이념의 원천이다. 역대 북방 민족들은 사상적으로 ‘만물은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법적 인식체계, 정치적으로 ‘직접 참여주의를 통한 권력 분립’, 경제적으로 ‘교역 중시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꿈’이다. 이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에는 우열이 없고 오직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거란제국이 등장했고 “조화와 융합을 통한 혼혈잡종문화”의 이상을 추구한 대몽골제국이 건국됐다. 또 고조선 및 흉노 이래 역대 북방제국들의 길도 북방 DNA에 대한 검증과 실현과 좌절의 역사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멸망 이래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우리 몸속에 흐르는 북방 DNA로 인해 오늘의 번영을 일궈 냈다.

지금은 한민족 5000년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다. 이를 유지하려면 북방DNA의 지혜가 필요하다. ‘교역 중시’ 지혜는 오늘날 해외 진출과 교역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세계를 넓게 다녔던 북방 선조들의 밝은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이 우리에겐 그런 종합전략이 없음을 지적한다. 북방DNA가 쓴 역사는 우리의 국혼이 돼야 한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되는 고대의 문화, 한반도의 선조들이 만들었음이 뚜렷한 북방문화를 중국이 가로채고 있다. 요서문화ㆍ홍산문화에는 웅녀가 있고 환웅이 있고 고조선이 있다. 탐원공정은 ‘현재 중국 땅에 있는 문화는 무조건 중국문화’라는 논리로 역사를 비튼다. 동북공정 시대보다 훨씬 커진 대국 중국은 한민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가져가고 있다. 뿌리 없는 민족은 역사의 부평초다. 잠든 북방 DNA의 영혼-홍익인간을 불러내 국가의 이념을 넘어 21세기 인류의 이념으로 제시해야 한다. 북방 DNA의 부활이 기대되는 시대다.

북방 DNA 간직한 홍산문화, 중국역사 ...되면 단군은 중국인

동북공정에서 한 발 더 나간 탐원공정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수 woosilha@kau.ac.kr | 제182호 | 20100905 입력

지난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 박물관이 거대하게 신축돼 개관됐다. 박물관의 중앙 벽면엔 거대한 옥저룡(玉猪龍)이 상징처럼 박혀 있다. 얼굴이 돼지 형상인 옥으로 만든 용.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옥기 중 하나다. 내몽고에는 박물관 신축과 개관, 확장이 유행처럼 번진다.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임서(林西)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올해 후반기에 이전한다.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박물관은 몇 해 전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한다.

매년 해오던 요하문명 현지답사를 올해는 8월 5~14일 사이에 했다. 요하문명의 주요 거점인 조양시 골동품 거리 벽면에는 흥미로운 문구가 있다. “중화문명 1000년 역사를 보려면 북경을,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서안을, 5000년 역사를 보려면 조양을 보라."요하문명은 명실상부한 중화 문명의 기원지로 자리 잡아간다. 중국 땅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를 집중 전시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고구려ㆍ발해사를 왜곡해 심각한 역사 전쟁을 일으킨 동북공정보다 더 심각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2년 중국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 흥륭와촌에서 옥 귀걸이를 비롯해 수십 점의 옥기가 발굴됐다. 기원전 6200년 전의 것. 엄청난 발견이었다. 흥륭와문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참 뒤인 2004년 7월 24~28일 적봉에서 열린 제1회 홍산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선 이 옥 귀걸이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 귀걸이’이자 ‘중국 옥문화의 기원’이라고 발표됐다. 같은 해 요녕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 몽고족 자치현에서는 일곱 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돌로 쌓은 용 형상물인 석소룡이 발견되었다. 발굴은 계속됐다.

2010년 8월 8일 개관된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 황하문명보다 오래된39요하·홍산문화39를 중국 문화의 기원으로 선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명은 한반도 선조 민족이 건설한 문명이다. 고조선의 뿌리 문명이기도 하다. 중국 내에서도 39요하 문명=중국 문화39를 비판하는 의견이 많다. 사진=우실하 교수
8000년 전 치아 수술도 해
1987년에는 내몽고 적봉시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한기 소하서촌에선 요서 지역의 역사지도를 바꾸는 발굴이 이뤄졌다. 반땅굴식 주거 유적에서 기원전 7000년께의 ‘흙으로 만든 얼굴상(陶塑人面像)’이 발굴됐다. 동북아 최초의 것이었다. 유적지는 ‘소하서문화’로 명명됐다. 요하문명이 토해내는 놀라운 유물은 끝이 없었다. 가장 오래된 ‘복골(점치는 뼈)’이 발견된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최초의 봉황 모양 토기가 발견된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있다. 절정은 홍산문화였다.

1979년 5월 요녕성 조양시 객라심좌익 몽고족자치현 동산취촌 뒷산 정상에서 대형 제단인 동산취 유적이 발견됐다. 주변 발굴이 계속됐고 1986년 7월 신화통신은 건평과 능원의 경계 지역에서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대형제단·여신묘·적석총이 모두 모여 있는 거대한 ‘우하량 유적’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타전했다. 중국 민족이 3황5제의 신화시대로 여겼던 기원전 3500년께에 초기 국가단계 수준을 보여주는 대규모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우하량 유적 이전 중국은 기원전 4000년께의 황하 유역 앙소문화와 양자강 하류의 기원전 5000년께 하도모 문화를 중화문명의 2대 원류지로 삼고 있었다.

최근에도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새로운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다. 2001~2003년까지 재발굴된 흥륭화문화 유적에서는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더 나온다. 2008년 2월 20일에는 2003년 흥륭구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에서 인공 치아 수술 흔적을 발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0년 8월 31일 신화통신은 또 다른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2003년 흥륭구유적에서 발견된 1500여 알의 탄화된 기장과 조(90% 기장, 10% 조)가 ‘세계 최초의 인공재배 기장과 조’라는 것이다.

세계적 권위의 캐나다 토론토대의 탄소-14 연대 측정 결과 7700~8000년 전의 것이고, 이는 중유럽에서 발견된 것보다 2000~2700년 앞섰다. 이 지역이 북방 한작(旱作)농업의 기원지 혹은 그중 하나가 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세계 중요 농업문화 유산’으로 등재 신청하기로 했다. 요서 지역에서 기원전 7000년으로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발견되고 계속 고고학적 성과가 나와 요하 유역 일대를 ‘요하문명’으로 명명하고 중화문명의 3대 원류로 잡고 있다. 요하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가운데 하나로 부각시키고 있다.

문제는 한민족 문화의 원류와도 깊은 관련성이 있는 요하문명을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의 영역’이고 ‘중화문명의 실질적인 기원지’로 단정하고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을 동북아의 시원 문명으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것’으로 독점하는 것이다.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문명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한민족의 선조인 북방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인공이 사용한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남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으로 황하문명에는 없는 것이다. 다롄대학의 한 교수도 “(이 지역의) 평저통형관은 동북삼성, 내몽고 동남부, 흑룡강 하류 및 한반도 동북구와 서북부 지역에서 발견된다…모두 동방의 전통문화에서 기원했다”고 했다.

흥륭화문화의 상징인 옥 귀걸이도 같은 형태가 동 시대의 한반도에서 출토됐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이 그것이다. 황하ㆍ양자강 유역의 것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흥륭와문화 옥 귀걸이의 놀라운 점은 사용된 옥에 있다. 압록강변 수암 지역의 옥을 450㎞를 옮겨와 가공한 것이다. 이는 기원전 6000년께 요서·요동·한반도 북부가 동일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우하량 여신묘 제단터에는 희생으로 사용된 곰의 아래턱 뼈가 발견됐고 여신상 옆에서는 흙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곰상이 발견됐다. 옥으로 만든 곰룡, 즉 옥웅룡(玉熊龍)도 다수 발견됐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곰토템은 지역이나 시기적으로 단군신화의 웅녀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한민족 문화의 원류일 수 있는 것이다.

또 골복은 부여·가야·삼한 등 북방 전통을 뿌리로 한 예·맥족의 나라의 것이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조에도 ‘부여 사람이 골복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변한과 가야에서는 삼한시대까지도 골복이 발견된다.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비파형 동검도 황하문명에는 없고 북방민족들이 사용한 검이다. 홍산문화의 계단식 적석총들은 고구려·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중원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에서부터 보이는 ‘치(雉:석성에서 돌출된 부분)를 갖춘 석성’도 고구려에서 부활한다. 이 역시 고구려 이전까지 중원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요하문명은 한반도 선 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사는 민족의 역사는 중국사" 주장
중국은 그러나 탐원공정을 통해 요하문명을 황제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2004년 7월 24~28일 적봉에서 열린 제1회 홍산 문화학술연토회의 1분과 주제는 ‘요하문화와 중국 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다. 2010년 8월 10~12일 적봉학원(우리의 대학)에서 개최된 ‘제5회 홍산문화 고봉논단’에선 “요하문명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논문들이 대거 발표됐다. 올해는 ‘발굴 홍산문화, 전파 중화문명’이라는 주제로 “사회 전반에 홍산문화를 광범위하게 알리고” “홍산문화를 선전, 보급,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최됐다.

요하문명의 상징물도 중국화하고 있다. 홍산문화 유적지가 밀집한 내몽고의 적봉시, 옹우특기, 오한기, 요녕성의 능원시, 건평현 조양시 등의 상징을 몇 해 전부터 홍산문화의 상징인 옥저룡(玉猪龍)ㆍ옥웅룡(玉熊龍)으로 교체했다. 적봉텔레비전(1TV-3TV) 상징도 옥저룡이다. 2004년 12월 14~31일 ‘오천년 이전의 문명’ 6부작의 마지막은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지’ 편이었다.

이런 작업에는 ‘현재 중국 영토에 사는 민족은 중화민족. 그들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56개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중화민족’으로 묶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바탕 이론이다. 오늘의 중국에 맞춰 원시사까지 중국화한 것이다. 이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1996~2000)’→‘동북공정(2002~2007)’→‘중화문명탐원공정(2003~ )’→‘국사수정공정(2005~2015)’으로 이어지는 논리다.

국사수정공정은 이런 일련의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2005~2007년 기초자료 수집을 마쳤다. 2007년부터 본격 수정을 시작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5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재편찬 중이다. 서준(徐俊) 국사수정공정 공작위원회 주임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학자, 전문가가 참가한다. 올해 7월 11일에는 상해에서 ‘제4차 점교본 24사와 『청사고』 수찬공작회의’가 열렸다.

요하문명·홍산문화를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의 땅’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정리하면 고구려·발해사를 왜곡하는 정도의 ‘동북공정’을 넘어 한민족의 근본이 뿌리째 없어진다. 고조선의 배경인 홍산문화를 신화적 인물 황제의 문화로 만들면 단군·웅녀와 여기서 나온 고조선·고구려 이하 한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사로 편입된다. 예맥족, 부여족, 주몽, 해모수 등 이곳에서 활동한 고대 한민족의 선조들은 황제의 후예가 된다. 그 결과 한국의 역사, 문화 전체가 중국의 방계 역사ㆍ문화로 전락한다. ‘탐원공정’의 상고사 왜곡이 갖는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한민족 선조 '치우' 중국서 조상으로 모셔

기록으로 본 한민족의 북방 DNA

김운회 동양대학교 교수whkim@dyu.ac.kr | 제182호 | 20100905 입력

중국인이 선조 3인 중 하나로 숭배하는 치우(아래 사진 왼쪽). 옆은 황제와 염제다. 치우의 한자 뜻은 39벌레 같은 놈39. 한민족의 동이족이어서 상소리로 부르다 90년대 중반 동북공정 때 입장을 바꿨다. 위 글자는 39화삼조당39, 중국인 세 조상을 모신 곳이란 뜻이다. 사진=우실하 교수
#장면1 2010년 4월 21일 저녁, ‘카자흐스탄의 날’ 개막 행사장인 서울 호암아트홀. 공항에서 곧바로 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연단에 올랐다. 그는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가까운 형제의 나라”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이 대통령은 박수를 쳤다.

#장면2 2009년 9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중심의 정부청사. 청사를 둘러싼 도로가 칭기즈칸로다. 칭기즈칸로는 이내 ‘서울의 거리’로 이어진다. 주위의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손님들이 “두(동생이라는 뜻)”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종업원을 찾는 것이다. 종업원들은 손님을 ‘아흐(Ax:형)’라고 부른다. 한국의 식당에선 손님과 종업원들이 서로 ‘아제’ ‘언니’ ‘이모’ ‘고모’ 등으로 부른다. 의제가족(擬制家族) 호칭이다.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왜 한국을 형제라고 했을까. 몽골은 왜 한국에서처럼 남을 가족 호칭으로 부를까. 문제를 푸는 열쇠 중 하나가 DNA 접근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한국인 주류가 알타이(카자흐ㆍ몽골) 등에서 내려온 북방계라고 한다.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2004년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한국ㆍ몽골ㆍ일본인이 유전적으로 높은 연관성을 보인다”고 했다. 2009년 12월 인간게놈연구회(HUGO) 아시아지역 컨소시엄은 아시아 73개 민족의 염색체를 조사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인류는 남아시아를 거쳐 아시아 5개족인 오스트로네시안, 오스트로아시안, 타이카다이, 후모민, 알타이족으로 분화됐다고 했다. 한국인은 알타이계에 속하며 만주ㆍ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고 이들 일부는 이웃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서울대 서정선 교수도 “한국인은 북방계 후손”이라고 했다. 역사 이전 한국인의 이동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유입되는 남방계 ▶알타이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내륙이나 초원길을 거쳐 유입하는 북방계의 두 갈래지만 북방계가 7대 3으로 많다. 한국의 대표적 무속연구가 서정범 교수는 “한국인들의 집단무의식의 기저에도 북방 DNA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했다.

북방 DNA는 역사시대에 긴 기록을 남긴다. 삼국유사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이렇게 썼다. “하느님(환인)이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의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를 신시라 일렀다.” 중국의 『사기』에서 풍백·운사·우사는 치우(蚩尤)의 신하로 기록돼 있다. ‘환웅=치우’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치우’는 ‘버러지 같은 놈’이란 욕이다. 중국의 쉬쉬성(徐旭生) 교수는 1940년 ‘치우는 동이족’이라고 고증했다. 치우는 맥족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의 『상서(尙書)』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오랑캐들)’이란 말이 나온다. 만은 남쪽 지방 사람, 맥은 황하 북방 거주민으로 고대 한국인의 조상이다. 한자로 야생 고양이를 뜻하는 맥의 현지 발음은 ‘모’ 또는 ‘솨(화)’ ‘쉬(허)’로 추정된다. 쇠(철) 또는 해라는 뜻이다. 맥족은 BC 7세기 선진문헌(진나라 이전 문헌)에 산시(陝西)·허베이(河北) 거주인으로 처음 나타난다. BC 5세기 산시(山西), BC 3세기 쑹화(松花)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역시 한민족의 선조인 예는 BC 6~3세기 저작물로 추정되는 『관자』에 처음 나타났다. 예는 ‘똥’이란 뜻의 한자지만 현지 발음은 ‘쉬(휘)’ 또는 ‘쇠’에 가깝다. 맥과 같은 뜻이다. 한자로만 보면 예맥은 ‘똥 고양이’다. 중국은 북방민족을 지독히도 욕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예맥이 고대에 건설한 대표적 나라가 고조선과 부여다. 부여는 고구려와 상당 기간 공존하며 예맥 문화권을 유지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왕의 도장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새겨져 있다고 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맥과 동일시하고 후한대에는 고구려를 맥과 동일시했다(『후한서』 화제기). ‘부여는 본래 예의 땅’이라고도 했다(『후한서』 동이전). 또 “예ㆍ옥저ㆍ고구려가 본래 (고)조선 땅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예맥의 나라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몽골ㆍ일본 등의 기원이 된 국가는 ‘까오리’다.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를 세운 동명은 금와왕(金蛙王:금개구리)의 시녀가 낳았다. 금와왕은 까오리의 국왕이며 동시에 알타이인의 시조로 나온다. ‘까오리’는 고리(槁離), 콜리(忽里:Khori), 고구려, 고려 등으로 나타나지만 발음은 까오리로 수렴된다.
러시아 알타이 공화국의 바르나울 공항에서 퉁구르, 톱스키를 거쳐 알타이의 중심 벨루카봉으로 가는 길.

‘벨루카’는 “언제 어디서나 정상의 하얀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한역하면 태백산(太白山)이다. 전형적인 알타이 마을들엔 성황당ㆍ절구ㆍ맷돌 등이 낯익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비교언어학자인 스타로스틴(Starostin) 박사가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알타이어에는 닭·말·밥·옷 등 우리말과 같은 단어가 4000여 개 이상이다. 벼농사 관련어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북방계다.

고리(까오리)와 고조선을 뿌리로 세워진 알타이계 나라는 한반도에는 고구려·백제(남부여)·신라·고려·조선 등이고 만주 몽골 지역에선 부여·북위ㆍ발해ㆍ요ㆍ원·금·청 등이다. 일본도 알타이계-부여계 나라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지린은 중국의 정사인 25사와 『수경주』 『전국책』 등을 토대로 60년대 고조선 옛 땅이 현재의 베이징 인근에서부터 요하까지라는 사실을 문헌으로 철저히 고증했다. 한국 사학계도 최근에야 이를 받아들여 고조선 중심지가 초기 요하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북방 DNA를 공유했기 때문에 고려와 몽골의 연대는 특이했다. 1218년 12월 두 나라는 요나라(거란족)를 격퇴하기 위해 연대했다. 당시 조충 장군과 몽골 카치온(哈眞) 장군은 의형제를 맺으며 “천년의 행복으로 두 나라는 영원한 형제가 됐다. 만세 뒤 우리 아이들이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하자”고 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은 막내 딸을 충렬왕에 시집 보내고 고려와 결혼동맹을 통해 세계 지배를 했다.

조선 초까지 이어진 북방 DNA, 성리학에 밀려 소멸

윤은숙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tongalak@hanmail.net | 제182호 | 20100905 입력

『용비어천가』 86장에는 “어린 이성계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여섯 노루와 다섯 까마귀를 떨어뜨리고 비스듬한 나무를 넘어서 다시 말에 올라탔다”는 기사가 나온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물구나무를 선 채, 좌우로 바꿔가며 말을 옮겨 타는 몽골의 마상 무예를 연상케 한다. 이성계의 뛰어난 말타기 실력엔 그의 가문이 가진 몽골적 속성이 반영돼 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穆祖)는 지금의 연변자치주에 있는 오동(斡東)을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남경(南京, 지금의 연길) 일대를 지배하는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이후 조부 이행리(翼祖)가 1300년에 쌍성 등지의 다루가치가 된 이래 이춘(度祖)→이자춘(桓祖)→이성계로 이어지며 직위를 세습해 왔다. 부얀테무르(이춘), 울루스 부카(이자춘) 라는 몽골 이름도 썼다.

이춘의 아들들의 이름은 타수푸카, 울리제이 부카였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도 몽고의 고려 지배 기구인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부(회령)였다.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 그들은 몽골제국의 몽골국인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과 유사했다.

특히 이성계는 1362년 몽골 최고 군벌 세력인 나가추의 고려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도 친병 1000여 명을 동원해 몰이사냥, 우회전술과 산악전 등의 방식으로 적군을 격파하는 등 몽골적 특성을 발휘했다. 이런 특성은 조선 초기 북방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돼 요동 정벌론이나 신기전 등의 무기 개발로 연결됐다.

몽골 제국의 몰락이라는 국제정세를 꿰뚫으며 신흥 사대부와 손잡고 1392년 창업된 이성계의 조선왕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표방했지만 실은 북방 유목 제국적 전통을 견지했었다. 초기 조선조는 스키토ㆍ시베리안 북방민족사적 정통성을 담아낸 신왕조라고 재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후 조선조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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