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몽펠리에, 퇴학당한 `약제사` 노스트라다무스, 예언가로 돌아오다

박기숙 | 2010.09.28 00:03 | 조회 6652

프랑스 몽펠리에, 퇴학당한 `약제사` 노스트라다무스, 예언가로 돌아오다

몽펠리에 중심인 코미디 광장의 활기찬 모습. /프랑스 외무유럽부 제공


"이번에 등록한 미셸 드 노스트라다무스는 약제사였으므로 박사로서의 자질이 염려돼

나 기욤 롱들레는 교무처장의 직권으로 이 학생을 제적에 처한다. "(1529년 11월 몽펠리에대 등록부)

1529년 노스트라다무스라는 한 학생이 몽펠리에 의과대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훗날 세기의 예언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스물여섯의 청년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떻게 해서 몽펠리에 의과대에 입학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학교는 왜 그를 퇴학에 처한 것일까?

1503년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출생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15세 때 아비뇽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활달한 성격으로 동급생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가 쏟아내는 신비로운 별 이야기는 친구들을 매혹시켰고,'젊은 점성가'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러나 의욕에 찬 학창생활은 1년도 안 돼 끝을 맺는다. 페스트가 번져 학교가 폐쇄됐던 것이다.

이 일은 탐구심이 많은 노스트라다무스로 하여금 페스트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로부터 8년간 그는 프랑스 농촌과 산간지방을 돌며 향초와 약초 연구에 착수한다.

이를 통해 나름대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약제사(오늘날의 약사)가 된다.

약초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히 그를 의학에 관심을 갖게 유도했고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던

몽펠리에대 진학으로 이어졌다.

몽펠리에대는 의학과 법학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하지만 의욕에 찬 그는 또 한번 좌절을 맛보게 된다. 약제사라는 직업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약제사는 사이비 연금술사쯤으로 간주돼 박사 후보자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인식됐던 것이다.

학교에서 쫓겨난 노스트라다무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몽펠리에에 온 진짜 이유는 이곳이 약초 연구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몽펠리에는 중세 이래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온갖 신기한 식물과 향료들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이곳으로 집결됐다.

몽펠리에인들은 해외에서 유입된 진기한 식물과 향신료를 첨가해 가공식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값비싼 허브가 첨가된 이 식품들은 유럽의 제왕과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는데,

그 중 '가르히오필라툼'이라는 허브가 첨가된 와인의 인기는 대단해 영국에까지 수출됐다.

헨리2세는 왕실 리셉션에 이 와인만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몽펠리에는 와인 명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고,이러한 명성은 14세기까지 지속된다.

와인 수요가 늘다 보니 몽펠리에는 향신료 무역의 거점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이는 몽펠리에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몽펠리에는 16세기에 들어와 종교개혁의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진보적 지식인의 집결지이자 대학도시이기도 했던 몽펠리에는 프랑스 어느 도시보다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이로 인해 생피에르 성당을 제외한 유서 깊은 성당들이 이때 모조리 파괴됐다.

결국 1598년 낭트 칙령으로 프랑스 왕실은 몽펠리에의 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루이13세는 즉위하자마자 몽펠리에를 반역의 도시로 규정하고 신교 세력을 소탕했다. 이후 몽펠리에는

신교 아지트로서의 명성을 잃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내에서는 드물게 신교도가 많은 도시다.

일단 도시가 안정을 되찾자 몽펠리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날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명소 대부분은 종교전쟁 이후 건설된 것들이다.

구시가를 둘러싼 성채에 잇닿아 있는 페루공원은 루이14세가 명해 조성된 산책로로

이국적인 정원수와 18세기에 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지어진 수도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멋들어지게 지어진 물의 궁전을 볼 수 있다.

페루공원 안의 '물의 궁전'


공원입구 맞은편에는 개선문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구시가를 보려면 이곳으로 뚫린 포슈 거리를 통과해야 한다.

좌우로는 현대적인 부티크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사이로

뚫린 골목길로 몇 발자국만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생각에

잠긴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주칠 것 같은 중세의 풍경과 만날 수 있다.

로슈 거리와 로지 거리를 지나면 널찍한 광장이 나타나는데

바로 유명한 코미디 광장이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오페라

광장을 모방해 만든 이 광장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오페라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파리 오페라좌의 설계자인

가르니에의 제자가 설계한 것이다. 광장 좌우에는 노천카페가 즐비한데 이곳의 테라스에서 지중해서 불어오는 미풍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황홀하다.

몽펠리에를 떠난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떻게 됐을까?

기록에 의하면 그는 퇴학당한 2년 뒤 쥘 세자르 스칼리제라는 이탈리아 출신 인문주의자의 초대를 받아 아젱으로 간다.

그는 스칼리제로부터 식물학 지식과 환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보인다. 1545년에는 페스트가 엄습한 마르세유로 가서 당대의 명의 루이 세르의 지도 아래 페스트 치료법을 연구한다. 1547년에는 전염병이 돌던 엑상프로방스에 들어가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제조한 이른바 '장미 환약'으로 치료에 나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가 예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것은 이 시기에 예언이 포함된 연감을 출판하면서부터다. 그의 몇몇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그러나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가로 불리길 거부하고 자신의 미래 예측은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한 추론임을 강조했다.

아마도 그의 예측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소박한 희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노스트라다무스를 가공할 예언가로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의 예언을 필요로 하는

정치권력과 일부 종교인,무엇보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기적을 희구하던 민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몽펠리에 개선문의 지척에는 '소나무의 망루'가 서 있다.

이 망루는 원래 적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그 꼭대기에 소나무 화단이 조성됐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노스트라무스가 말년에 펴낸 예언서에서

이 망루의 소나무가 죽는 날 몽펠리에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사람들은 이곳에 소나무를 심고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애지중지 그것을 가꾸고 있다.

도시의 번영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 속에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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